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47화 (147/325)

< 제 45장. 화려한 복귀. -02 >

저벅저벅.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었음에도 벽우진은 태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당문경의 옆에 떡하니 비워져 있는 자리 중 한 자리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앉았던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당문경입니다.”

“어, 그래.”

“꼭 뵙고 싶었습니다.”

“민호랑 똑 닮았네.”

중년이었을 적의 당민호가 저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흡사한 당문경의 외모에 벽우진이 살짝 놀랐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 같아서였다.

“감사합니다.”

“내가 마지막인가?”

“예.”

“좋네.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자기 집 안방인 양 너무나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은 벽우진이 주변에 앉은 이를 찬찬히 둘러봤다.

아는 얼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문인.”

“아아.”

“늦었지만 북해빙궁을 격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었던 대로 너무나 젊은 벽우진의 모습에 처음 본 이들이 놀라고 있을 때 거의 끝자리에 앉아 있던 목진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곤륜파가 북해빙궁을 물리쳐준 덕분에 빠르게 피해를 복구할 수 있었기에 그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고마워할 거 없어. 우리한테 와서 싸운 것뿐이니까.”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로 인해 본 파가 덕을 본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리 해.”

벽우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말했던 대로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된 것이지 도와주려고 싸운 게 아니었다.

때문에 벽우진은 목진자가 굳이 자신에게 감사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리 말하는데 좀 좋게 받아주면 덧나냐? 앞으로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 사이인데.”

“그건 모르는 거지. 오늘 이 자리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

핀잔을 주는 당민호의 말에 벽우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훑었다.

정확하게는 강남에 자리 잡은 무가의 주인들과 명문대파의 수장들을 찬찬히 둘러봤던 것이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이들이 반사적으로 벽우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마대전 때의 일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늦었지만, 사과드리겠습니다.”

벽우진의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기에 연판장에 서명을 했던 이들이 하나둘 사과를 해왔다.

제갈현이 말했던 대로 벽우진을 만나자 그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사과를 하는 이도 있었지만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이들도 있었다.

“역시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간사하다니까. 뒷간에 들어가기 전이랑 후가 너무나 다르잖아?”

제각각 다른 반응의 모습에 벽우진이 이죽거렸다.

급한 불이 꺼지자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은 자신이 곤륜파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사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진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물론 진심으로 사과하는 이 역시 존재했다.

그렇기에 벽우진의 심유한 시선이 몇몇 이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 시선에도 몇몇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치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이 말이다.

“당가주.”

“예, 장문인.”

벽우진의 시선이 상석에 앉아 있는 당문경에게로 향했다.

엄연히 공적인 자리인 만큼 친우의 아들이 아닌, 사천당가의 수장으로 대우해 주었던 것이다.

“당가는 사과를 받았나?”

“받기는 했습니다.”

“이렇게?”

당문경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심정은 이해하나,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기이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강남 무림 쪽에 속해 있는 수장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민감한 부분일 수밖에 없기에 이쯤에서 정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자리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고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런 만큼 많은 이들이 지금의 상황을 상당히 불편해했다.

“사과를 했으니 끝났다?”

“그런 말이 아니오라···.”

“케케묵은 일보다는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좀 더 건설적이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편한 사고방식인데. 사과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모양이야.”

혁련세가주와 공손세가주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괴팍한 벽우진이라도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어느 정도는 성격을 죽일 줄 알았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은 현 무림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천당가의 반응이었다.

‘왜 지켜보기만 하는 거지?’

혁련세가의 주인인 혁련준경이 의아한 눈으로 당문경과 당민호를 쳐다봤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벽우진을 말릴 수 있는 두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말이 너무 과한 것 같소이다.”

“과하다?”

“여기 모인 이들의 체면도 있는데, 너무 몰아붙이는 것 같소.”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군남생이 입을 열었다.

지금껏 조용히 있는 것과 달리 정면으로 벽우진에게 반박하는 모습에 방 안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내가 과하다?”

“그렇소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받아들여야 하나? 이 정도에 감지덕지하면서?”

“그런 뜻이 아니라 대인배의 아량을 보여주시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는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니. 굳이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가 있겠소이까.”

“저도 군 대협과 같은 생각입니다.”

“맞습니다. 굳이 초면에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좋은 게 좋은 것이지 않겠습니까?”

형산파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몇몇 무가와 문파들이 은근슬쩍 군남생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적당히 해라? 그만 참으라는 말로 들리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진정할 필요는 있다는 뜻이었소. 너무 흥분한 것 같아서 말이오.”

군남생이 짐짓 타이르듯이 말했다.

배분도, 무경도 벽우진이 그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군남생은 여유로웠다.

사방이 적으로 휩싸인 벽우진과 달리 그에게는 든든한 우방들이 많아서였다.

“내가 흥분했다라···.”

“과거의 일은 이쯤에서 털어내는 게 좋지 않겠소이까. 이미 흘러간 일에 연연하기보다는 미래를 함께 대비하고 준비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오.”

군남생이 그리 말하며 대범하게 웃었다.

백도무림의 수뇌부가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자리에서 나름 대인배다운 면모를 보였다고 생각해서였다.

더구나 그 상대가 벽우진이었기에 군남생은 더더욱 기꺼웠다.

‘무공이 다가 아니야.’

군남생이 벽우진을 쳐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북해빙궁을 무너뜨릴 정도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건 무공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군남생은 벽우진에게 알려줄 작정이었다.

‘아무리 개인이 뛰어나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 그래서 독불장군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고.’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 세력을 이루는 것이고.

벽우진이 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고 한들 그 역시 사람이었다.

사천당가가 함께 한다고 하지만 고작 둘만으로는 대세를 거스르기 힘들었다.

‘오늘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주지.’

이 자리에 오기 전에 군남생은 속으로 다짐한 게 있었다.

벽우진에게 그 어떤 것이라도 밀리지 않겠다고.

절대 주도권을 주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래야만 지금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차라리 다른 곳을 노리라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군남생이 벽우진을 쳐다봤다.

힘들게 구대문파의 일좌를 차지한 만큼 그는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 싫다면?”

“예?”

“아무래도 생각이 너무 다른 모양이야.”

스윽.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은 지 반 각이 채 흐르기도 전에, 찻잔에 차를 따르기도 전에 의자에서 일어나는 모습에 근처에 앉아 있던 제갈현이 벌떡 일어났다.

“자, 장문인!”

“역시 괜히 온 거 같아. 그냥 조용히 생일연만 보고 갔어야 했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생각이 다르다잖아? 근데 내가 왜 앉아 있어야 하지?”

벽우진의 싸늘한 시선이 군남생을 비롯해서 그에게 동조한 이들에게 향했다.

그 모습에 채중륭과 곽자량이 속으로 쾌재를 불렸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 속내를 완벽히 감추었다.

“생각이 다르니 더욱더 조율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부분은 저에게 맡겨주시면···.”

“빈승은 생각이 다릅니다. 나갈 사람은 벽 장문인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는 했으나 생각보다 더 격렬한 반응에 제갈현이 안절부절 못할 때 법무 대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갑자기 끼어든 것도 끼어든 것이지만 법무의 시선이 벽우진이 아니라 군남생에게 향해 있어서였다.

“방장님?”

“과거의 과오를 제대로 뉘우치지 못하는 이들과 어찌 미래를 논한단 말이오.”

군남생을 비롯해서 그 주위에 앉아있던 이들의 동공이 커졌다.

지금 법무 대사는 벽우진이 아닌 그들보고 나가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그들은 물론이고 다른 무문의 수장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나, 남궁가주!”

군남생이 비명을 지르듯 남궁진을 불렀다.

설마 하니 남궁진이 동조할 줄은 몰라서였다.

“불편한 사람이 자리를 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더구나 벽 장문인은 당가주께서 힘들게 모신 분인데 지금 나가면 저희가 내쫓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겠습니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목진자가 슬그머니 남궁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형산파를 밀어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봤을 때 벽우진의 요구는 타당했다.

그리고 만약 벽우진이 북해빙궁과 싸우지 않았고, 사천당가가 나서지 않았다면 형산파는 아직까지도 오독문의 절독에 시달리고 있을 터였다.

으드득!

하나둘 동조하는 수장들의 모습에 군남생이 이를 갈았다.

방금 전과는 상황이 너무나 달라진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단지 벽우진이 일어난 것뿐인데 말이다.

“어쩌시겠습니까?”

“···제갈가주께서도 제가 나가길 바라시는 겁니까?”

“아니요. 전 장문인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앉아 있으셔도 되고, 나가셔도 됩니다. 다만, 앉아있으시려면 장문인께서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확실했다.

때문에 군남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것이었다.

“이게··· 제갈세가의 선택입니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것 같습니다. 중원의 미래를 위해서인 만큼 이왕이면 좋게 풀고 지나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군남생에 파안대소했다.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듣게 되자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애초부터 주도권은 벽우진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중원의 미래를 위해서는 형산파와 장문인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소만. 이미 대안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대안이라기보다는 모두가 다 함께 힘을 합치는 게 좋지 않습니까. 오늘 이 자리는 그것을 의논하기 위한 자리이고요. 만약 처음부터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쳤다면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혈맹을 맺었더라도 이렇게까지 큰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갈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허둥지둥 대느라 생각보다 더한 피해를 입어서였다.

겨우겨우 정마대전의 피해를 복구한 상태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천년마교 입장에서는 기회라는 뜻이기도 했다.

< 제 45장. 화려한 복귀.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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