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6장. 무당에서 온 손님. -02(6권 끝) >
“시작은 예지였다며. 뭐, 집중되는 게 당연하겠지만. 오화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우리 예지만할까.”
“아냐. 오화 애들도 장난 아냐. 문무겸전이기도 하고.”
당민호가 고개를 저었다.
자기 제자이기에 자식처럼 챙기는 마음은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서예지가 천하절색이라고 하면 아직은 손색이 있었다.
적어도 그에 준하는 이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우리 예지도 양쪽 다 잘하는데?”
“신선한 얼굴이라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중원오화 애들도 만만치 않아. 아마 내일이면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소윤이는 포함 안 되지?”
“지금 약 올리는 거지?”
당민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고로 가족과 제자는 건드리지 않는 법이었다.
더구나 손녀는 그에게 있어 하나뿐인 보물이었기에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흠흠!”
거기에 당문경도 가세했다.
당민호에게는 손녀였지만 그에게는 하나뿐인 딸이었다.
아들이야 딱히 신경 쓰지 않지만 딸은 달랐다.
“내 제자를 깎아내린 건 잊었지?”
“끄응!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준 거 아냐.”
“너한테 부탁 안 했다.
“그래, 네 제자 잘났다.”
“암. 잘났지. 내가 키웠지만 정말 쑥쑥 자라고 있거든.”
벽우진이 대놓고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닌 말이 아닌 게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키운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절정과 초일류급 고수를 이렇게 빨리 만드는 건 그 어떤 곳도 불가능했다.
“근데 자칫 잘못하면 말이 나올 수 있어.”
“마공을 익혔다고?”
“응. 아니면 사술을 익혔다거나.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성장세잖아. 마교의 마공도 이 정도는 아니야.”
당민호가 조금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패선이라는 존재로 인해 쑥덕거리는 수준이지만 분명히 나중에는 말이 나올 터였다.
“그럼 증명하면 되지. 내가 찔리는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증명이야 쉽겠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해도 믿지 않는 자들이 분명히 존재할 거라는 거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이들이 있으니까.”
“떠들 줄만 아는 놈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정작 내 앞이나 아이들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할 텐데.”
“너무 경시하는 것도 좋지 않아. 이제는 잃을 게 많아졌잖아. 너무 과격하게 대응하는 것도 좋지 않다.”
곤륜파는 더 이상 몰락한 문파가 아니었다.
벽우진의 등장과 함께 빠른 속도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만큼 세인들의 시선 역시 이제는 신경 써야 했다.
마음 가는대로 막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난 것이다.
“그래서 나름 점잖게 지내고 있잖아. 원래 내 성격이었으면 군남생은 오늘 회의실에서 걸어 나가지 못했어.”
“내가 그래서 잘했다고 했잖아. 다만 좀 더 유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지. 어쨌든 진주언가의 후계자 말고 다른 일은 없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총관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곤륜파 제자들에게 있었던 일은 방금 전에 소상하게 설명한 게 다였다.
그 이후에는 딱히 소란이 없었다.
“알았어. 일 봐.”
“예, 그럼.”
보고를 마친 총관이 조용히 방을 나섰다.
당문경과 벽우진에게 차례대로 인사한 후 퇴실했던 것이다.
“청춘은 청춘이야. 부럽다.”
“근데 왜 내 얼굴을 보면서 말하냐?”
“너도 외모만은 청춘이잖아.”
“난 너랑 달라. 넌 춘향이를 첩실로 들이고 청춘을 맘껏 즐겼지만 난 아니라고. 청춘의 청 자도 난 즐기지도, 느끼지도 못했어.”
“지금부터 즐기면 되지. 안 그래도 너 노리는 이들이 많다고 하던데.”
“응?”
“모르는 척 하긴. 너에게 직접적으로 묻는 이들도 꽤 되지 않아?”
“뭘?”
벽우진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반문했다.
그러자 당민호가 음흉하게 웃었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게 그의 눈에는 훤히 보였던 것이다.
“모르는 척 하기는. 다 알면서.”
“정말 몰라.”
“너도 민망하기는 한가 보구먼? 하긴. 나이가 일흔다섯이 넘었는데. 곧 일흔여섯이 되고.”
“벌써 노망들었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어째 나이를 먹었는데 먹은 것 같지 않아서였다.
십대 후반과 비교해도 딱히 달라진 것 같지 않은 친구의 모습에 벽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범한 촌부라면 진즉에 들 나이이기는 하지. 그래도 난 아직 아냐. 아직은 정정하니까. 새 장가를 가도 될 정도로 말이지.”
“그럼 너나 가.”
“춘향이 이후로 나에게 더 이상의 여자는 없다.”
당민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랑했던 춘향이를 보내는 날 그는 맹세했다.
더 이상 여자를 가슴에 품지 않기로 말이다.
“퍽이나. 못하니까 그렇게 자기합리화 하는 거면서.”
“아니거든? 나 좋다는 여인들이 아직도 어마어마하다!”
당민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비록 늙기는 했지만 그의 인기는 여전했다.
마음만 먹으면 젊디젊은 여인을 처로 들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기준을 거기서 조금만 더 높이면 말했던 대로 수십 명은 충분히 되었다.
“그럼 만나. 나 부러워하지 말고.”
“···젊음이 부럽구나.”
“그렇게 말해도 더 이상 줄 거 없으니까 기대하지 말고.”
“에잉! 매정한 놈. 근데 허리춤의 그 검은 뭐야? 지난번에 보지 못한 검인데.”
말하면 말할수록 자신이 말리고 밀리는 듯한 느낌에 당민호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그 말에 조용히 차를 들이켜던 당문경도 관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벽우진이 검을 사용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자 궁금하던 차였다.
“새 장문령부. 율석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었지.”
“보여줄 수 있냐?”
“못 보여줄 것도 없지.”
스르릉.
부드럽고 청아한 마찰음과 함께 한 자루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을 닮은 은백색의 검신에는 은은한 푸른빛이 서려 있었다.
벽우진이 딱히 공력을 흘려 넣지 않았음에도 검날을 따라 옅은 푸른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파의 장문령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수수한 모습이었다.
“호오.”
“무난한데요?”
“들어봐도 되냐?”
살짝 실망스러운 기색을 띠는 당문경과 달리 당민호는 눈을 빛냈다.
단순히 외견만으로 무상검을 판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든지.”
벽우진이 내미는 무상검을 당민호가 조심스럽게 받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곤륜파의 장문령부인 만큼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오오오!”
무상검을 조심스레 든 순간 당민호가 탄성을 터트렸다.
양손으로 검을 드는 순간 그는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균형감을 말이다.
“왜 그러세요?”
“설명보단 한 번 드는 게 더 빠를 거다. 괜찮지?”
“물론. 우리가 남도 아니고. 한 번 든다고 검이 닳는 것도 아닌데.”
“들어 와.”
벽우진의 허락에 당민호가 신줏단지 다루듯이 무상검을 아들에게 건넸다.
그런데 무상검을 받아든 당문경의 표정이 일변했다.
어째서 부친이 탄성을 내질렀는지 무상검을 든 순간 알 수 있어서였다.
“진정으로 완벽한 균형감이군요.”
“신검이나 보검은 아니지만, 적어도 명검의 반열에는 오른 검이다. 그야말로 명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검이랄까. 그래서 아쉽구나. 좀 더 좋은 재료로 만들었다면 어쩌면 이 이상의 검이 나왔을 텐데.”
“과욕이야.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다. 만약 삿된 욕심이 들어갔다면 이 검은 완성되지 못했을 거다.”
“그것도 그렇군.”
당민호가 순순히 인정했다.
특별한 기운은 서려 있지 않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이 무상검이야말로 곤륜파의 무공을 펼쳐내기에 최적화된 검이라는 사실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만져보니 다르지?”
“예. 그저 감탄만 나옵니다.”
사천당가에도 공방이 있었다.
하지만 사천성에서 내로라하는 대장장이들을 모아 두었음에도 이만한 검을 만들 자신은 들지 않았다.
이런 검은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때와 운이 맞아떨어져야 완성이 되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딱히 신경 써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데 거둬들인 이들이 하나같이 대단한 성과를 내는 걸 보면.”
“그게 바로 안목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지. 물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화시켜주는 것 또한 능력이고.”
“안 민망하냐? 그렇게 자화자찬하면?”
“사실인데 뭐가 민망해?”
벽우진이 당당하게 콧대를 세웠다.
어찌됐든 이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그였다.
그 점만은 분명했다.
“대단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리고 축하한다. 새 장문령부가 생긴 걸.”
“아아.”
흠집 하나 없는, 누가 봐도 새 것임을 알 수 있는 무상검을 벽우진이 조심스럽게 다시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당민호와 당문경이 살짝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실력 있는 대장장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에 부러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차마 영입하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하나만 더 충고하자면, 너무 적을 만들지 마. 적당히 가자, 적당히.”
“영원한 아군은 없어. 그렇다고 지금 아군인 것도 아니고. 난 이만 간다.”
잔소리가 시작될 것 같은 낌새에 벽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평소에 길게 하지 않던 회의에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기에 좀이 쑤시던 찰나였다.
진구도 한 번 둘러봐야 했고.
그렇기에 벽우진은 득달같이 일어나서 방을 나섰다.
“여전하시네요.”
“너무 건재해서 문제지. 부디 잔치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있어야 할 텐데.”
“그건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 아버님.”
“왜?”
“주혁이 일로 상의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당민호의 두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 이 시점에서 손자의 일로 논의할 게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당민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두 명의 노도사가 소담스러운 길을 거닐었다.
명문세가의 품격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길 하나조차도 허투루 만들어진 게 없었다.
하지만 둘 중 상대적으로 젊은 노도사가 앞서 걸어가는 이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 찾아가시게요?”
“이미 가고 있잖느냐.”
“그래도 하인을 통해서 말이라도 해 놓은 다음에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요?”
“쳐들어 갈 기세는 너였는데?”
“끄응!”
사백의 말에 혜량이 앓는 소리를 냈다.
확실히 안절부절 못한 쪽은 그였다.
하지만 그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몸이 달아오르기는 했어도 한 줄기 이성은 유지했던 것이다.
“차 한 잔 하자고 찾아갔는데 매몰차게 거절하겠느냐? 그렇다고 바쁜 일정을 보내는 것도 아니라고 하던데.”
“성격이 좀, 그래서요.”
“네가 보기에도 그렇게 괄괄하더냐?”
“그 이상이었습니다.”
무당권제라 불리며 호북성을 넘어 천하에 무명이 드높은 혜량이었지만 그조차도 지금 앞서 걸어가는 이에게는 한낱 아이에 불과했다.
무공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솔직히 혜량은 아직도 사백이 자신과 함께 사천당가에 온 이유를 알지 못했다.
뜬금없이 같이 가자고 했기에 모시고 온 것이었다.
“확실히 평범한 도사는 아닌 모양이야.”
“도사라기보다는 그냥 무인 같았습니다. 도복만 입고 있었을 뿐 산보다는 속세가 어울리는 성격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소문대로 엄청 젊어 보였습니다. 이제 막 약관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요. 만약 패선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면 후기지수로 봤을 겁니다.”
“그게 꼭 좋지만은 않을 것 같구나.”
“전 부러웠습니다. 적어도 육체적인 부분에서 전성기가 어마어마하게 남은 것이니까요.”
혜량이 얼굴 가득 부러운 기색을 띠었다.
아무리 경지가 높아진다고 한들 노화만은 막을 수 없었다.
그저 늦추는 것이 한계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달랐다.
‘몇 번의 환골탈태를 해야 그 정도로 젊어질 수 있을까.’
그 역시 환골탈태를 이루기는 했으나 너무 늦은 나이였기에 큰 효과가 없었다.
물론 몇 번 더 하면 더욱 젊어지기는 하겠지만 실질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저 곳이더냐?”
“예.”
“우리가 머무는 별채와는 또 다른 느낌이로구나.”
“제가 먼저 가서 말을 해놓겠습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별채의 풍경에 사백이 감탄하는 것을 보며 혜량이 입을 열었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일단 가서 말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거절을 당해도 사백이 당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당하는 게 나았으니까.
“그럴 필요 없다. 이미 알고 있으니.”
“예?”
< 제 46장. 무당에서 온 손님. -02(6권 끝)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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