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8장. 주인공은 나야, 나! -01 >
서예지가 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건 다른 제자들도 대동소이했다.
“이 나이 먹고 챙기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챙겨야 하지 않을까요?”
“됐어. 내가 생일을 챙기는 사람도 아니고. 기억도 안 나는데 뭘 챙겨. 그냥 새해가 밝으면 한 살 먹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그래도···.”
서예지가 말끝을 흐렸다.
동시에 심대혜는 벽우진의 손을 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생일을 안 챙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렇다고 벽우진이 혼자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앞으로는 저희가 챙겨드릴게요.”
“저도요!”
비어 있는 벽우진의 왼손을 잡으며 심소혜도 거들었다.
늘 받기만 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안 그래도 된다니까.”
“그럼 새해 첫 날로 잡을까요? 안 그래도 곧 새해잖아요.”
“괜찮다니까. 번거롭게 뭘 해. 됐어.”
“사부님은 장문인이시잖아요. 당 대협도 이렇게 성대하게 하는데 사부님은 더 크게 하셔야죠. 저희가 건재하다는 것도 알릴 겸.”
“말 잘했다.”
서예지가 심대혜의 말에 동조했다.
안 그래도 그녀는 사천당가가 준비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도문(道門)이기는 하지만 전통과 역사가 있는 대문파가 곤륜파였다.
그런 만큼 언젠가는 큰 행사를 치를 게 분명했고, 그 예시로 서예지는 오늘의 연회를 주시 중이었다.
“저도 지금부터라도 챙기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도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사부님.”
서예지에 이어 도일수와 양일우, 양이추 형제가 거들었다.
정확한 날짜를 모른다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도 챙겨야 한다는 점이었다.
“앞으로는 저희가 매년 챙겨드릴게요, 사부님!”
“안 그래도 되는데.”
“어떻게 안 그래요. 저라도 꼭 챙겨드릴게요!”
심소혜가 앙증맞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소리쳤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진구가 사뭇 부럽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제자들 사이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벽우진의 모습을 보니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 기색은 금세 사라졌지만 가슴 속에는 여전히 깊은 파문을 남기고 있었다.
“진짜 괜찮다니까?”
“저희가 안 괜찮아요, 사부님.”
“거참.”
갑자기 단체로 꽂히기라도 한 것처럼 생일에 매달리는 제자들의 모습에 벽우진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상한 것에 집중하는 것 같아서였다.
“앞으로는 저희가 꼭 챙겨드릴게요.”
“부담 갖지 마세요. 헤헤!”
심대혜와 심소혜의 협공에 벽우진은 도망도 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벽우진의 손을 하나씩 꼭 붙들고 있어서였다.
“사부님은 가만히 즐겨 주시면 되요.”
“맞아요!”
“허어.”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결정을 내린 듯한 제자들의 모습에 벽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 같아서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네요.”
“응?”
“제가 좀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장문인.”
“자네가 왜 왔어?”
당민호의 생일잔치가 있을 대연회장으로 걸어가는데 당설우가 앞에 나타났다.
뛰어왔는지 옷자락이 크게 휘날리는 상태로 말이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벽 장문인이시지 않습니까. 태상가주님께서 어젯밤 저를 직접 불러 지시하셨습니다.”
“애한테 왜 쓸데없는 일을 시켜. 내가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벽우진이 혀를 찼다.
쓸데없이 고급 인력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모습에 당설우는 오히려 웃었다.
“본가에서 그 정도로 벽 장문인을 중요시한다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중요시는 무슨. 혹시나 사고칠까 봐 그러는 거 아냐? 미연에 방지하려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뜬금없이 툭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도 당설우는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다.
맞는 말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동의할 수 없어서였다.
“역시 총관이야. 눈치가 빨라.”
“지금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무당파의 선배님은 어떠신가? 자네라면 들은 게 있을 것 같은데.”
“검선께서는 괜찮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대연회장에 도착하면 만나게 되실 겁니다.”
“검선이라. 확실히 신선 같은 분이시긴 하지. 나 같은 말코도사와는 완전히 다른 정통도사.”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호는 처음 듣는데 듣는 순간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었다.
한 자루 검을 들고 있는 선풍도골의 모습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였다.
“사부님도 엄청 멋지셨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원래 검도 잘 쓰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제는 진짜 달랐어요.”
“태청용형검은 진짜···! 완전 감동이었어요.”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입을 열었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어제의 비무는 아이들에게 정말 큰 감격과 충격을 주었다.
곤륜파 무공의 진수를 봤었기에 다들 하나같이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근데 전통도사 같지는 않았지?”
“도사 같으셨어요. 청년도사 느낌이랄까요?”
“흠. 역시 그런가.”
솔직한 서예지의 평가에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백염백미가 선풍도골이라는 말을 연상케 하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아서였다.
“그래도 진짜 멋지셨어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고요.”
“그거면 되었다. 그럼 다 얻은 거야.”
벽우진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파 쪽도 얻은 게 많겠지만 곤륜파도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벽우진은 웃을 수 있었다.
“어젯밤 일로 태상가주께서 정말 동분서주하셨습니다. 가주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나름 조용히 넘어갔잖아? 부서진 것도 없고. 사람들이 좀 놀란 것 말고는 없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정말 많습니다. 다만 두 분께서 엮이신 일이라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요. 아마 대연회장에 도착하시면 조금 시달리실 수도 있습니다.”
당설우가 조심스럽게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미리 언질을 해두는 것이었다.
벽우진의 성격상 관심을 좋게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테니까.
더구나 사천당가의 경우 벽우진에 대해 그 어떤 곳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아.”
“들어가시죠.”
건성으로 대답하는 벽우진과 진구, 제자들을 이끌고서 당설우가 앞장섰다.
출입구에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녹의대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누구 하나 당설우의 앞을 제지하지 않았다.
잠시 후 벽우진 일행은 사천당가에서 각별히 준비한 대연회장에 들어섰다.
“우와.”
“진짜 화려하네.”
“제대로 칼을 간 느낌인데.”
규모도 규모지만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신경 쓴 태가 나는 대연회장 내부의 모습에 제자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너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고급스러움이 물씬 느껴지는 장내의 모습에 특히나 여제자들이 눈을 빛냈다.
그야말로 하나의 작품을 보는 듯해서였다.
“괜히 공방이 있는 게 아니네.”
“그럼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필교 어르신도 있고, 혁문이 할아버지도 계시니까.”
“공간도 부족하지 않고.”
사천당가의 장원이 요새를 방불케 할 정도로 넓다고 하나 곤륜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양일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서라. 그런데 쓸 돈 없다. 저거 다 돈이야. 인력은 또 얼마나 필요했겠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제자들에게 벽우진이 찬물을 끼얹었다.
보기에는 좋지만 곤륜파에서 하기에는 너무 과한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요.”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는 걸로.”
“오셨습니까.”
서예지의 말에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한 벽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당설우의 앞으로 당주혁이 나타나서였다.
소가주인 그가 버선발로 달려와 공손히 인사하는 모습에 벽우진은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할 필요 없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근데 아침인데도 사람 엄청 많네.”
“정말 오랜만에 연 연회이니까요. 더구나 오독문과의 전쟁에서 본가가 큰 활약을 하기도 했고요.”
“큰 활약은 가주가 했지. 민호는 집만 지키고 있었잖아?”
“하하하.”
당주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뭐라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저기 옆에 쌓여 있는 건 선물이야?”
“예. 각 지역의 특산물들이 제일 많습니다. 물론 귀한 것도 상당하고요.”
“호오.”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단순히 준비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만 생각했지 저렇게 부가소득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가시지요.”
당설우에 이어 당주혁이 앞장섰다.
그러자 주변에서 삼삼오오 모여 있던 이들의 시선이 벽우진 일행에게로 확 집중되었다.
당설우만 하더라도 총관이기에 그가 직접 모시고 들어오자 알게 모르게 힐끔거렸는데 이번에는 소가주인 당주혁이 직접 나서자 다들 눈을 빛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대부분은 벽우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수장은 아직 안 보이네.”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피치 못한 일이 생겨 늦는 경우도 있고요.”
“술?”
“그런 경우도 많지요. 공력으로 주정을 배출할 수 있다고 하지만, 쉽게 안 취해서 더 과하게 들이 붓는 경우가 많아서요.”
“쯧쯧!”
설명만 들어도 저절로 상상이 되었다.
그러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나름 곡차를 좋아하는 그였지만 그렇다고 죽도록 부어라 마셔라 하지는 않았다.
자고로 무엇이든 적당히가 가장 좋았다.
“누구지?”
“아는 사람 있어?”
“혹시 곤륜파 일행 아냐?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은 아닌데.”
“패선 정도는 되어야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나서지 않겠어?”
당주혁을 따라 대연회장을 가로지르는데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천당가에 잘 보이고자 이른 시간부터 찾아왔던 군소방파의 사람들이 벽우진 일행을 힐끔거리고 쑥덕거렸던 것이다.
자기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했지만 벽우진의 귀에는 다 들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창목가의 목중선입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태상가주님.”
“아아. 남창목가. 혹시 목일경의 아들인가?”
“맞습니다. 제가 현 남창목가의 가주입니다. 부친께서는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허어.”
증정식 아닌 증정식을 받고 있던 당민호가 얼굴 가득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목중선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가끔 태상가주님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호탕한 사람이었다고요.”
“나도 기억하고 있네. 그런데 벌써 갔을 줄이야.”
“금분세수(金盆洗手) 하시고 편안히 가셨습니다.”
“다행이구먼. 선물은 감사하네.”
“아닙니다!”
언제 눈시울이 붉어졌냐는 듯이 목중선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나름 당민호와 길게 대화를 나눈 것 같아서였다.
거기다 부친으로 인해 눈도장 역시 어느 정도는 찍었다고 생각이 되자 목중선은 더욱더 마음이 가벼웠다.
선물을 준비한답시고 지출이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헛돈을 쓴 것 같지는 않았다.
“이따가 술 한 잔 하세.”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태상가주님.”
목중선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부친 덕분에 일이 더할 나위 없이 잘 풀린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그가 몸을 돌리기 무섭게 당민호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침부터 고생하네.”
“웬일이냐? 이 아침부터?”
< 제 48장. 주인공은 나야, 나! -01 > 끝
ⓒ 윤신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