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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155화 (155/325)

< 제 48장. 주인공은 나야, 나! -02 >

멀어지는 목중선을 지켜보던 당민호가 익숙한 음성에 화들짝 놀랐다.

올 거라고 당연히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찾아올 줄은 몰라서였다.

“뭐야? 내가 언제 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냐?”

“늘어지게 쉬다가 오후쯤에? 점심은 먹어야 할 테니까.”

“그때는 왠지 제일 바쁠 것 같아서. 그래서 일찍 왔다. 일 끝내고 돌아가서 좀 쉬게.”

“···선물만 달랑 던져주고?”

당민호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벽우진다워서였다.

“바로는 아니고. 조금 구경하다가? 이런 큰 연회는 나도 태어나서 처음 보니까.”

“좀 크기는 하지. 봉문 후 최초로 공개하는 거라 나름 신경 쓰기도 했고. 내년 생일에는 이렇게 못 해. 보기에는 좋아도 여럿 쓰러져서 나갔다.”

“그러기에 적당히 좀 하지.”

“내가 하자고 안 했다.”

당민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모든 계획은 그가 세운 게 아니라 아들이 세운 것이었다.

물론 그 역시 동의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대신 냉큼 허락했겠지.”

“해서 나쁘진 않잖아? 죽기 전에 한 번 정도는 이렇게 거창하게 열면 좋잖아? 안 그래?”

“글쎄다. 난 딱히 생일을 챙기지 않아서.”

“도문이라고 해서 거창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은근한 어조로 당민호가 말했다.

사람이 적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벽우진이 연회를 연다고 하면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모조리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고자 군소방파의 주인들이 뒤따를 것이고.

“아직은 생각 없다. 지금은 시기상조야.”

“나중에 해도 되니까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 사실 개파식도 아직 안 했잖아.”

“굳이 할 필요 없으니까. 본파가 다시 일어난 거 다 알고 있잖아?”

“그래도 공식적으로 하는 게 좋지.”

“안 해. 개파식을 하면 멸문했다가 다시 연 것 같아서.”

벽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곤륜파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다만 위기가 있었을 뿐.

그가 없는 동안 청민과 청범이 곤륜파를 지켜왔고, 자신의 등장과 함께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장문인이니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어쨌든 생일 축하한다.”

“태상가주님 생신 축하드려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벽우진이 시작을 끊자 서예지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일제히 축하 인사를 건넸다.

두 손을 앞에 모으고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던 것이다.

그 모습에 당민호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그래. 모두 고맙구나.”

“이건 사부님께서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혹시, 설마?”

막내인 도일수가 품에 안고 있던 선물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포장되어 있는 작은 상자에 당민호가 눈을 빛냈다.

사실 그는 곤륜파에 원하는 선물이 있었다.

다만 염치가 없어서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할 뿐.

그래서 그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도일수가 건네는 선물을 받았다.

“꿈 깨. 네가 기대하는 거 아니니까.”

“···내가 뭘 바랄 줄 알고?”

“두 눈에 욕심부터 지우고 말을 해라.”

“그렇게 티 나디?”

당민호가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살짝 민망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빠르게 선물을 풀었다.

“푼다고 묻지도 않고 푸네?”

“어차피 내 선물이잖아? 지금 푸나 나중에 푸나 똑같은데 뭐 어때.”

“저거 풀어보는 것도 일이겠다. 처음이야 설레겠지만 저걸 다 풀어보려면. 어후.”

벽우진이 산처럼 쌓여 있는 선물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한두 개야 설레겠지만 수십 개가 되면 선물을 확인하는 것도 일일 터였다.

게다가 중요한 건 아직 아침이라는 것이었다.

“오!”

“율석이가 정성들여 만든 물건이야.”

“확실히 균형이 좋아.”

목궤에 들어 있던 한 쌍의 단검과 단도를 집어 든 당민호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무상검 만큼은 아니더라도 균형이 확실히 잘 잡혀 있어서였다.

“그거 만든다고 율석이가 고생 좀 했지.”

“근데 이건 율석이 선물 아냐?”

“율석이가 곤륜파 사람인데. 똑같아.”

“하긴.”

“뭐, 네가 원한 건 다른 것이겠지만 그건 더 이상 안 돼.”

벽우진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욕심이 나는 게 당연하겠지만 더 이상의 외부 유출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알고 있어. 그렇게 다시 한 번 각인 안 시켜도 돼.”

“그럼 이따가 보자고.”

“찾아갈게.”

“오냐.”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기에 벽우진은 적당히 물러났다.

선물을 주었겠다, 본격적으로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자리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다 앉을 수 있어?”

“물론입니다. 태상가주님께서 앉으실 자리도 미리 만들어 두었습니다.”

듣는 이가 많았기에 당주혁은 조부를 태상가주라고 깍듯하게 호칭했다.

공적인 자리였기에 말조차도 조심했던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

“태상가주님께서 따로 한 자리 빼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바빠서 올 틈이 있을까? 오더라도 내가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당주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의 벽우진이었기에 식사만 끝내고 사라질 수도 있었다.

당주혁 본인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그래도 그의 입장에서는 준비는 해놓아야 했다.

“뭐, 네가 어쩌겠어. 네 입장에서 까라면 까야지.”

“그렇습니다. 아직은 힘이 없는 소가주라서요.”

“그건 아닌 것 같고.”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가 보기에 사천당가의 서열 3위가 당주혁이었다.

또한 그만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었고.

“하하.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응? 여기라고?”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길게 늘어져 있는 원탁 중 하나에 도착한 벽우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그와 곤륜파에게 배정된 자리는 당문경이 앉아 있는 원탁의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였다.

즉 굳이 당민호의 자리를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예. 본가와 가장 가까운 곳이 곤륜파이지 않습니까. 가주님께서 직접 배정하셨습니다.”

“···사고치지 못하게 감시하려는 목적이 있는 거 같은데?”

벽우진의 말에 조금 떨어져 있던 진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사고를 칠지도 모르는 사람 중에는 그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절대 아닙니다.”

“차라리 먼 쪽이 나은 거 같은데. 사람들이 계속 드나들 거 아냐. 당가 쪽 원탁 바로 앞자리라.”

“그렇기에 곤륜파의 위상을 알리기에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본가와 곤륜파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알릴 수도 있고요.”

“다들 이미 충분히 알거 같은데.”

벽우진이 인상을 썼다.

암만 봐도 시끄럽고 불편한 자리일 것 같아서였다.

더구나 줄지어 길게 늘어선 원탁들도 화려했지만 곤륜파에게 배정된 원탁은 조금 더 특별했다.

당문경이 앉아 있는 원탁과 마찬가지로 윤기 나는 붉은색 천이 덮여져 있었던 것이다.

“저희에게도 중요한 문제라서요. 또한 태상가주님의 지시이기도 합니다.”

“난 이런 특별대우는 원치 않았는데 말이지.”

“이제는 익숙해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의 곤륜파는 많은 게 달라질 것이니까.

“앉으시지요.”

“오늘은 일단 앉으마. 하지만 다음부터는 언질이라도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

“명심하겠습니다.”

지극히 공손한 어조로 대답하는 당주혁을 일별하며 벽우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비들이 음식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원탁 위로 산해진미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음식들이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잔칫날은 잔칫날이네.”

“다른 성의 음식들도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타 지역에서 오신 분들이 많으니까. 그 부분까지 신경 쓸 수밖에 없겠지.”

“우와아!”

말 그대로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각종 음식들의 향연에 아이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죽 했으면 진구 역시 두 눈이 동그래질 정도였다.

사천성 전통 음식뿐만 아니라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들까지 있었기에 눈은 물론이고 코도 즐거울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자리에서는 벌써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슬슬 오는 것 같아요.”

“어제의 후기지수들끼리 모인 것 하고는 또 다르지?”

“예.”

서예지가 눈을 반짝였다.

사실 어제 구룡오화를 비롯해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내심 놀라기는 했다.

아무래도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청해성에서 살아왔기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이 단 한 번도 없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제와 또 비교할 수 없었다.

‘저들이 중원 백도를 대표하는 고수들.’

소림무제와 제왕검을 비롯해서 개왕, 구절서생은 북해빙궁주와의 결전 당시 봤었기에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다함께 몰려오니 느낌이 또 달랐다.

왠지 모를 무게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숫자로 보면 얼마 되지 않는데 한순간에 연회장이 가득 찬 느낌이랄까.

“머지않아 우리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야.”

“원래 저희의 자리였잖아요.”

“그러니까 되찾아 와야지. 물론 그건 내가 할 거야. 너희들은 나 다음을 책임지면 돼.”

“···금방 떠나갈 것처럼 말씀하시지 마세요.”

서예지가 조금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먼 일일 게 분명하지만 벽우진이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희랑 오래오래 함께 해주세요.”

“저도 사부님이랑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요.”

“아직 멀었어. 벌써부터 감정 잡지 마. 나중에는 제발 그만 헤어지자고 할지도 모르니까.”

“절대 그런 일 없어요!”

심대혜를 따라 입을 열었던 심소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데 음식을 얼마나 넣은 것인지 다람쥐처럼 양 볼이 빵빵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나중 일은 모르는 거니까?”

“저는 사부님이랑 백년만년 같이 살 거예요!”

“저, 저도요.”

심소혜의 말에 양이추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음식이야 심소혜가 해준다고 하더라도 늙은 벽우진의 수발을 들 남자 한 명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나도 할 거야.”

“저도요. 제가 제일 어리니까 가장 오랫동안 사부님을 보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들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희들 앞가림이나 신경 써. 나는 적어도 58년은 더 살다가 갈 거니까.”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벌써부터 노인 취급을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자신의 노후를 신경 써 주는 것이었으니까.

“꼭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사부님?”

“걱정하지 마. 소혜 시집가서 아들딸 낳는 것까지 보고 갈 거니까.”

“전 시집 안 갈 건데요?”

“다들 들었지? 소혜 시집가면 너희들이 증인이 되어줘야 한다?”

벽우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자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자 다들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놀림거리 하나를 찾았다는 듯이 말이다.

“소혜 너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진짜 안 갈 거거든! 오빠나 걱정해!”

“난 일단 스무 살 넘고 나서 생각해볼게. 지금은 무공이 더 좋으니까.”

한 살 차이 나는 심소천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벽우진도 차를 들이켰다.

딱히 배가 고픈 게 아니었기에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에 주위를 바삐 배회하던 시비들이 안절부절 못했다.

혹시나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싶었던 것이다.

“장문인.”

“응?”

< 제 48장. 주인공은 나야, 나!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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