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52화 (152/325)

< 제 47장. 패선(覇仙) 대 검선(劍仙). -02 >

스릉.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며 벽우진 역시 무상검을 뽑아들었다.

다른 이라면 모르겠지만 운정이라면 그의 검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개시인가. 그런데 첫 상대가 선배님이라면, 나쁘지 않지.’

우우우웅.

무상검에 잘게 진동했다.

첫 상대가 운정이라는 사실에 무상검도 반가워하는 듯했다.

대신 양팔에 착 달라붙어 있는 일월쌍환은 거칠게 투정을 부렸다.

왜 자신들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벽우진에게 소리 없이 따졌던 것이다.

‘아직은 안 돼. 일러, 이 녀석들아.’

웅웅! 웅웅웅!

떼를 쓰듯 투정을 부리는 일월쌍환을 어르고 달래며 벽우진은 검을 편하게 늘어뜨린 운정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저 단순히 검을 늘어뜨린 것뿐인데도 이상하게도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세만으로도 운정은 자신의 무경을 벽우진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검? 검이라고? 패선은 무투가 아니었나?’

한편 운정의 지령 아닌 지령을 받은 혜량은 검을 뽑아든 벽우진을 보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그가 듣기로 벽우진은 주로 손을 사용했지 검을 사용한 적이 없어서였다.

한데 그때 그의 시선에 벽우진의 제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들이.

‘어라?’

혜량이 두 눈을 껌뻑였다.

만약 벽우진이 무투가라면 제자들 역시 권법이나 장법, 금나수 등을 익히는 게 맞았다.

사부가 익힌 무공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게 바로 제자였으니까.

그런데 여덟 명의 제자들 중에 검을 차지 않은 이는 한 명뿐이었다.

‘원래부터 검사였다고?’

혜량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만약 진신절기가 검이라면 지금껏 세상은 벽우진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벽우진은 지금까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소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흔들리는 두 눈으로 혜량이 벽우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런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신경이 정면에 서 있는 운정에게 쏠려 있어서였다.

휘이이잉.

한겨울 밤의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진즉에 수화불침의 경지에 오른 둘이었기에 차가운 바람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두 사람의 집중력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어 주었다.

‘역시 대단하군.’

벽우진이 운정의 자세를 보고 감탄한 것처럼 그 역시 벽우진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천기에서 보았던 대로 역시나 굉장한 기도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내심 자만했던 마음이 쏙 들어갈 정도로 말이다.

‘욕심을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닌 모양이야. 허허허!’

운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가슴 가득 부러운 감정이 치솟자 역시 자신이 공부는 그리 대단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파아앗!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운정이 움직였다.

심연처럼 잔잔한 눈으로 벽우진을 응시하던 그가 땅을 박찼다.

저녁에 있었던 회의 내용을 아들에게 알려주던 남궁진이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어마어마한 기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걸 느낄 수 있어서였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깜짝 놀란 듯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부친의 모습에 남궁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행동뿐만 아니라 표정 역시 심상치가 않아서였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혹시 안 좋은 일이···.”

“그런 거 아니다. 네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알겠습니다.”

“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한 가지뿐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 후기지수 중 최고가 되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난세는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남궁진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위기의 순간 결국 스스로의 목숨을 지켜주는 건 본인의 무력뿐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경지를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신경은 줄곧 별채로 향해 있었다.

‘또 늦은 건가.’

무시무시한 기운의 폭풍에 남궁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누군가가 중간에서 폭발하는 기운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 되는 무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솟구치는 기운은 어마어마했다.

제왕검이라 불리는 그조차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말이다.

‘솟구치는 기운으로 보아 무당 쪽 같은데. 권제는 아닌 것 같고. 설마 검선(劍仙)이신가.’

무당파는 최소한의 수행원만을 데리고서 사천당가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전대고수라 할 수 있는 검선이 있었다.

지금 세대는 잘 모르지만 무당권제 이전에 무당파를 지키던 이이자 강남 무림을 대표하던 고수가 바로 검선이었다.

그렇기에 남궁진은 지금 벽우진과 겨루는 이가 검선이 아닐까 짐작했다.

‘보고 싶지만, 안 되겠지.’

남궁진이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격렬하게 뒤섞이는 기운을 느끼자 피가 들끓었던 것이다.

더구나 저번에 소림무제로 인해 기회를 놓쳤었기에 그는 내심 벼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벽우진과 붙어보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지난번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왼팔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 상태가 정상도 아니었고.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적어도 왼팔을 잃기 전의 수준까지는 완벽하게 회복되었기에 남궁진은 꼭 벽우진과 겨뤄보고 싶었다.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

“곤륜파의 제자들은 어떻더냐?”

“무서웠습니다.”

“어떤 점이?”

들끓는 호승심을 가라앉히며 남궁진이 물었다.

안 그래도 사천당가를 방문하기 전 그는 곤륜파의 제자들에 대해서 경고했었다.

절대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아들은 경계심을 넘어 무섭다고 말하고 있었다.

“알아보니 서 소저를 제외하면 무공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데 그런 것 치고는 실력이 너무나 뛰어났습니다. 저게 과연 1년도 안 돼서 이룩한 경지인가 싶을 정도로요. 지금도 저 정도인데 만약 시간이 흐른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니 두려웠습니다.”

“맞는 말이다. 황하의 수적들을 상대로 보였던 활약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성장세이지. 하지만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발전이 정체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승부는 그때부터다.”

“맞습니다. 하지만 사부가 천하의 패선이지 않습니까.”

“으음.”

남궁진이 침음을 흘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패선이었다.

보는 순간 전율이 일었던.

그렇기에 안일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더불어 안목에 놀랐습니다. 무공이라는 게 단순히 재능만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 재능에 노력이 합쳐져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게 무공이지.”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패선이라는 무인이 어떤 사람일지가요.”

“내일이면 보게 될 거다. 아마 보는 것만으로도 너에게는 많은 공부가 되겠지. 반대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기대됩니다.”

남궁혁이 눈을 빛냈다.

내일이면 그토록 대단하다는 패선을 만날 수 있어서였다.

더불어 친분까지 맺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였다.

‘사천당가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지.’

당주혁과는 좋은 친구사이였지만 동시에 경쟁관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남궁혁은 단순히 벽우진을 보는 것을 넘어 그 이상까지도 생각했다.

무당파의 비전절기인 제운종(梯雲縱)을 펼치며 운정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검격에는 강렬한 기세도, 그렇다고 날카로운 기운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이어졌다.

“흠!”

극한의 부드러움이 담긴 듯한 운정의 공격에 벽우진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언뜻 보기에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검식이었지만 그 안에는 태산조차 무너뜨릴 거력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태극검(太極劍)이되 태극검이 아니로군.’

무당파의 기본검공이자 모든 검법의 뿌리가 바로 태극검이었다.

그런데 지금 운정이 펼쳐 보이는 태극검은 태극검이되 태극검이 아니었다.

단순히 태극검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이상의 묘리가 담겨져 있었다.

‘극유(極柔)를 끊는 것 또한 극강(極剛)이지.’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말이 있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제압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게 꼭 절대적이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강한 것이 부드러움을 부수기도 했다.

쿠르르릉!

벽우진이 검을 들어 올린 순간 무상검에서 우레 소리가 토해졌다.

막대한 벽우진의 진기에 무상검이 울부짖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쿠아아앙!

무상검의 검극이 끊임없이 태극을 그리는 운정을 향한 순간 푸른빛 용두(龍頭)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바로 곤륜파의 절기이자 한때 소실되었던 태청용형검(太淸龍形劍)의 발현이었다.

꽈아앙!

포효하듯 입을 쩍 벌리고서 뻗어나간 용두는 단숨에 운정을 들이박았다.

벽우진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날아갔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굉음과 함께 뒷마당이 크게 흔들렸다.

높게 솟은 담벼락이 순간적으로 진동하며 짙은 흙먼지를 토해냈던 것이다.

“흐읍!”

그러나 무지막지한 일격에도 운정의 검세는 변함이 없었다.

끊임없이 태극을 그리며 벽우진이 뿌린 용두를 막아냈던 것이다.

때로는 밀어내고, 혹은 흘려내면서 운정은 절대 태청용형검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정면대결은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스스스스. 스스스스.

벽우진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단순하기 그지없는 검초였지만 놀랍게도 운정이 그리는 태극은 태청용형검을 효과적으로 받아냈다.

어떻게든 흐름을 끊어내려는 용두를 운정은 부드럽게 흘려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방어만 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려두었던 태극이 허공에 고스란히 남아 벽우진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기운을 이 정도로 섬세하게 유지하고 다룬단 말이지.’

그야말로 공방일체와 마찬가지인 운정의 검세에 벽우진은 내심 감탄했다.

이 정도로 공격과 방어의 균형이 완벽한 무인을 그는 아직껏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벽우진은 흥이 났다.

쿠르르릉!

어느새 사방을 점유해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쇄도하는 수많은 태극을 주시하며 벽우진이 재차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검극에서부터 시작되는 용두가 머리 위로 올라왔다.

동시에 머리뿐이던 용두에 서서히 몸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터터터텅!

벽우진을 보호하려는 듯 똬리를 튼 용의 몸체로 운정의 공격이 쏟아졌다.

수많은 변화를 품고 있는 태극의 기운이 쉴 새 없이 쏟아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공격도 용의 몸을 뚫고 벽우진에게 닿지 못했다.

꿀꺽!

그리고 그 광경을 혜량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 공방을 주고받고 있는 두 사람의 검세에는 검강을 아득히 뛰어넘는 거력이 서려 있음을 그는 단번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을 벽우진, 혹은 사백의 자리에 넣었다.

‘···필패다.’

어느 쪽이든 그로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무당파의 장문제자에게만 전수되는 최고이자 최후의 검공인 태극혜검(太極慧劍)을 익힌 그였지만 사백의 검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운정이 펼치는 태극검을 태극혜검으로도 막아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신기한 점은 운정의 태극검이 태극혜검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어서겠지.’

태극검은 무당검의 가장 기본이자 기초가 되는 검법이었다.

그런 만큼 태극검의 극의에 닿은 운정의 검이 태극혜검과 닮은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장삼봉 시조께서 말씀하셨다고 했던가. 태극검, 태극권만 제대로 익혀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 제 47장. 패선(覇仙) 대 검선(劍仙).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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