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9장. 패선(覇仙)을 찾는 사람들. -01 >
쿵쿵쿵쿵!
거구라서 그런지 발자국 소리도 컸다.
게다가 덩치 역시 산만했기에 이내 모든 이의 시선이 언무강에게로 향했다.
“어? 패선에게 가는 거 같은데?”
“설마 어제 일 때문에 그런가?”
“저건 아닌 거 같은데.”
언무강에게 향했던 시선들에 하나같이 동정이 서렸다.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벽우진에게 가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
일단 명분에서부터 할 말이 없어서였다.
“뭐야?”
성큼성큼 걸어가던 언무강이 벽우진의 원탁 앞에 멈춰 섰다.
연회장을 거의 가로지르다시피 해서 다가왔던 것이다.
더구나 풍기는 분위기 역시 심상치 않았기에 벽우진은 미간을 좁히며 언무강을 올려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한 것 같아서 말이외다.”
“뭐가?”
“꼭 그렇게까지 내 아들에게 망신을 줘야 했는지 말이오.”
취기로 인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언무강이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리부리한 두 눈으로 도일수를 노려봤다.
제자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이였기에 초면임에도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데 살벌한 그의 안광에도 도일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스윽.
언무강이 뿌리는 기도에 짓눌려 몸을 떠는 도일수를 향해 벽우진이 손을 뻗었다.
제자에게 향하는 압박감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벽우진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뜬금없이 찾아와 도일수를 압박하자 심기가 제대로 상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따지러 왔다? 그럼 나한테 그 잘난 기세를 뿌려야지 왜 죄 없는 내 제자를 압박해?”
“압박하려는 의도는 없었소이다.”
“그래?”
벽우진이 이죽거렸다.
그와 동시에 장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갈무리해두고 있던 존재감을 일시에 드러냈던 것이다.
“큭!”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존재감에 언무강이 신음을 흘렸다.
단순히 존재감을 드러낸 것뿐인데도 두 다리가 후들거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그리 느낀 게 아니었는지 여기저기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언무강 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들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던 것이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도 자네를 압박하려는 의도는 없어. 그냥 기운이 저절로 나온 거야.”
“크흡!”
좀 더 짙어진 미소만큼이나 언무강의 머리 위로 가해지는 중압감 역시 더욱 강해졌다.
한쪽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언무강은 악착같이 버텼다.
아무리 벽우진이 패선이라 불리는 막강한 고수라고 하나 그 역시 일가의 가주였다.
으드득!
그렇기에 언무강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동시에 단전에 자리 잡은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그러자 취기가 땀구멍을 통해 단숨에 배출되었지만 그럼에도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안간힘을 쓰다 보니 안면이 절로 달아올랐던 것이다.
부르르르!
하지만 그럼에도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말을 지껄일 생각은 아니지? 그렇지?”
시끌벅적했던 연회장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그리 크지 않은 벽우진의 목소리만 들릴 정도로 모두가 입을 다문 채 구경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언무강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해도 상관은 없고.”
“큭!”
이어지는 이죽거림에도 언무강은 입을 열지 못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것이다.
나머지 한쪽 다리마저 꿇리게 하려는 것 같은 무지막지한 중압감에 언무강은 젖 먹던 힘까지 모조리 끌어 올려 오른쪽 다리와 허리, 그리고 목에 집중했다.
어떻게든 나머지 무릎만은 꿇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쿠웅!
하지만 그런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내 오른쪽 무릎마저 땅에 닿았다.
점점 더 거세지는 중압감을 그는 끝내 버텨내지 못했던 것이다.
“헉! 허억!”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졌다.
두 무릎이 땅에 닿은 순간 벽우진의 존재감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동시에 장내를 순식간에 장악했던 패도적인 기운 역시 안개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는데, 만약에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내 제자가 힘이 없었다면 결과가 어땠을 것 같아? 네 아들은 적당히 했을까?”
“······.”
언무강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자신과 똑 닮은 아들이니 만큼 벽우진의 말을 듣는 순간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단박에 예상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과연 망신을 주는 선에서 끝났을까? 난 아니라고 보는데.”
“···적당한 선에서 끝났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 적당한 선이 어느 정도인데?”
“으음!”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건만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언무강이 입을 다물었다.
차마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어서였다.
“말하기 싫은 걸 보니 내가 대신 말해주지. 내 예상을 말이야. 아마 어제와 똑같은 상황에서 내 제자가 약자였다면 네 아들은 아마 온갖 치욕은 다 주었을 거야. 망신이 아니라 치욕을 말이지.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지껄이면서 말이지. 그러면서 자신은 마인이 아니기에 목숨을 빼앗지는 않겠다는 식으로 말했겠지. 아니, 어쩌면 나를 의식해서 그 선까지는 넘지 않았을 거야. 대신 사지 중 한 곳 내지 두 곳은 부러졌겠지.”
“······.”
언무강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부정하고 싶지만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정확한 예상에 반박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그 정도까지는, 안 갔을 것이오. 다 같은 백도인인 만큼···.”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애들 싸움에 어른이 나선 것만 봐도 어떤 집안일지 뻔히 예상이 간다고나 할까.”
“일어나지 않은 일 가지고 너무 몰아붙이는 것 아니오?”
언무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무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네 말도 맞아.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 그래서 내가 묻는 것이고.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 거 같아? 네 아들이 당한 수준에서 끝날 거라고 생각해?”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외다.”
“그럼 내가 지금의 너처럼 너를 찾아가도 할 말이 없었겠네?”
“······.”
언무강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어찌 생각해보면 지금의 상황이 나은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약 아들이 도일수를 두드려 팼다면?
아니, 그 수준을 넘어 팔다리 중 하나를 부러뜨렸다면?
꿀꺽!
언무강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패선의 분노가 진주언가에 향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북해빙궁의 따까리 역할을 했다고 황하를 이 잡듯이 뒤지며 수적들에게 복수한 이가 벽우진 아니던가.
오히려 참고 넘어가는 게 이상할 터였다.
“그쯤하지.”
“나, 남궁가주님.”
“자식을 둔 부모로서 언가주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가네. 하지만 이쯤하게. 이 이상은 추태일세.”
언제 다가온 것인지 남궁진이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부모 입장으로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몰지각했다.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틀렸기에 남궁진은 언무강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니면 의미 없는 설전을 여기에서 계속할 텐가?”
“······!”
언무강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뒤늦게 이 연회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자각했던 것이다.
각 파의 후기지수들에 수행원들까지 합치면 그 숫자가 기백 명은 훌쩍 넘었다.
즉 여태까지 그는 그 많은 이들 앞에서 벽우진에게 고집과 억지를 부렸던 것이다.
“할 말 있으면 나중에 따로 찾아오도록. 물론 맨 정신에.”
부르르르!
창백했던 언무강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민망함이 한순간에 몰려왔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부리나케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연회장에 있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쯧쯧! 저렇게 생각이 없어서야.”
“자식 때문에 순간적으로 눈이 먼 모양입니다.”
“근데 마냥 핀잔을 줄 수 없는 게, 이해는 가. 자식이 두들겨 맞고 왔는데 부모 속이 멀쩡하겠어?”
“나는 왜 봐? 일수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시비를 건 건 저 자식의 아들놈인데.”
자신을 보며 혀를 차는 당민호를 향해 벽우진이 눈을 부라렸다.
마치 도일수가 잘못했다는 듯이 말해서였다.
반면에 중간에 낀 군남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이었기에 말을 아꼈다.
“내가 뭐라고 했어?”
“눈빛이 거슬려.”
“이제는 별 거 가지고 다 트집을 잡네.”
당민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조용하게 소란이 정리된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적어도 피가 흐르거나 사지 중 한 곳이 절단되지는 않았으니까.
“앉아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의자는 바꾸겠습니다.”
비어 있는 자리는 개왕이 앉았던 자리였다.
그 자리에 그대로 앉기에는 아무래도 께름칙했던 모양인지 남궁진은 시비를 불러 의자를 교체했다.
그런데 벽우진의 원탁으로 찾아온 이는 남궁진만이 아니었다.
법우를 시작으로 혜량이 운정과 함께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진짜 패선이 대단하기는 한가 보다. 소림무제와 무당권제에 이어 제왕검이라니.”
“후덜덜 하긴 하네.”
“저 자리에 나도 끼고 싶다.”
“나도.”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이 벽우진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섞고 싶어도 섞을 수 없는데 벽우진은 알아서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 차이가 나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그들은 그저 부러운 감정을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실질적으로 길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길게 느껴지는 사천당가의 일정도 어느새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드디어 내일 곤륜산으로 떠날 예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아직 일정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장문인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이 녀석도 들어야 하는 건가 보네?”
“같이 들으시면 저로서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는 건 사실입니다.”
함께 앉아 있던 당민호가 눈을 빛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이 야심한 시각에 벽우진을 찾아왔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제갈현의 모습에서 오늘 오전의 남궁진이 겹쳐 보였다.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설마···.”
“왜 그러십니까?”
“남궁가주와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제갈현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내가 실언을 한 모양이야.”
“대체 뭘 생각한 거야?”
“왠지 모르게 남궁가주하고 겹쳐 보이더라고.”
타박하는 벽우진을 향해 당민호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머리에 가득 찬 생각을 털어내려는 듯했다.
“노망났구만.”
“그건 내가 아니라 남궁가주이지. 어떻게 너한테 지 딸을 소개시켜줄 수가 있어?”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네가 이상한 거라고는 생각 안 하냐? 아들도 같이 소개시켜줬잖아.”
“그 상황에서? 퍽이나.”
당민호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리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앞에 앉은 제갈현을 쳐다봤다.
너도 뭐라고 말해보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 제갈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굳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진짜로?”
당민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따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속마음이야 남궁가주만 알지 않겠습니까. 본론으로 넘어가서 우선 제가 이 말을 꺼내는 건 두 분이 처음입니다.”
“무슨 말인데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 제 49장. 패선(覇仙)을 찾는 사람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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