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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153화 (153/325)

< 제 47장. 패선(覇仙) 대 검선(劍仙). -03 >

혜량은 문득 어린 시절, 갓 대제자가 되었던 시절 사부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사부가 했던 말을 운정이 증명하고 있어서였다.

꽈아악!

그 기억이 생각나자 혜량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극혜검을 비롯해서 무당파의 비전절기를 익히고 있음에도 고작 이 정도까지 밖에 오르지 못한 자신이 한심해서였다.

‘더욱더 노력해야해. 지금에 안주하지 말고 더더욱.’

혜량이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나마 안주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바로 운정이었다.

태극검으로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른 운정을 경외하며 혜량은 다짐했다.

반드시 저 이상의 경지에 오르겠다고 말이다.

콰콰쾅!

한편 식어 있던 열정을 다시 불태우는 혜량과 달리 아이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벽우진이 말했던 대로 둘의 비무를 순수하게 관전했다.

아직은 두 사람의 경지를 제대로 볼 수 없기에 일단은 육안으로나마 공방을 지켜봤던 것이다.

하지만 혜량만큼 경악하는 이는 없었다.

이미 북해빙궁주와의 일전을 지켜봤었기에 감탄하기는 해도 놀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 우와!”

“진짜 다시 봐도 감탄만 나오네. 극성에 이른 운룡대팔식은.”

혹여나 벽우진과 운정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아이들은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고 속닥거렸다.

그마저도 안심이 안 돼서 아예 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아이들도 있었다.

“잘 봐둬. 이게 다 공부니까.”

“맞아. 그래서 사부님이 보라고 하신 거니까 단 하나도 놓치지 말고.”

“네.”

서예지와 양일우의 말에 아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단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퍼퍼퍼펑!

벽우진의 신형이 허공에서 여덟 번 움직였다.

땅을 딛지 않고서 방향을 여덟 번이나 틀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동하는 범위는 물론이고 각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허공답보라도 펼치는 것처럼 너무나 크게 넓게 허공을 자유자재로 노닐었다.

쿠르릉!

거기에 태청용형검이 함께 펼쳐지니 운정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굳어졌다.

처음부터 쉽지 않은 대결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직접 붙어보니 예상보다 더한 것 같아서였다.

분명 그의 태극검은 완벽했다.

음양의 조화에는 삼라만상이 담겨 있었고, 면면부절(綿綿不絕)한 검식은 벽우진의 검격을 거의 완벽하게 막아냈다.

그 증거가 현재 그의 의복이었고.

하지만 운정은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밀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상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아직까지는 치명적인 피해를 받지 않았다.

제대로 흘려낸 덕분에 치명타만은 피해냈던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흘러가면 벽우진이 유리했다.

노구인 그에 반해 벽우진의 육신은 파릇파릇한 이십대였다.

‘승부를 내야 할 때다. 시간을 끄는 건 의미가 없어.’

시작하기 전에는 한 가닥 기대를 했었다.

아무래도 경험적인 면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일검을 맞댄 순간 운정은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벽우진은 절대 경험이 부족한 무인이 아니었다.

‘애초의 목표가 이기는 게 아니기도 했고.’

승리하면 좋겠지만 패배해도 상관없었다.

단순히 이기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니었으니까.

그는 목적만 달성하면 되었다.

콰우우우!

운정의 기세가 일변했다.

한없이 부드럽고 잔잔했던 기운이 창졸간에 달라졌다.

강맹하고 사나운 기세가 그의 검과 전신에서 분출되었던 것이다.

“호오.”

그 모습에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분명 근본은 똑같은 태극검이지만 성질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조화로웠던 음양의 기운을 충돌시켜 폭발시킨 건가.’

좀 전까지의 태극검이 음양의 조화와 상생에 근본을 두었다면 지금은 오직 파괴일변도였다.

상극인 음양의 기운이 거칠게 충돌하며 무시무시한 기운을 토해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로 인해 지금껏 단단히 숨겨져 있던 운정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으음!”

벽우진이 침음을 흘렸다.

어째서 자신에게 비무를 하자고 했는지, 혜량을 관전하게 시켰는지 지금 이 순간 알 수 있었다.

또한 어떤 마음가짐으로 태극검을 펼치고 있는지도 말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직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거면 되었소. 허허허.”

이제는 다 알게 되었다는 벽우진의 표정에 운정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없이 초탈한 웃음을 흘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에 벽우진은 오히려 검을 더욱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후배가 먼저 가겠습니다.”

“오시구려. 나 역시 준비가 다 되었으니.”

벽우진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검로를 따라 강기로 이루어진 푸른 용이 꿈틀거렸다.

검극의 움직임을 따라 용이 움직였던 것이다.

동시에 벽우진에게서 막대한 기운이 솟구쳤다.

스윽.

운정의 마음가짐을 알았기에 벽우진은 허투루 검을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 건성으로 검을 뿌린 건 아니었지만 이번은 아예 마음가짐이 달랐다.

“갑니다.”

생사결이 아닌 무를 겨루는 것이었기에 벽우진은 예의를 다했다.

어쩌면 이 비무가 운정과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이번 일검에 전력을 다했다.

대성을 너머 극성에 이른 태청용형검을 펼쳤던 것이다.

쿠아아앙!

찬란한 푸른빛과 함께 머리 크기만 1장 가까이 되고, 길이는 3장이 훌쩍 넘어가는 거대한 용이 포효하며 운정에게 쇄도했다.

동시에 운정의 검에서도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사되었다.

그의 검이 그리는 태극에서 태산조차 단숨에 쪼개버릴 것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꽈아아앙-!

귀청을 멀게 하는 굉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혜량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그 여파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던 것이다.

그나마 진구가 뒤늦게 일정 부분을 감당해주지 않았다면 뒷마당은 물론이고 별채가 통째로 날아갔을 터였다.

“미, 미친···.”

두 사람의 마지막 일격에 혜량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무당권제라는 별호가 얼마나 허황되고 보잘 것 없는지 처절하게 느낄 수 있어서였다.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도 동시에 깨달았다.

“난리 났군.”

한편 혜량을 도와 충돌의 여파를 최대한 줄어보려고 했던 진구가 입맛을 다셨다.

역시나 곳곳에서 여기로 달려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막말로 이만한 폭발이 일어났는데 고수들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속편한 표정을 지었다.

“어떠셨습니까.”

“만족했소이다. 물론 저 아이가 제 뜻을 알아차렸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일단 말은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할 생각이외다. 그리고, 도와주어서 고맙소이다.”

“별말씀을.”

벽우진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실력의 고하를 떠나 운정은 그에게 존경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무인이었다.

더구나 마지막 일격을 주고받은 후 운정은 벽우진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잘 부탁하오이다.”

“저로서는 그리 할 수밖에 없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부디 조금만 더 세상을 굽어 살폈으면 좋겠소이다.”

“······.”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는 운정을 벽우진은 묘한 얼굴로 바라봤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복잡한 표정으로 마주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사백님!”

“우리는 이만 가자꾸나. 너에게 할 말도 있으니.”

“그 전에 운기요상부터 해야 하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호법을 서겠습니다.”

“기운이 날뛰는 것뿐 내상을 입은 건 아니다. 숙소로 돌아가서 해도 늦지 않아.”

“그래도···.”

혜량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운정을 쳐다봤다.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니어서였다.

더구나 운정은 100세에 가까운 나이에 노구를 지니고 있었기에 후속조치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운정의 몸은 그 혼자만의 몸도 아니었고.

“여기 있으면 더 번거로워진다. 어서 가자.”

“아, 그걸 생각 못했군요.”

퍼뜩 정신을 차린 혜량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는 사이 운정은 벽우진에게 정중히 포권을 했다.

뒷마무리를 벽우진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부탁드리오.”

“걱정 마십시오, 선배님. 제가 잘 정리하겠습니다.”

“감사하오.”

“가시오.”

운정에 이어 짧게 포권을 한 혜량이 그를 이끌고서 담벼락을 넘었다.

시끄러워지기 전에 몸을 뺀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몸을 날린 것과 동시에 당민호가 뒷마당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야?”

“네가 느낀 그대로? 마침 잘 왔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아들과 함께 득달같이 달려온 당민호의 얼굴에 황당한 기색이 떠올랐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는커녕 일부터 시키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함께 온 당문경도 마찬가지였다.

“설명도 안 해주고?”

“다 알면서 시치미는. 자, 지금부터 너의 역할이 아주 중요해.”

스스슥!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을 넘는 인영들이 속출했다.

소림무제를 위시로 제왕검과 개왕, 금강신니, 구절서생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경악이 짙게 서려 있었다.

큰 소란이 있었던 어젯밤이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사천당가 내원의 아침은 활기찼다.

이른 아침부터 하인하녀들이 바삐 움직였던 것이다.

특히나 주방에서는 새벽부터 온갖 음식 냄새가 풍겨 나왔다.

찾아온 손님들이 한둘이 아닌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준비했던 것이다.

“확실히 규모가 있어.”

“정말 엄청난 수준인 거 같아요. 사천성 사람들은 다 손이 큰 가 봐요.”

“게다가 매운 것도 좋아하고 말이지.”

“심각할 정도로요.”

심대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매콤한 수준이라면 맛있게 먹겠지만 기본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음식들이 매웠다.

‘이게 바로 사천음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식사 때마다 물은 필수였다.

“나도 매워. 근데 맛있어, 언니.”

“사부님 앞에서는 사저라고 해야지.”

“에헤헤! 아직도 입에 안 달라붙었어.”

심소혜가 귀엽게 웃으며 목을 움츠렸다.

실수할 때마다 나오는 그녀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연회라니. 삼시세끼 내내 먹겠네요.”

“다른 이도 아니고 태상가주의 생일연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보여 주기식인 것도 있고. 봉문 후 최초로 여는 대규모 행사니까.”

“근데 정작 당 대협은 생신연인데도 딱히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객잔에서 일해 봤었기에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할 주방인원들을 생각하며 심대현이 말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던 것이다.

“생일잔치만 몇 번째인데. 아마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었다면 소소하게 했을 걸.”

“참, 사부님은 생신이 언제세요?”

스윽.

때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 심대현의 말에 제자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생각해보니 다들 벽우진의 생일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어서였다.

“내 생일이라···. 언제였더라?”

“예?”

벽우진의 중얼거림에 제자들 모두가 놀랐다.

말투를 듣자하니 정말 모르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의 눈이 하나같이 동그래졌다.

“잘 몰라. 난 고아였거든. 가장 어렸을 적의 기억은 다리 밑에서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구걸을 하거나 그 동네에서 제법 인심 좋다는 집에 찾아가서 밥을 빌어먹던 기억 밖에 없어.”

“아···.”

서예지와 심대혜가 깊은 탄식을 흘렸다.

설마 하니 벽우진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다가 운 좋게 사부님을 만나서 곤륜산에 왔지. 지금은 그 다리 밑이 어디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 가보면 알기는 하겠지만 청해성 내라는 것 말고는 기억이 없어. 생일을 따로 챙겨본 적도 없고. 아니, 챙길 수가 없었지.”

벽우진이 오랜만에 생각난 시공간의 진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최소 58년 동안 갇혀 지내면서 그가 먹은 것이라고는 벽곡단과 물이 전부였다.

그런 형편에 생일을 챙기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잔칫상을 차리고 싶어도 차릴 게 없었으니까.

“그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일을 안 챙기신 거예요?”

< 제 47장. 패선(覇仙) 대 검선(劍仙).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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