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7장. 패선(覇仙) 대 검선(劍仙). -01 >
운정의 말에 혜량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무슨 말인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밖으로 나오는 인영을 보고는 사백의 말을 이해했다.
“무당에서 오셨다던 선배님이시군요.”
“빈도에 대해 알고 있소이까?”
“당가의 태상가주에게 들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태상가주가 제 친구입니다.”
“아아.”
운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나가는 식으로 혜량에게 들은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여유로운 운정과 달리 혜량은 어색하게 웃으며 벽우진에게 포권을 했다.
“허허.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원래는 연락을 먼저 하려고 했는데···.”
“혜량이는 잘못이 없소이다. 빈도가 가자고 해서 따라온 죄 밖에는 없소.”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저 역시 심심하던 찰나였습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그럼 염치불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편하게 들어오시지요.”
설백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선풍도골의 풍모를 지닌 운정을 벽우진은 자연스럽게 인도했다.
그리고는 3층의 자신의 방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차를 한 잔 드릴까요?”
“감사히 마시겠소.”
“말씀 편히 하시죠. 저보다 나이는 물론이고 배분도 높은 걸로 아는데.”
“이게 편하외다.”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사자가 거절한 마당에 더 권하기도 애매해서였다.
대신 그는 회의 때와는 달리 안절부절 못하는 혜량을 쳐다봤다.
“편하게 앉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러지 말고.”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 같아서···.”
“괜찮아. 우리가 잠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애들이 일찍 자는 건 또 아니거든.”
“흠흠!”
벽우진의 말에 혜량이 어색하게 앉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빠르게 방 안을 훑고 있었다.
그 역시 곤륜파와 마찬가지로 한 채의 별채를 배정 받았는데 이곳과는 상당히 달랐다.
‘좀 더 좋은 것 같은데.’
사천당가에서 준비한 별채답게 무당파가 배정 받은 숙소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혜량은 이상하게도 곤륜파의 별채가 더 좋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무당파보다 곤륜파의 인원이 많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친구사이라서 그런 건가?’
혜량이 쓸데없는 상념에 점점 깊게 빠져드는 사이 벽우진은 운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차향이 좋구려.”
“곤륜산에서 재배한 약차입니다. 약초를 잘 말려서 우려낸 차이지요. 무당산에서 키우고 만든 차와는 향이 많이 다를 겁니다.”
“그런 것 같소이다.”
운정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맛도 맛이지만 향이 일품이어서였다.
“늦었지만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곤륜파의 청류라고 합니다. 도명보다는 본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요.”
“운정이라고 하외다. 그리고 너무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되오. 빈도야 야인이지만 장문인은 일파의 수장이지 않소이까. 딱 선배 정도로만 예우해주면 되오이다.”
“알겠습니다.”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차를 음미하는 운정을 주시했다.
단순히 자기소개를 하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아님을 그는 알아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비무를 하러 왔다고 보기에는 전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그냥 내가 궁금해서 찾아온 건가? 근데 왜 굳이? 내일 민호의 생일연 때 대 연회장에서 마주치지 않을 리가 없는데.’
벽우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혜량을 힐끔거렸다.
아까 회의실에서는 그렇게 투지를 불사르더니 지금은 그러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마치 그랬던 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의문이 많은 것 같소이다.”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혜량 진인의 말마따나 늦은 시각이니까요.”
어느새 새카맣게 변한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벽우진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얼굴을 보자고 이 시간에 찾아올 리는 없어서였다.
“직접 만나보고 싶었소이다.”
“저를 말입니까?”
“그렇소. 궁금하기도 했고, 의심이 들기도 해서.”
“흐음.”
알쏭달쏭한 말에 벽우진이 말을 아꼈다.
일단은 들어볼 작정이었다.
“내일 볼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대화라. 어떤 대화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 전에 한 번 어울려 보는 것 어떻겠소?”
“어울려 보자고 함은?”
운정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손으로 자신의 낡은 송문고검을 툭 건드렸다.
“우리는 도인이되 무인이지 않소. 허허허.”
“대련이라. 좋습니다.”
벽우진이 흔쾌히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의 존재감을 느끼고 마중을 나왔었기에 벽우진은 마다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무당파의 최후 보루와도 같은 이가 운정이었고.
세인들은 무당권제라 부르며 혜량을 추켜세웠지만 그 대단한 혜량도 운정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혜량이 관전해도 되겠소이까?”
“흐음.”
“두 분이서 대련하시려고요?”
이번에는 벽우진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과 운정의 대결이라면 혜량이 얻는 게 적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
“어···.”
그런데 벽우진이 고민할 때 혜량이 얼굴 가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그 역시 벽우진과 한 번 겨뤄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사백과 벽우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좋습니다. 대신 저도 제자들을 부르고 싶습니다.”
“좋소이다.”
이번에는 운정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벽우진이 허락했는데 그가 불허할 수는 없기도 했고, 크게 보면 중원무림에 이익이었다.
“저까지 부탁드리는 것은 역시, 안 되겠지요?”
“오늘만 날이 있는 건 아니니.”
“감사합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던 혜량이 화색을 띠었다.
다행히 자기까지는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더불어 오늘 자신을 끌고 온 사백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뒤쪽 마당으로 가시죠. 담벼락도 있고, 크기도 적당하니 대련을 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알겠소이다.”
벽우진이 전음으로 아이들을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벽우진을 위시로 운정과 혜량이 방을 나섰다.
“이 밤에 무슨 일이지?”
“갑자기 이렇게 호출하신 적이 없는데.”
“다 이유가 있느니라.”
“호법님!”
자신들에게 일제히 뿌려진 전음에 아이들이 의아한 얼굴로 방을 나설 때 진구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위층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도에 혹시 몰라 나온 것이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심소혜가 있었다.
“아까 손님이 찾아오신 것 같던데.”
“손님이요?”
“태상가주님을 제외하면 사부님이랑 친분이 있는 분이 계신가?”
서예지의 말에 남매가 서로를 돌아봤다.
하지만 나오는 대답은 없었다.
“보면 알게 될 테니 따라 오너라.”
“사부님!”
“어?”
계단을 내려오며 말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아이들이 반갑게 소리쳤다.
하지만 서예지만은 정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일하게 그녀만이 혜량을 알아봤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궈, 권제셔. 무당권제.”
“예에?!”
회색빛 눈썹과 수염을 가진 혜량이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내려가자 서예지가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말에 아이들이 대경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무당권제가 방금 전에 지나갔다는 말에 정말 깜짝 놀란 것이었다.
“진짜로요?”
“응. 확실해. 근데 같이 오셨던 분은 누구신지 모르겠어.”
심대혜의 말에 대답하며 서예지가 미간을 좁혔다.
혜량과 함께 있던 노도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일단 내려가자. 장문인께서 따라오라고 하시는 듯하니.”
“예.”
모두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진구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무당권제의 이름이 아무리 드높다고 하나 그하고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천당가를 떠나면 다시 볼 일이 없는 인물이기도 하고.
“같이 가요, 호법님!”
계단을 내려가는 진구의 손을 잡으며 심소혜가 소리쳤다.
그런데 그 순간 진구의 한쪽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억지로 미소를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근데 별말씀이 없으시네요.”
“뭐를요?”
“오늘 저녁에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요.”
맨 뒤에서 계단을 내려가던 도일수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분명히 소식을 전해 들었을 텐데 일언반구도 없는 게 이상해서였다.
“딱히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합니다만.”
“일단 가죠. 세 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네.”
고민한다고 벽우진의 속내를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서예지는 아이들과 함께 어느새 별채 밖으로 나와 있는 벽우진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벽우진과 두 노도사가 향하는 곳은 뒷마당이었다.
연무장으로 써도 될 정도로 넓은 뒷마당으로 세 사람이 걸어갔던 것이다.
“어떻습니까?”
“적당한 것 같구려. 흘러나오는 기운은 혜량이가 잘 막아줄 터이고.”
운정이 혜량을 바라보며 슬쩍 웃었다.
그러나 그 시선에 혜량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은 전혀 없어서였다.
심지어 벽우진과의 대련에 대해서도 그는 들은 바가 없었다.
“괜찮겠네요.”
“그럼.”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혜량을 지그시 바라보던 운정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뒷마당의 중앙으로 천천히 이동했던 것이다.
“무슨 상황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차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흔치 않은 기회이니까 모두 잘 봐둬. 지금 당장은 얻는 게 없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정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집중해서 볼게요.”
“너무 부담감을 가지진 말고. 보고 있다고 해서 다 알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호법님. 아이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시오.”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는 서예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벽우진은 진구를 돌아봤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무당권제라 불리는 혜량이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안전장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도 했고.
“꼭 이기세요, 사부님!”
“응원하고 있을게요!”
“아자아자!”
심대현과 심소천, 그리고 심소혜로 이어지는 응원에 벽우진이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들 역시 환하게 웃었다.
“참으로 맑고 착한 아이들이구려.”
“운이 좋았습니다.”
“그 운을 잡는 것 또한 능력이외다. 허허허.”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운정이 진심으로 부러운 눈으로 제자들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천생 무골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올곧고 굳건했다.
의지 역시 박약해 보이는 이가 하나도 없었고 말이다.
‘미래가 밝아.’
벽우진이라는 대단한 무인 아래에서 말 그대로 쑥쑥 자라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니 운정은 자연스레 곤륜파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었다.
바닥을 치면 올라갈 일 밖에 없다는 말처럼 곤륜파는 벽우진을 중심으로 무섭게 성장하는 듯했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구나. 이렇게 완벽하게 안배를 해놓을 줄이야.’
안배는 아무리 완벽해도 결국 반반이었다.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안배하는 이가 완벽하게 준비를 한다고 한들 후인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곤륜파의 안배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나 역시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벽우진의 제자들을 하나하나 모두 살펴본 운정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혜량에게 향했다.
사실 이 모든 게 다 무당과 혜량을 위한 것이었다.
당사자는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허허. 빈도가 너무 여유를 부린 모양이오.”
“아닙니다. 저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려.”
스르릉.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는 벽우진의 말에 운정이 빙그레 웃으며 검을 뽑았다.
그러자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낡은 송문고검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 제 47장. 패선(覇仙) 대 검선(劍仙).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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