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8장. 주인공은 나야, 나! -03 >
이제는 제법 격식 있게 식사를 하는 제자들을 보며 벽우진이 배부른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목진자?”
“잠시 앉아도 될까요?”
“안 될 것도 없지. 그리고 늦었지만 장문인이 된 거 축하해.”
“감사합니다. 사실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지만요.”
비어 있는 자리에 목진자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러자 주위의 시선이 대번에 집중되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썩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의외로 벽우진이나 목진자나 서로를 불편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개중에 몇몇은 선수를 빼앗겨 살짝 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나랑 마찬가지네. 나도 어쩔 수 없이 장문인직에 앉았는데.”
“저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원래 제가 앉을 자리가 아닌데, 또 저 아니면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요.”
목진자가 씁쓸한 기색을 띠었다.
장로이기는 하나 무공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나이도 장로 중에 가장 어렸기에 공동파의 비전절학을 연공한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비전절학을 제대로 전수 받은 이는 그가 유일하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우리보다는 낫잖아? 본파는 청민 하나 남았었는데.”
“그렇긴 합니다만.”
“좋게 생각해. 최악은 면했잖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특히 장문인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목진자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과거 도움을 청했을 때 너무 매정하게 거절해서 살짝 서운했던 적은 있지만 그것을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역지사지라고 그가 만약에 벽우진의 입장이었어도 공동파를 도와주는 것에 망설였을 터였다.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문이니까.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나에게 고마워할 거 없어. 공동파를 도와주려고 싸운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북해빙궁과 싸운 것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하여 강북 무림이 큰 도움을 받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만약 북해빙궁을 몰살시키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물론이고 다른 문파들 역시 이렇게 마음 편히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겁니다.”
“이쯤 해. 고맙다는 말도 너무 자주 들으면 지겨워. 무릇 모든 일은 적당히 하는 게 가장 좋아.”
“알겠습니다.”
“자, 한 잔 받아.”
벽우진이 차를 따라주었다.
공동파의 상황이 남일 같지 않아서였다.
또한 목진자가 느끼고 있을 부담감 역시 벽우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목진자와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힘내. 그래도 상황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혼자만 뒤쳐진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장문인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봐. 그거 때문에 날 찾아온 것 같은데.”
목진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말을 하기 전 잠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점창과 종남을 조심하십시오.”
“왜? 담합이라도 했어?”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뭐 어때. 약한 자들끼리 똘똘 뭉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나름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거잖아?”
조심스레 말하는 목진자와 달리 벽우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른 문파가 곤륜파를, 그를 견제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절대강자가 등장할 때마다 그 밑에 있는 이들이 뭉쳐서 견제 세력을 이루는 건 늘 있었던 일이기도 했고.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아, 참고하지.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해주고 싶군. 나라고 멍청하게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으니까. 근데 나보다는 본인을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은데.”
“노력해야지요. 본파 역시 갈 길이 머니까요.”
“그래도 신경 써줘서 고맙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벽우진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목진자를 쳐다봤다.
알게 되었다고 해서 굳이 말해줄 의무는 없는데 목진자는 일부러 직접 찾아와서 말해주었다.
그게 벽우진은 조금 놀라웠다.
“알고는 있으셔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겸사겸사 빚도 조금 지워버릴 겸.”
“좋아. 그 마음, 기억해 두지.”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아서요.”
“그래.”
목진자가 깔끔하게 할 말을 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가 떠나기 무섭게 당민호가 찾아왔다.
선물을 받느라 한창 바쁠 당민호가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해?”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근데 얘는 왜 데리고 온 거야?”
벽우진의 시선이 쭈뼛 거리며 서 있는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중년인이 순간 움찔거렸다.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이왕이면 좀 풀고 가는 게 좋잖아? 안 좋게 생긴 감정의 골이 쌓이고 쌓이면 원한이나 악의로 변하잖아. 그래서 내가 좀 나섰지. 어쨌거나 내가 주최자잖아?”
“그 바쁜 주최자가 여긴 어쩐 일이야? 선물 증정식이 끝나려면 먼 것 같은데?”
“끝났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오면 마무리지. 엉덩이가 제일 무거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그들이니까.”
“묘하게 말 되네.”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마따나 더 이상 선물을 주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응?”
그런데 벽우진을 찾아온 이는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새 것으로 보이는 의족을 단 개왕이 넉살 좋게 웃으며 세 사람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저도 앉아도 되겠습니까?”
“방주가 무슨 일로?”
“제가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여러 가지로 말입죠. 물론 장문인과 따로 얘기를 나눠보고도 싶었고요. 우르르 모여 있기만 했지 실질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 않습니까.”
“아이야, 의자 좀 가져오너라.”
예상치 못한 개왕의 등장에 당민호가 자연스럽게 지나가던 시비에게 의자를 하나 더 가져오도록 시켰다.
그러자 순식간에 원탁이 가득 찼다.
“네가 주인이다 이거냐?”
“물론이지. 자자, 앉자고.”
벽우진이 거절하기 전에 당민호가 능글맞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신과 벽우진의 사이에 여전히 쭈뼛거리는 군남생을 앉혔다.
지금은 낯설어도 계속 얼굴을 보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터였다.
자연스레 대화도 많아질 것이고.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해.”
“어허! 힘겹게 찾아온 후배한테 너무 쌀쌀 맞게 대하는 거 아냐?”
“내가 원한 만남이 아닌데? 주선은 네가 한 거지.”
“일단 한 잔씩 쭉 들이키자고.”
순식간에 싸늘해지는 분위기에 당민호가 서둘러 각자의 앞에 술잔을 놓았다.
그리고는 이 자리를 위해 특별히 공수한 금존청을 꺼냈다.
“헉! 설마 그, 그것은?”
“역시 개코라서 그런가? 한 번에 알아보네?”
“금존청 아닙니까?”
“맞아.”
개왕이 특유의 돼지코를 벌렁거리며 흥분했다.
싸구려 곡주만 마시던 그에게 금존청은 말 그대로 하늘에 달린 별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사 먹고자 하면 못 사먹는 건 아니었으나 수없이 많은 개방도들을 생각하면 감히, 언감생심 사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얻어먹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크흐으!”
“원래는 우리 셋이서만 마시려고 했는데···.”
“제가 좀 먹을 복이 있지요. 허허허!”
“일어나라고 해도 안 일어나겠지?”
“물론입죠!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찾아오겠습니까?”
개왕이 침을 뚝뚝 흘렸다.
뚜껑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그의 예민한 코는 병 안에 담긴 금존청의 주향을 기가 막히게 맡고 있었다.
“넷이서 마시면 몇 잔 안 나오는데.”
“그렇기에 더 감질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기억에도 오래 남고요.”
“말은.”
청산유수처럼 듣기 좋은 말만 쏙쏙 해대는 개왕의 모습에 당민호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금존청의 뚜껑을 열었다.
“크흐!”
“뭐야, 이 주향은?”
“이거 설마 금존청 아냐?”
금존청 특유의 주향에 여기저기에서 소란이 일었다.
자리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금존청을 마셔본 이들이 제법 많아 단박에 주종을 알아맞췄던 것이다.
“자자, 한잔씩 받아.”
“흠.”
“어이쿠!”
벽우진을 시작으로 개왕, 군남생 순으로 당민호는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잔에 금존청을 따른 당민호가 자연스럽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일단 한 잔 하자고.”
“옙!”
개왕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일단 시원스럽게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또 한 잔을 받을 생각인 것이었다.
금존청이 아무리 비싸도 사천당가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개왕은 일단 최대한 많이 마실 작정이었다.
후르릅!
“역시 좋아.”
“맛은 있네.”
흡족한 미소를 짓는 당민호와 표정으로 모든 걸 말해주는 개왕과 달리 벽우진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맛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서였다.
딱 명주 정도? 그 정도가 다였다.
“괜찮지?”
“나쁘진 않네.”
“자네는?”
“저도 괜찮습니다.”
당민호가 자연스럽게 벽우진과의 대화에 군남생을 끌어들였다.
이 자리의 원래 목적은 바로 벽우진과 군남생의 오해를 푸는 것이었기에 당민호는 빠르게 둘의 신색을 살폈다.
정확하게는 벽우진의 얼굴을.
“모두 다 만족하니 기분이 좋구먼. 허허허!”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
군남생이 옆에 앉아 있는 벽우진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진심을 담아 사과해왔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너무 날이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배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벽우진이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이렇게 뜬금없이 사과부터 할 줄은 몰라서였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달라졌어? 어제랑은 완전히 다르잖아?”
“어제는 제가 잠시 뭐에 씌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군남생은 담담하게 어제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당민호는 물론이고 개왕 역시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군남생이 느꼈을 압박감과 조급증을 그들 역시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서였다.
“빼앗긴 뭘 빼앗아. 그럴 생각도 없는데.”
“알고 있습니다. 어제의 자리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게 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부러 생각 없는 척을 해서 저의 방심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참 생각 많다.”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귀신 같이 당민호가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기에 천천히 들이켰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개왕이 침을 꿀꺽 삼키며 쳐다봤다.
자신의 잔 역시 비어 있었지만 당민호가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그로서는 벽우진이 마시는 것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운 좋게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나니 정말 많은 게 달라졌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근데 어째서 생각이 달라지게 된 거야?”
“회의가 끝나고 태상가주께서 저를 따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호오.”
“크흠!”
벽우진의 시선에 당민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친구를 위해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했다는 듯이 우쭐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물론 회의하는 동안의 분위기에서 많은 것을 느끼기도 했고요.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선배님과 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서입니다.”
“적은 아니지. 그렇다고 동료도 아니지만.”
< 제 48장. 주인공은 나야, 나!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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