소설리스트

곤륜패선-160화 (160/325)

< 제 50장. 화마(火魔). -01 >

당민호가 긍정적인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정마대전 이후 가장 규모가 큰 행사인 만큼 화제성도 화제성이지만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일 게 분명해서였다.

“그 부분은 참석하시겠다는 분들을 모시고서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참가인원에 따라 필요한 공간 역시 달라질 테니까요.”

“일단 큰 그림만 그리고서 찾아온 것이군.”

“그렇습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당민호의 시선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제갈현 역시 벽우진을 바라봤다.

“어차피 난 참가 못한다며?”

“설명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심사위원이 어떻게 대회에 참가해? 그리고 네가 나가면 애들이 출전하겠어?”

“왜 그래? 무인들의 호승심을 무시하지 마.”

“그런 이들은 몇 없어.”

당민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패선과 겨뤄볼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는 이들도 물론 있겠지만 거의 대다수는 기가 꺾일 터였다.

그렇기에 벽우진이 출전하는 건 좋은 영향보다는 악영향이 더 컸다.

“아쉽네. 꼭 나가보고 싶었는데.”

“심사위원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장문인.”

“불구경만큼이나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이잖아. 물론 네 제자들이 출전할 때 너는 심사를 볼 수 없다는 거 알지?”

“응?”

제갈현까지 조용히 합세해서 달랬다.

그 역시도 벽우진이 출전하는 것만큼은 막고 싶어서였다.

한데 이어진 당민호의 말에 벽우진이 눈을 반짝였다.

“뭐야? 설마 그 부분은 생각지도 않았던 거냐?”

“응. 내가 출전할 수 있나, 없나만 생각해서. 그런데 제자들이 출전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벽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비록 자신은 출전하지 못하지만 제자들이 나간다면 그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동기부여도 되고 말이다.

“크게 둘로 나누어서 비무대회를 진행할까 합니다. 삼십 세 이하의 후기지수들의 비무대회와 오십 세 이하의 중견고수들의 비무대회로요.”

“연령대는 괜찮네.”

“대신 후기지수들의 비무대회는 서른 살 이내는 전부 출전할 수 있게 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중견고수들보다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상상을 하는 것인지 당민호가 재미있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게 제갈현이 노린 점이기도 했다.

“일단 구상은 이렇게 해둔 상태입니다. 하지만 반수 이상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폐기되겠죠.”

“그러기에는 좀 아쉬운데. 확실히 계획은 나쁘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일단 나는 찬성. 본가에도 시간은 필요해. 넌 어때?”

“나도 찬성. 재미있을 것 같아. 흐흐흐!”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느껴지는 웃음에 당민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작당한 표정을 지으면 사달이 몇 번은 날 것 같아서였다.

“이상한 생각 할 게 뭐 있어. 난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건데. 그리고 우리가 찬성한다고 무조건 비무대회를 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의도가 좋잖아.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난 될 거 같은데? 더구나 기획안을 만든 사람이 제갈가주이기도 하고.”

“일단은 초안입니다. 말 그대로 골조만 잡은 상태죠.”

“그럼 해 봐. 우리 둘 다 찬성했으니.”

벽우진이 안건을 종결시켰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럼 두 번째로 준비한 걸 들어보도록 할까.”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사히 첫 번째 안건을 마무리 지은 제갈현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두 번째 계획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차분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설명에 벽우진은 물론이고 당민호도 귀를 기울였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에 벽우진은 뒷마당에 나왔다.

적막감이 감도는 이 시간을 벽우진은 개인적으로 좋아했다.

물론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익숙해지기도 했고, 그동안 너무 번잡스러웠기에 지금은 이 고요함이 너무나 좋았다.

“정신없는 하루하루들이었어.”

한적한 곤륜산과 달리 사천당가는 그야말로 소란스러움의 극치였다.

온갖 잡다한 소리들로 시끄럽기도 했지만 이번 당민호의 생일연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찾아왔기에 더더욱 북적거렸다.

그로 인한 소음 역시 상당했기에 벽우진은 조금 동떨어져 있는 별채에 머물렀음에도 솔직히 답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벽우진이 얻은 게 전혀 없는 건 또 아니었다.

“운정 선배. 무당권제. 거기에 제왕검이라.”

검선이라 불리는 운정에 이어 비밀리에 그를 찾아온 사람은 두 명이나 더 있었다.

무당권제라 불리는 혜량과 남궁진이 남모르게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도 똑같았다.

“확실히 중원에는 인재가 많아.”

정중히 비무를 청하는 두 사람을 벽우진은 차마 돌려보낼 수 없었다.

나름 호기심도 있었고.

그리고 그 결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비록 그보다는 경지가 낮았음에도 비무를 하면서 깨닫는 바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검선과의 비무는 지금도 벽우진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스르르륵.

운정과의 비무를 떠올리며 벽우진이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뒷마당을 노닐기 시작했다.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복기하듯 비무를 곱씹었던 것이다.

“후우.”

운정의 경지는 분명히 그보다는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배울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공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세 살배기 아이한테도 배울 점은 있다고 말이다.

‘음양이 만나 조화를 이루며 태극을 만들었었지.’

만류귀종이라는 말처럼 운정의 검은 그의 검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갈래이기는 하나 그 뿌리는 도맥이었기에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슷하면서도 크게 다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조화라.’

두 눈을 감은 채로 벽우진이 느릿하게 뒷마당을 거닐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곤륜의 무공 같으면서도 달랐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무공 같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일보 하나하나에, 손짓 하나하나에는 현기(玄氣)가 짙게 서려 있었다.

스윽. 스으윽.

벽우진의 머릿속에서 곤륜파의 수많은 무공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알고 있는 것을 넘어 실제로 모두 다 체득한 무공이었다.

동시에 언제라도 펼칠 수 있는 무공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단순히 다 익히기만 한 거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마음먹은 대로 펼칠 수는 있지만 그 너머를 보려 하지는 않았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벽우진의 양손이 허공에 묘한 선들을 그렸다.

그러나 그 어떤 움직임도 곤륜파의 무공과 닮지는 않았다.

‘어쩌면 너무 빨리 넘어가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지도.’

벽우진의 뇌리에 운정이 나타났다.

마치 혼자서 검무를 추는 듯한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덩실덩실 춤을 추듯이 검을 휘두르는 운정이었지만 벽우진은 알았다.

그의 검에는 태산조차도 짓뭉개고 갈라버릴 어마어마한 거력이 서려 있음을 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운정이 익힌 건 태극검법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오직 태극검 하나만으로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반면에 나는 단순히 무공만 익혔지.’

경지는 분명히 벽우진이 높았다.

그렇기에 이긴 것이었고.

하지만 검술만 봤을 때는 패배했다.

한계를 넘은 운정과 달리 벽우진은 극성을 이룬 것에 불과했다.

‘만약 선배님이 태극검이 아닌 태청용형검이나 상청무상검도를 익혔다면···.’

말 그대로 가정일 뿐이지만 만약 운정이 두 무공 중 하나를 익혔다면 패배하는 건 벽우진 이었을 터였다.

아니, 운이 좋다면 무승부 정도.

그렇기에 벽우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오만하고 자만심에 빠져 있었는지를.

‘정말 많은 걸 얻고 배운 사천행이로구나.’

춤사위를 펼치듯 벽우진의 양팔이 바람결을 따라 흩날렸다.

동시에 벽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쩌면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경지를 이번 기회에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당장은 떠나고 싶지 않지만 말이지.’

벽우진의 두 눈이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안에 청민을 비롯해서 청범과 제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지독한 한기에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는 날씨에 곤륜산을 오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삼삼오오 모여서 움직이는 숫자가 물경 500여 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날씨 한 번 더럽게 춥네.”

“겨울이니까 어쩔 수 없지.”

“꼬우면 고수가 되면 된다. 수화불침을 이루면 웬만한 더위와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더라.”

“그러려면 최소한 절정에는 올라야 된다, 병신아.”

하나 같이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들이 킬킬거렸다.

자상과도 같은 흉터 한두 개씩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고, 몇몇은 특이한 문신까지 한 이들이 지게에 한 가득 짐을 싣고서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들키진 않겠지?”

“쫄리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던가.”

“아무도 안 말린다.”

“다른 형님들도 마찬가질 걸.”

“대신 앞으로 산도적 노릇은 못하겠지. 큭큭!”

비쩍 마른 체구의 장한이 살짝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복수심에 불타서 참여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일단 패선의 성격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으니까.

“너희들은 안 무섭냐?”

“무섭긴. 다 불탔는데 어떻게 알 거야?”

“불이 났으나 누군가 불을 피운 건 알겠지. 하지만 곤륜산이 싹 다 탔는데 지가 무슨 수로 증거를 찾을 거야? 그렇다고 우리가 곤륜산에 오르는 거 본 사람 있어?”

키는 작지만 옹골차다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육중한 체구의 남자가 두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다들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없지. 있어도 뒈졌지.”

“재수가 없는 거지. 하필이면 오늘 약초 캐러 산에 올랐으니.”

“이런데도 들킬 거라 생각해?”

“흐음. 그렇기는 한데···.”

장한이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상식적으로는 흔적이 남지 않는 게 맞았다.

더구나 마구잡이로 준비한 게 아니라 무려 한 달 동안 인원을 모으고 철저하게 준비한 끝에 시작한 작전이었다.

패선이 사천성으로 넘어간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난 다음에 움직였고.

“쫄리면 내려가라니까? 안 붙잡아.”

“대신 평생을 겁쟁이로 살겠지.”

“야, 겁쟁이는 귀엽잖아. 병신이 더 어울려. 아니면 고추를 떼던가.”

“어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계집질도 못하면 무슨 재미로 사냐.”

놀리듯이 순차적으로 입을 여는 장정들의 말에 장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후환이 두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려갈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걱정이 될 뿐이었다.

“안 내려갈 거거든!”

“그래. 그래야 사내대장부지!”

“암! 부랄 두 쪽 달고 태어났는데 할 건 하고 뒈져야지!”

장한의 포효에 여기저기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다들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다들 가슴 한 구석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패선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곤륜파를 향해 가는 중이었으니까.

비록 벽우진은 없지만 현재 곤륜파에는 두 명의 장로와 아홉 명의 호법이 남아 있었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는 걸 알려줘야지!”

“암! 당하고만 살 수는 없지!”

“핏값은 똑같이 핏값으로 받아내야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남자들은 더욱더 과격하게 소리쳤다.

이렇게라도 해야 두려움이 가실 것 같아서였다.

“지 놈도 잃어 봐야지. 모든 걸 갖기 전에 말이야.”

“살아생전에 곤륜파가 두 번이나 불타는 걸 보게 되면 기분이 아주 개 같을 거야.”

“그러니까 더욱 꽁꽁 숨어야 하는 거 알고 있지?”

“당연하지. 이번 일 끝내면 난 서장으로 갈 거다.”

“난 대막.”

다들 하나같이 세외를 말했다.

중원에 남아 있는 건 모두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 제 50장. 화마(火魔).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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