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9장. 패선(覇仙)을 찾는 사람들. -02 >
남궁가주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고 싶었기에 벽우진이 냉큼 제갈현이 꺼낸 화제를 물었다.
그러나 당민호는 딱히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환심을 사기 위한 단어 선택이었음에도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각 방파나 세가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을 두 분께서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두 분께서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중원무림이 입은 피해는 최소 지금보다 두 배 정도는 되었을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나선 건 아니지. 아들이 나선 거지.”
“나도 쳐들어 와서 싸운 것일 뿐. 내가 나서서 정리한 건 아니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분께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건 그렇지.”
당민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어서였다.
특히 벽우진의 경우 대활약을 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입니다. 오독문의 정예는 건재하고 북해빙궁 역시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봉문을 할 정도는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엊그제 모여서 회의한 거잖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자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단 피해가 생긴 다음에야 대응하고 조치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틀 동안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피해를 아예 없게 만들 수 있을까 하고요.”
의자에 늘어져 있던 벽우진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남들이 안 보는 사이에 이렇게 홀로 고뇌하고 노력하는 줄은 몰라서였다.
반면에 그는 오직 곤륜파의 안위에 대해서만 생각했는데 말이다.
스윽.
당민호도 벽우진과 같은 마음이었는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더 이상 툴툴거리지 않고 제갈현에게 집중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나왔어?”
“최선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방법을 두 가지 생각해냈습니다.”
“말해봐.”
자세를 바로 한 당민호가 눈을 빛냈다.
천재라 불리며 무림맹이 결성되면 제 1순위로 총군사 자리에 앉을 제갈현이 어떤 묘안을 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첫 번째는 비무대회입니다.”
“비무대회?”
“예. 손자병법에서 이르기를 전쟁이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상책이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세를 보여주자?”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던 당민호가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전쟁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시간 또한 벌 수 있었다.
“예. 더 이상 피를 흘리는 건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저희는 적들에 대해서 모르지만, 적들은 저희에 대해서 어쩌면 속속들이 알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사도와 마도를 말하는 것이군.”
“정사중간의 무리 역시 백분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중원인이지만 그렇다고 믿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어중간하게 믿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배제하는 게 더 나았다.
냉정할지 모르지만, 변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비무대회라.”
“저희의 저력을 세외에 알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불어 신진고수들도 발견하고요. 후기지수뿐만 아니라. 게다가 시기 또한 좋습니다.”
“구대문파, 오대세가의 빈자리를 욕심내는 이들이 많기는 하지.”
폐쇄적인 사천당가이지만 그렇다고 바깥의 상황에 아예 손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타 지역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중이었다.
제갈세가 역시 정보력으로 따지면 백도무림에서 수위에 드는 가문이었고.
“그 욕망을 제대로 분출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쪽 다 기회라고 생각하겠군.”
“그렇습니다.”
당민호가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쁘지 않은 계획 같아서였다.
아니, 오히려 지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계획이었다.
막말로 중원무림의 저력을 보여주자고 혈투를 벌일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넌 어떻게 생각해?”
“계획은 나쁘지 않지만 문제는 그 의도대로 사람들이 따라와 주냐는 것이겠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은 이들도 있겠지만, 반대로 꽁꽁 숨겨두려는 이들 역시 존재할 거다.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 숨겨두려는 힘들도 다 드러내야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거지.”
“정확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서 골머리를 썩고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것은 상금이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곳들은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니까요.”
“무공서, 혹은 영약은 있어야 눈이 돌아가겠지. 물론 평범하지 않은 것들로. 예를 들면 절세무공서?”
“그런 걸 어떻게 구해? 그리고 막말로 누가 그런 걸 내놓겠어? 자신들이 익히지 않고.”
“그래서 어렵다는 거잖아.”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쉽지 않다고 말한 것이었다.
“본가에서 가지고 있는 무공들이 꽤 되기는 하지만 전 무림인이 혹할 정도는 아닙니다.”
“신병이기도 괜찮기는 하지. 오히려 효용성적인 부분에서는 무공서보다 훨씬 나으니까.”
“근데 그걸 왜 날 보면서 말해?”
“사천당가에는 공방이 있잖아. 아니면 따로 챙겨놓은 게 있을 지도 모르고.”
“나보고 토해놓으라고?”
당민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사천당가에 공방이 있고, 실력이 뛰어난 대장장이들이 있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중원무림을 위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천당가만 부상을 책임질 이유는 없었다.
역사가 길고 전통이 깊은 곳은 사천당가 말고도 많았으니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의논할 수도 있다는 거지. 막말로 한 곳이 독박을 쓸 필요는 없잖아?”
“그럼 애초에 그렇게 말했어야지.”
“네가 발끈해서 뒷말을 못하게 만들었잖아.”
“커험!”
민망해진 당민호가 고개를 돌렸다.
아예 애먼 곳을 쳐다봤던 것이다.
“우승자에게 줄 상금이나 부상에 대한 문제는 두 번째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참여시킬까 하는 것입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나오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온 게 있을 것 같은데?”
“맞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두 분을 찾아온 것이기도 합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나보다 이 녀석을 먼저 찾아온 거 아냐?”
당민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제갈현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똑같이 묘한 미소로 응수했던 것이다.
“가장 좋은 건 두 분께서 함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없었으면 두 번째였겠네?”
“꼭 두 번째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 소림무제도 있고, 무당권제도 있는데. 아니면 두 곳보다도 더 친한 남궁세가도 있고.”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끼어들었다.
꼭 두 번째일 거라는 보장은 없어서였다.
그리고 찾아가면 현 가주인 당문경을 찾아가는 게 맞았다.
“이곳에 안 계셨으면 바로 가주전으로 향할 생각이었습니다.”
“아쉽게도 넌 아니네.”
“끄응!”
당민호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벽우진에게 있어 철저한 약자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화가 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놀리는 건 이쯤하고. 근데 왜 하필 나야?”
“현재 중원무림에서 신성(新星)이자 구성(求星)이라 불리는 이가 장문인이시지 않습니까.”
“이 나이에?”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신성이니 구성이니 하는 건 중견고수, 혹은 후기지수에게나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해서였다.
반대로 말하면 그가 꼽힐 정도로 중원무림에 인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고.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장문인께서는 강호에 출도하신지 1년도 채 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푸하하하! 맞아! 강호초출이지! 아직은! 크크큭!”
당민호가 포복절도하듯이 웃었다.
생각해 보니 벽우진은 무명이 높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강호초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당민호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놀리며 자지러졌다.
“하긴. 내가 좀 강호초출이라는 말에 어울리기는 하지. 외모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후기지수라고 생각할 테니까.”
“아마 혼자 다니시면 오해를 많이 받으실 겁니다. 그래도 이제는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지겠지만요.”
“귀찮은 일은 안 벌어지겠네.”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좋은 것만 생각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제갈현이 옅게 웃었다.
가만히 보면 참 긍정적인 것 같아서였다.
성격이 조금 괴팍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칭하는 이들이 생겨날 겁니다. 예전에는 이름하고 별호만 알려졌지 실제로 모습을 본 이는 극히 드무니까요. 청해성에서 잘 나오지 않으시기도 했고.”
“있겠어?”
“의외로 많습니다. 현재 유명세가 어마어마 하시니까요.”
“한 번 만나보고 싶네. 내 앞에서 어떻게 할지 궁금해.”
“상대방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을 겁니다.”
제갈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칭하는 이가 벽우진을 마주하는 순간 그의 미래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넌 있었냐?”
“글쎄. 그런 보고는 받은 적이 없네.”
“역시 잊혀졌구만. 이제는 장강의 뒷물에 밀린 앞 물이 되어버렸네.”
“말을 해도 참. 그래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게 뭔데?”
순식간에 삼천포로 빠져버린 대화를 다시 바로 잡으며 당민호가 물었다.
그러자 제갈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두 분께서 심사위원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출전은 안 되는 거야?”
“크헙!”
뜬금없는 벽우진의 말에 제갈현이 사레가 걸린 듯 헛기침을 했다.
설마 하니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꿈에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그 반응은 당민호도 대동소이했다.
“네가 왜 나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한 번쯤은 비무대회에 나가고 싶었거든. 내 수많은 꿈 중 하나라고나 할까. 목록 중 상위에 적혀 있는 게 비무대회 출전이야.”
“···혼자서 그러고 놀았냐?”
“그럼 뭐하고 노냐? 무공만 죽어라 파다가 내 정신이 무너질 것 같은데. 기분 좋은 상상이라도 해야 버틸 수 있었다고.”
갑자기 진지해진 벽우진의 표정에 당민호도 더 이상 놀리지 못했다.
말이 58년이지 다른 이도 없이 혼자서, 그것도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곳에서 홀로 있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 갇혔더라면 58년은커녕 1년이 채 되기 전에 미쳤을 터였다.
“농담을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나에게는 진지한 문제니까. 근데 우리가 심사위원을 본다고 은거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낼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각 성들의 내로라하는 군소방파들을 모두 모시면 최소한의 구색은 갖춰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각 파와 각 가문의 후기지수들이 출전한다면 무인들이 솔깃해하지 않을까요. 비무행만으로는 경험을 쌓는데 한계가 있으니까요.”
제갈현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벽우진이나 당민호나 각자의 생각에 빠져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확실히 큰 기회인 건 맞지. 언제 또 명문대파들의 제자들과 무공을 겨루어 보겠어? 그것 하나만으로도 출전할 가치는 있지.”
“거기에 두 분께서 자리를 빛내주신다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안전적인 부분도 확실하고요.”
제갈현이 당민호를 지나 벽우진을 쳐다봤다.
거리가 상당하더라도 벽우진의 무위를 생각하면 부상자는 나올지언정 최소한 사망자는 없을 터였다.
애초에 생사결이 아닌 비무대회이기도 했고.
“장소는?”
< 제 49장. 패선(覇仙)을 찾는 사람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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