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45화 (145/325)

< 제 44장. 그 사부에 그 제자들. -03 >

“아무 생각 없이 나섰던 것은 맞지. 적어도 너에게 언질 정도는 주었어야지. 아니면 눈치라도 주던가.”

“눈짓도 없었고, 전음도 없었지. 저 녀석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좋아하는 여자와 마음에 안 드는 여자, 그리고 건방진 놈뿐이었지.”

북풍한설과도 같이 서늘한 당주혁의 말에 표향림이 남몰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평상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꼬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제외하면.

“내 말이. 적어도 이 연회장의 주인은 너인데 말이야.”

“오히려 곤륜파 쪽에서 내 입장을 잘 배려해 주었지. 장문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일단 검부터 뽑아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근데 그 정도로 성격이 대단하셔?”

남궁혁이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부친이야 곤륜산에서 직접 만나본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그는 아직 대면하지 못해서였다.

더불어 본가로 복귀한 후 아버지가 짧게 했던 한 마디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천외천(天外天)이라고 하셨었지.’

비록 삼제에 비해 손색이 있다는 말과 함께 오왕에 속해 있는 부친이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믿었다.

삼제라 해도 부친과의 승부에서 승리를 쉽게 점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남궁진 역시 결과는 붙어봐야 하는 것이라고도 했고.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셨던 아버지가 보는 순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하셨지.’

대결에는 변수가 수없이 많았다.

그 변수를 통제 안에 두고, 자기중심대로 과정을 만들어가는 게 바로 고수였다.

때문에 1푼이라고 승산이 있다면 결과는 붙어봐야 아는 법이라고 남궁진은 늘 말했다.

한데 그리 말했던 남궁진이 벽우진에 대해 말할 때는 순수하게 인정하는 표정을 지었었다.

“보통이 아니시지. 평소에는 참 한량이 그지없는 모습인데, 무공에 관해서는 엄청 엄하셔. 완벽주의자라고나 할까. 성격도 칼 같으시고. 호불호가 그렇게 명확하신 분도 없을 거야.”

“괴팍하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네.”

“면전에서 그 말을 하면 아마 어느 순간 땅바닥이 코에 닿아 있을 거야.”

“어, 음. 당연히 그렇게 못하지. 배분 차이가 얼만데.”

“만약에 만나게 되면 조심해. 괜히 까불거리다가 한 대 맞지 말고. 네가 남궁세가 소가주인 건 그 분께 아무런 상관이 없어. 참을 이유 또한 없고. 거슬리면 주먹부터 휘두르니까.”

진심이 담긴 당주혁의 조언에 남궁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의 절반만 맞는 말이라도 무조건 조심해야 했다.

“아마 크게 관심은 없을 거예요. 그냥 남궁세가의 소가주구나 싶을 걸요. 다음에 알아본다는 보장도 없고.”

“인정. 나도 마찬가지일 걸. 소윤이 너야 자주 보니까 아시겠지만.”

“저도 따로 뵌 적은 없어요. 늘 할아버지랑 함께 보는 거죠.”

“그게 나중에는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야. 장문인이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과거 소림무제와 무당권제와 친분이 있다고 사람들이 떠벌이고 다니는 것처럼.”

쿵!

남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묵직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구룡오화도 마찬가지였다.

“치워.”

흰자위가 보이는 채로 기절해서 바닥에 엎어진 언기준의 모습에 당주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러자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연회장에 배치되어 있던 당가의 무사들이 황급히 언기준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끝끝내 사과는 안 하고 쓰러졌네.”

“나중에 따로 받아내야지. 주고받는 게 확실한 우리니까.”

“맞아요.”

누가 사천당가 혈족 아니랄까봐 죽이 척척 맞는 두 남매의 모습에 구룡오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구룡오화 중에는 한 성깔 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럼에도 두 남매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괜히 사천당가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 듯한 모습에 다들 멋쩍게 웃기만 할 뿐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해요.”

불편한 적막감이 연회장 내에 내려앉을 때 서예지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얼이 빠져 있는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할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아뇨. 괜찮습니다. 시작은 언가 놈이 했는데요. 오히려 대응이 늦어진 점에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주혁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연회의 주인으로서 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이 그에게도 있어서였다.

더구나 다른 손님들도 아니고 곤륜파에서 온 이들이었기에 당주혁은 더더욱 미안했다.

“뒤처리는 걱정하지 마. 본가에서 확실하게 진주언가에 항의할 테니까.”

“그 전에 사부님께서 나서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래서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거야. 장문인께서 나서시면 조용히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담담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서늘하게 파고드는 당소윤의 말에 여기저기에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우진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들도 전해들은 바가 많아서였다.

“하긴.”

“장문인 성격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가만있으시겠어? 아마 진주언가의 숙소부터 날리지 않을까 싶은데.”

당소윤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보아온 벽우진의 성격을 떠올리면 그러고도 남았다.

이곳이 사천당가라고 해도 말이다.

더구나 실수는 진주언가 측이 먼저 하기도 했고.

“그래도 말을 안 할 수는 없어요.”

“그 전에 마무리 지을 게. 그러니까 같이 가자. 이왕이면 할아버지와 함께.”

서예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천당가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어서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세간의 인식도 신경 써야 했다.

다시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자자, 다시 음악 틀어!”

한 사내의 욕심으로 인해 벌어진 갑작스러운 소동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자 당주혁이 박수를 쳤다.

잠시 멈춰진 연주를 다시 시켰던 것이다.

이윽고 아름다운 운율과 함께 착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흔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기에 다시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육룡방의···.”

“백도문의 조형일이라고 합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소란이 가시기 무섭게 서예지의 곁으로 수많은 귀공자들이 모여 들었다.

미모도 미모지만 언기준을 앞에 두고도 일절 긴장하지 않는 강단 있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호감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서예지만큼은 아니지만 언기준을 가볍게 상대했던 도일수에게도 몇몇 여인들이 관심을 보였다.

일단 패선이 제자라는 점에서 합격점을 주었던 것이다.

‘시끄럽네.’

도일수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또래들과 함께 어울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서예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기에게 다가온 이들의 검은 속셈을 그녀는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이미 수도 없이 겪은 일이기도 했고.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은 모여든 이들의 신분이 확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잠시만요.”

강호에서도 명망 높은 가문과 명문대파 출신의 후기지수들이 어떻게든 그녀의 환심을 사고자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뜨리고 있을 때 한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등장에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남자들이 쓴웃음을 삼키며 좌우로 벌어졌다.

지금 서예지에게 말을 건 이가 다름 아닌 구양검이었기 때문이다.

구룡 중에서도 상위권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비록 오대세가에는 들지 못했지만 십대세가를 꼽으면 반드시 들어가는 구양세가 적자의 등장에 후기지수들이 하나같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구 소협.”

“반갑습니다, 민 공자.”

서예지에게로 걸어가는 동안 많은 이들이 그에게 알은척을 해왔다.

물론 그 중에 구양검이 기억하는 이는 손에 꼽았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기에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이가 아니며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하하! 나중에 식사라도 한 끼 같이 하시죠!”

“그러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서 대꾸한 구양검이 드디어 서예지의 앞에 섰다.

제법 많은 인파를 가로지르고서야 그녀에게 도착했던 것이다.

“이제야 다시 뵙네요.”

“무슨 일이시죠?”

오로지 자신만 직시하며 성큼성큼 다가온 구양검을 향해 서예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인사는 아까 전에 충분히 한 걸로 알고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구양검과 따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꼭 일이 있어야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이유 없이 서 소저를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요.”

구양검이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여유가 한껏 깃들어 있었다.

“이유요?”

“예. 서 소저와 따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관계를 진척시킴에 있어 대화는 절대적인 부분이니까요.”

“······.”

서예지가 미간을 좁혔다.

설마하니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런데 구양검은 그런 그녀의 반응조차도 귀엽다는 듯이 싱긋 웃고 있었다.

“친해지고 싶거든요. 서 소저랑.”

생글거리는 얼굴로 구양검이 훅 들어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장난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여유 있으면서도 진지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보통의 여인이었다면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을 터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이해합니다. 관계는 한 쪽이 강요하면 안 되는 것이니까요. 다만 저는 제 솔직한 마음을 꺼내 보인 것뿐입니다. 무인으로서도 서로에게 큰 도움과 자극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언기준과 다릅니다.”

구양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뇌와 눈에 근육만 찬 언기준과 달리 그는 안목이 있었다.

적어도 상대를 제대로 볼 줄은 알았던 것이다.

“무슨 뜻이죠?”

“저희는 서로에게 좋은 대련 상대가 될 것 같은데, 아닌가요?”

구양검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서예지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익힌 처세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니까.

“기회가 생긴다면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습니다.”

구양검이 눈을 빛냈다.

대련한다는 핑계로 단 둘이 오붓하게 있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그리고 그 시간은 자신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할 터였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단 말이지.’

구양검의 시선이 빠르게 서예지를 훑었다.

오화라 불리는 여인들은 외모만 뛰어나지 않았다.

무공 역시 동 나이 대에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무인이라기보다는 곱게 자란 규수와도 같았다.

‘그러나 서 소저는 달라.’

무공을 익힌 양갓집 규수와 같은 분위기의 오화들과 달리 서예지는 미모도 미모지만 누가 봐도 무인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기도를 뿌렸다.

잘 정련된 검객과도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분위기도 독보적이었다.

거기다 신분 역시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하북팽가가 무너지고 황보세가가 예전 같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본가가 치고 올라갈 때다.’

구양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처음에는 미모, 두 번째는 분위기에 호감을 느꼈다면 세 번째는 현재의 상황이 그를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청해성 제일가는 상단의 금지옥엽이자 어쩌면 당대의 천하제일인에 제일 가까운 무인의 제자가 서예지였다.

그 말은 서예지를 품에 안으면 청하상단과 패선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패선의 영향력이라면, 가능하다.’

< 제 44장. 그 사부에 그 제자들.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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