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5장. 화려한 복귀. -03 >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소만. 곤륜파와 사천당가만 합류해도 해결될 것 같소이다. 제갈가주도 아시다시피 현재 본 파는 피해가 상당한 편이라.”
군남생이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도 제갈현의 표정은 담담했다.
“한 손이 아쉬운 상황이라는 것을 장문인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소이다.”
군남생이 한쪽 입꼬리를 잔뜩 올린 상태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어느새 자리에 늘어지게 앉아 있는 그를 말이다.
“말 드럽게 많네.”
“지금 뭐라 했소?”
“말이 드럽게 많다고. 불만이 있으면 내게 직접 말해. 괜히 제갈가주에게 뭐라 하지 말고. 뒤에서 쫑알쫑알. 되게 시끄럽네.”
벽우진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팠다.
일파의 장문인이라는 놈이, 그것도 무인이라는 녀석이 아이처럼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어이가 없어서였다.
“말이 심하지 않소!”
“그럼 나에게 그따위로 대답한 너는 잘한 거고?”
“예의를 지키시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군남생이 소리쳤다.
수장들이 다 모여 있는 곳에서 모욕을 당하자 더욱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에 벽우진은 오히려 조소를 흘렸다.
“본 파로 인해 조마조마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상황을 좀 가리지 그랬어. 아니면 연기라도 잘하거나. 그렇게 흥분하니까 더 없어 보이잖아.”
“벽 장문인!”
“근데 웃긴 게 뭔 줄 알아? 넌 그렇게 분노하면서도 나가지 않는다는 거야. 여기서 나가면 너에게 이득 될 게 없다는 사실을 너 스스로가 알고 있는 거지. 네가 견제해야 할 곳은 본 파만이 아니니까.”
까드득!
군남생이 시퍼런 광망을 토해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극도로 흥분했음에도 그는 손을 쓰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한 가닥 이성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난 물러나거나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어. 난 본 파의 선조들과는 좀 많이 다르거든.”
쿠웅!
살기등등했던 군남생의 신형이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돌 맞은 개구리마냥 땅바닥에 무기력하게 엎어졌던 것이다.
“크으윽!”
“이러기도 싫고 저러기도 싫으면 그냥 내가 선택해줄게. 그대로 엎어져 있어. 최소한 네가 원하는 대로 무슨 대화가 오가는 지는 들을 수 있잖아?”
“자, 장문인!”
느닷없이 바닥으로 쓰러진 군남생의 모습에 양옆에 앉아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고 이내 격렬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그들도 고수이기에 벽우진이 어떤 수법으로 군남생을 제압했는지 알았던 것이다.
“크아악!”
모두가 토끼 눈을 하고서 벽우진을 쳐다보고 있을 때 군남생이 악을 썼다.
무겁게 짓누르는 이 중압감에서 벗어나고자 포효 같은 기합성을 내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단전에 자리 잡은 공력을 모조리 끌어 올렸음에도 그의 전신을 짓누르는 중압감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잘 됐네. 이참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고. 내가 불편하거나 아니꼬운 이들은 나가. 굳이 서로 불편하게 있을 필요는 없잖아? 마음 같아서는 내가 나가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날 붙잡는 이들이 너무 많네?”
“······.”
몇몇의 얼굴이 새카맣게 변했다.
모두 다 군남생에게 동조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안색만 바뀌었을 뿐 누구 하나 엉덩이를 들지 않았다.
이제는 다들 알고 있는 것이었다.
무게추가 어디로 기울어져 있음을.
“이이익!”
그리고 그 모습을 군남생도 보고 있었다.
벽우진이 친절히 고개를 들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군남생이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렸다.
자신을 지지하던 이들조차 결국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몸을 돌렸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인간이 참 간사하지?”
부르르르!
또 다른 분노에 휩싸이던 군남생이 갑자기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아까 전에 했던 말이지만, 그때는 이해되지 않던 말이 지금은 너무나 와 닿아서였다.
“그쯤 해둬. 그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정 못 참겠으면 이젠 나가겠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허억! 헉!”
엎어져 있던 군남생이 격렬하게 심호흡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내내 전력으로 공력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 극도로 지친 것이었다.
“나갈 거면 나가고, 앉을 거면 앉고. 하지만 더 이상의 무례는 좌시하지 않을 걸세.”
당민호가 냉엄하게 말했다.
형산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군남생의 태도는 절대 옳지 않았다.
만약 이럴 것이었다면 연판장에 서명하지 말았어야 했고.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하네. 알겠지만 내가 좀 성격이 괴팍하잖아? 이해해 줬으면 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참아주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나름 깔끔하게 정리가 되기도 했고요.”
벽우진의 사과에 당문경이 손을 휘저었다.
이 정도면 정말 얌전하게 마무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나가실 분은 안계십니까?”
조용해진 실내를 둘러보며 제갈현이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는 군남생을 비롯해서 불만을 토로하던 이들을 한 번씩 쳐다보면서 말이다.
‘확실히 편하긴 하네.’
과정이 조금 과격하기는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단 한 번에 정리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벽우진에게 명분이 있기는 했었지만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압도적인 무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만 하더라도 감히 벽우진과 눈을 마주하는 이가 없었다.
‘그 대단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말이지.’
오죽 했으면 굴욕을 당했던 군남생조차도 군말 없이 앉아 있을까.
거기다 벽우진은 영악하게도 군남생과 그를 따르는 이들을 너무나 쉽게 갈라놓았다.
원망의 화살이 자신이 아닌 배신자들에게 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라니까.’
일수에 좌중을 휘어잡아 버리는 벽우진을 힐끔거리며 제갈현이 목을 가다듬었다.
정리가 되었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회의에 들어가야 했다.
“회의를 시작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안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해빙궁과 오독문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상황은 확실하게 끝난 게 아닙니다. 중원을 침공했던 북해빙궁의 전력은 전멸했지만 맥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소궁주가 새로이 궁주의 자리에 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리도 있고, 피해가 상당한 만큼 아직까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독문은 다릅니다.”
“중추적인 전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무당권제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오독문을 밀어내기는 했으나 가장 중요한 핵심전력을 놓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은 언제라도 다시 침공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맞습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강시가 아니라면 금세 전력을 충원하여 다시 침공해 올 수도 있습니다. 북해빙궁과 마찬가지로 본진이 건재하니까요.”
“으음!”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쳐들어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곽자량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복수를 하고 싶지만 여건이 여의치가 않았다.
두 곳 다 대략적인 위치만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마음먹고 수색한다면 못 찾을 것도 없지만 그러기에는 시간도, 인력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준비요?”
“예. 중원을 노리는 곳은 북해빙궁과 오독문만이 아니니까요.”
“아!”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갈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건지 뒤늦게 파악한 것이다.
반면에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서 만약의 사태에 미리 충분히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림맹을 결성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도 있고요.”
“정신이 없어서 거꾸러지기는 했지요.”
남궁진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워낙에 북해빙궁과 오독문의 기세가 대단해서 무림맹을 결성하지 못했었다.
그러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너무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꼭 무림맹을 결성하지 않더라도 유기적인 연락체계를 만들어 두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저희 입장은 공성보다는 수성의 입장이니까요. 물론 그러면서 전력을 빠르게 회복해야 하고요.”
“더 이상 곤륜파와 사천당가가 겪었던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른 곳들도 느끼셨겠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적들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부터 침공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으음!”
이어지는 당문경의 말에 목진자와 채중륭이 침음성을 흘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습격을 당해 큰 피해를 입은 게 바로 공동파와 종남파였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다른 문파나 세가들도 겪을 수 있었다.
“하니 그에 따른 부분을 이번에 제대로 조율을 했으면 합니다. 저희는 어떻게 보면 공동체이지 않습니까.”
“의견을 나눠보지요.”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회의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집중도를 보이며 이어졌다.
특히 북해빙궁과 오독문에게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적어도 소문이 과장되지는 않았군.’
뜨거운 열기로 진행되는 회의에도 무당권제라 불리는 혜량의 시선은 시종일관 한곳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지만 형산파의 장문인을 기도 하나로 제압하는 모습을 보자 온몸의 피가 끌었다.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호승심이 들끓었던 것이다.
동시에 소문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강해. 어쩌면 나보다도 더 강하겠는데.’
세인들이 삼제(三帝)라 하여 소림의 무제, 화산의 검제, 그리고 그를 권제라 부르며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는 그걸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셋 중 하나보다 최고, 혹은 단 한 명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무도(武道)를 궁구하는 도인으로서 과한 호승심은 삼가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도인이지만 동시에 무인이기도 했으니까.
때문에 그는 내심 삼제 중에서 자신이 가장 강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같은 선상에 있는 소림무제가 제왕검과 함께 북해빙궁주를 상대했고, 그 북해빙궁주를 벽우진이 쓰러뜨렸다고 하나 그는 솔직히 자신도 그리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벽우진이 군남생을 제압하는 걸 보는 순간 산산이 박살났다.
‘도전자라.’
이제는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위치였지만 이상하게도 혜량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벽우진을 뛰어넘고 싶다는,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는 승부욕이 불타올랐던 것이다.
스윽.
그때 벽우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듯 벽우진이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혜량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전적인 눈빛을 가득 담아서 마주봤다.
‘어차피 내가 잃을 것도 없고 말이지.’
나이로 보나 배분으로 보나 그가 아래였다.
그런 만큼 비무를 해서 패배한다고 해도 잃을 건 없었다.
이미 패선이라는 별호가 중원 전역을 떨쳐 울리기도 했고.
다만 그는 활활 불타오르는 호승심으로 인해 이곳에 오기 전 사백이 했던 말을 깜빡하고 있었다.
“그럼 이쯤에서 회의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얼추 정리가 된 듯한 느낌이군요.”
혜량이 딴 생각을 하는 사이 회의는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몇몇 이들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서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정작 자신이 꺼내기는 부담스럽다는 표정이랄까.
그러나 제갈현은 그 기색을 읽었음에도 딱히 묻지 않고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 제 45장. 화려한 복귀.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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