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6장. 무당에서 온 손님. -01 >
“잘했다.”
짧지 않았던 회의를 끝내고 당민호는 아들과 벽우진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이동했다.
따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웬일이래? 난 네가 뭐라 할 줄 알았는데.”
“적당했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으니까. 만약 그때 네가 주변 이들 때문에 참았다면 더욱더 얕잡아 보였을 거야. 그렇다고 네가 두들겨 팬 것도 아니고. 그냥 무력시위를 한 것에 불과하잖아? 군남생이야 치욕스럽겠지만 그렇다고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명분은 너에게 있었으니까. 게다가 나이로든 배분으로든 네가 위인데. 손찌검을 했다면 모를까 난 적당하다고 생각해.”
“갑자기 낯선데.”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벽우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회의를 끝내고 따로 보자고 한 게 그는 잔소리를 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당민호는 예상과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
“뭐, 네가 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난 내심 어느 순간에 끼어들어서 말려야 하나 생각했었거든. 근데 의외로 손속에 사정을 두어서 안심했지.”
“내가 그렇게 막나가지는 않아. 나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 아니다. 이유 없이 손을 쓰진 않는다.”
“알지. 잘 알고 있지. 그런 성격이었으면 패선이라 불렸겠어? 대마두가 되었겠지.”
“흥.”
대마두라는 단어에 벽우진이 코웃음을 쳤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그 세 글자라는 걸 눈치채서였다.
“네 성격은 아는데, 그래도 너무 적을 많이 만들지는 마. 어찌됐든지 간에 앞으로는 함께 가야 하는 이들이야. 굳이 친해질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척을 질 필요도 없어.”
“분명한 건 확실하게 아군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거지.”
“잘 알지. 그래도 너무 날을 세우지는 말라고. 적당히 이용하는 게 더 낫지 않아? 너한테야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겠지만 아이들한테는 아니지.”
“흠.”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당민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이야 자신이라는 존재 때문에 찍소리도 못하겠지만 나중에는 다를 터였다.
사람이라는 게 도움을 받은 기억보다는 굴욕을 당한 기억이 더 오해 남기도 했고.
당분간은 형산파의 사정도 있으니 납작 엎드려 있겠지만 만약 곤륜파가 조금이라도 삐끗한다면 복수하겠다고 달려들 터였다.
“그렇다고 네가 다 때려 부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못할 건 없지.”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순간 곤륜파는 더 이상 백도를 표방한다고 말할 수 없을 거야. 도가라는 느낌보다는 패도적인 무문으로 사람들에게 인식이 될 테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만 그렇게 했지 실제로 형산파를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분명한 명분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내일 연회장에서 잘 다독여줘.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잖아.”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말이 어떻게 천 냥의 가치가 있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그렇게 트집을 잡아야 해?”
“생각은 해보마.”
친구 아니랄까봐 쉴 새 없이 티격태격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당문경이 미소 지었다.
늘 조용히 있던 부친이 벽우진으로 인해 활기차진 것 같아서였다.
그게 당문경은 너무나 보기 좋았다.
‘실력도 두 말할 필요가 없고 말이지.’
당문경은 군남생을 너무나 손쉽게 제압하던 광경을 떠올렸다.
강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첫인상은 의외로 평범했다.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는 보고와 달리 벽우진의 첫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는 것 말고는 딱히 특징이 없었다.
그의 수준으로 벽우진의 무위를 가늠해 본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고.
한데 존재감을 드러내자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군남생이 구대문파에서 말석에 가까운 위치라고 하지만 단순히 기도만으로 그렇게 쉽게 제압할 줄이야.’
구대문파 중에서나 처지는 것이지 군남생이 이룩한 무경은 결코 얕지 않았다.
만약 무공이 보잘 것 없었다면 장문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더욱이 말석이지만 구대문파의 일좌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벽우진은 그 군남생을 단순히 눈빛과 기도만으로 제압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면 그게 가능한 걸까.’
고수들에게 있어 한 수 차이는 천양지차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벽우진이 보인 정도의 현격한 차이를 보이려면 한두 수 차이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당문경은 궁금했다.
벽우진이 대체 어느 경지까지 올라 있는지 말이다.
‘정말, 혹시 천하제일인은 아니겠지?’
문득 드는 생각에 당문경이 침을 삼켰다.
강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너무 앞서나가는 것 같아서였다.
현재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것은 분명했지만 아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축하한다.”
“뭐가?”
“다시 복귀한 거. 기분이 남다르지? 곤륜파로서는 58년 만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참석한 거잖아.”
“딱히.”
벽우진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기뻐서 방방 뛰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고작 그 자리에 참석하려고 곤륜파의 장문인이 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독불장군이 나쁜 건 아니지만 우군을 만들어서 나쁠 것은 없잖아? 믿을 수 있는 우호세력이 많아서 나쁠 것은 없어.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기도 하겠지. 근데 딱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자신감은 진짜.”
“그리고 속세에 있는 당가와 우리는 상황이 조금 다르니까.”
“다를 게 뭐가 있어.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도사들은 뭐 산에서 수련만 하나. 사람을 아예 안 만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적어도 강북 무림 쪽은 너에게 호의적이잖아.”
군남생이 벽우진에게 대들 수 있었던 건 곤륜파보다 형산파를 택하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했다.
곤륜파의 성장세가 무섭다고 하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형산파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가 간과한 것은 바로 벽우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꽤나 많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비중이 상당한 이들로 말이다.
“구대문파에 복귀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찬다는 거냐?”
“당연히. 내가 장문인으로 있는데 고작 그 정도에 만족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피차 마찬가지 아냐?”
“후후후.”
당민호가 말을 아꼈다.
하지만 웃음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근데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오늘 제왕검을 보니까.”
“확실히. 기도가 제대로 정련되어 있더라. 역시 만만한 가문이 아냐.”
당민호는 물론이고 당문경도 입맛을 다셨다.
왼팔을 잃은 만큼 무경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웬 걸.
남궁진은 그 짧은 시간에 적응을 끝마친 느낌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애초에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노력하는데 의의가 있는 거니까.”
“맞아. 그나저나 앞으로 상황이 재미있게 흘러가겠어. 밀려나지 않으려는 자와 차지하려는 자들의 경쟁이 살벌할 것 같거든. 너야 그런데 딱히 신경 쓰지 않겠지만.”
“내가 그걸 걱정할 시기는 지났지. 더구나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어드는 거 아니다.”
“푸하하하!”
당민호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너무나 어울리는 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도 밀려날 걱정을 해야 하는 건 곤륜파가 아니라 점창파와 종남파, 형산파였다.
“소림사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화산파도 보아하니 애가 나쁘지 않아.”
“맞아. 두 곳 다 회복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뿐 큰 문제는 없지. 똥 줄 타는 쪽은 다른 세 곳이고. 근데 이상하게도 제갈현이 말을 안 꺼냈단 말이지.”
“좋은 날을 앞두고 괜히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흐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똑똑똑.
당민호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일 재미있는 구경거리 중 하나가 싸움구경인데 그것을 놓쳐서였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가주님. 설우입니다.”
“들어오게.”
문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당문경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총관을 맡고 있는 당설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고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급한 일인가보군.”
“예. 정확하게는 벽 장문인께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나에게?”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던 벽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천당가의 총관이 자신에게 보고할 게 있다고 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당문경과 당민호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진 호법이 사고 친 거 아냐?”
“설마. 피곤하다고 숙소에 남아있겠다고 했는데.”
벽우진이 미간을 좁혔다.
아닐 거라고 말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젊은 혈기 저리가라 할 정도로 변덕이 심하기도 했고.
“후기지수들이 모인 연회장에서 소란이 좀 있었습니다.”
“혹시 내 제자들이 연관되어 있어?”
“예.”
총관이 연회장에서 벌어졌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비들이 많이 있었던 만큼 자초지종을 말하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 사부에 그 제자들이네. 아주 똑같아.”
“잘했네.”
“진주언가의 가주에게도 지금쯤이면 소식이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듣기에 제자들이 잘못한 것은 없는데?”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시비를 건 것은 언기준이었지 서예지나 도일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먼저 주먹을 날린 것도 언기준이었고.
그렇기에 벽우진은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언가주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지 자식이 쳐 맞고 왔는데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겠어. 그런데 말이야. 과연 나에게 따질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총관이 중립을 유지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아무래도 중간에 낀 입장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때 당민호가 입을 열었다.
“못 할 걸? 군남생이 그렇게 당하는 꼴을 봤는데 너에게 감히 따질 배짱이 있을까? 그렇다고 일수가 아무 이유 없이 두들겨 팬 것도 아니고. 정당방위라며? 쪽팔리고 화는 나겠지만 감히 찾아오지는 않을 걸?”
“찾아와도 상관없고. 난 내 제자들을 믿으니까. 이유 없이 손을 쓸 애들이 아니다.”
“사부나 제자나 이번에 제대로 신고식 했네. 아주 그냥 제대로 시선을 끌어 모았는데.”
어떻게 보면 사고를 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의외로 당민호는 흐뭇한 기색이었다.
나름 명문세가 출신이라 할 수 있는 언기준을 가볍게 손봐주었다고 하자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던 것이다.
더구나 도일수는 전직 쟁자수 출신인 데다가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비천단이라는 사기적인 영단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기가 밑바탕 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공력이 많아도 소용없지.’
상대방보다 공력이 많다면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공력의 양이 승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결국 싸우는 것은 사람이었고, 육체든 공력이든 누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
그렇기에 당민호는 단순히 비천단 덕분에 도일수가 언기준을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수 녀석, 어마어마한 노력파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게 도일수라는 걸 알았기에, 그걸 직접 보았기에 당민호는 확신했다.
절대 운 따위로 언기준을 쓰러뜨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고 횡포를 부린 것도 아니었기에 당민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걸. 언기준이라는 놈팡이가 시비를 걸어서 그렇지.”
“나도 알지. 일수 성격을 아는데. 근데 난 오히려 잘 된 것 같아. 이번 일로 아이들도 확실하게 이름을 알렸잖아. 실력도 적당히 드러냈고. 안 그래도 네 제자라는 점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었을 텐데.”
< 제 46장. 무당에서 온 손님.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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