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44화 (144/325)

< 제 44장. 그 사부에 그 제자들. -02 >

거한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볼일 없었던 녀석이 명문세가 출신인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고 말을 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패선의 제자라는 신분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할 녀석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기분 나쁜 것은 이 모든 상황을 표향림이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확실하게 보여줘야 해.’

그가 나선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여인이 냉대를 받는 모습에 열불이 뻗쳐서 나선 것이었다.

더구나 강호는 무력이 곧 법이기도 했고.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었다.

“지금까지의 언행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예.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순간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데. 내 나이와 신분이라면 충분히 이래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그리고 먼저 무례를 범한 쪽은 저 쪽이다.”

거한의 시선이 서예지에게로 향했다.

지금의 발단은 바로 그녀에게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만.”

“그건 네 생각이고. 중요한 건 내 생각이지.”

“······.”

뜻을 꺾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분한 거한의 모습에 도일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말로는 해결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해. 일단 내 앞에서 비키고, 표 소저에게 저··· 여자가 사과를 하는 거다.”

거한이 도중에 말끝을 살짝 흐렸다.

마음 같아서는 저 계집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이 연회장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당주혁이 함께 있었기에, 또한 손님 자격으로 서예지가 참석한 것이었기에 가까스로 호칭을 바꿨다.

패선의 제자들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만 당주혁은 달랐다.

전통의 강호이자 늘 오대세가의 수좌를 차지하고 있던 남궁세가를 뛰어넘을 지도 모르는 게 현재의 사천당가였기에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실례를 저질렀으니까.”

“만약 제가 사과한다면, 당신도 우리에게 사과할 건가요?”

“내가 왜?”

거한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반문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어서였다.

그 모습에 서예지는 물론이고 도일수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종일관 억지만 부리고 있어서였다.

“당신도 우리에게 무례를 저질렀으니까요.”

“아니. 다르지. 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나선 것뿐.”

“억지군요.”

“억지가 아니다. 맞는 말이지. 그러니 얼른 표 소저에게 사과해라.”

거한이 퉁방울만 한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기세까지 실린 그의 안광에도 서예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는 못하겠네요.”

“뭐라고?”

휘익.

서예지는 더 이상 대화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와, 억지를 부리는 이와 대화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어서였다.

더구나 예의를 차리지 않는 이에게 굳이 예의를 지킬 생각도 없었다.

“이 계집년이···!”

“말조심해라. 네가 그딴 식으로 불러도 되는 분이 아니니.”

“뭐, 뭐?”

언기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시하는 서예지도 서예지지만 곧바로 반말을 하는 도일수의 모습에 극도로 흥분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언기준의 큼지막한 콧구멍에서 연신 뜨거운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이 새끼가!”

언기준이 주먹을 날렸다.

폭급한 성격을 오늘도 여지없이 드러내며 도일수를 향해 대뜸 주먹을 날렸던 것이다.

그 모습에 장내에 있던 모든 이가 놀랐다.

설마하니 언기준이 다짜고짜  주먹을 내지를 줄은 몰라서였다.

스윽.

그러나 더 놀라운 광경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기습과도 같은 일권을 도일수는 너무나 쉽게 피해냈던 것이다.

솥뚜껑만한 언기준의 주먹을 도일수는 고개만 살짝 꺾는 것으로 피해냈다.

“지금부터는 정당방위야.”

“어?”

도일수의 얼굴에 싸늘한 기색이 서렸다.

다짜고짜 주먹질부터 하는 모습에 언기준이 자신을 비롯해서 사형제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럴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서 벽우진은 분명하게 말했었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절대 참지 말라고.

‘수습은 생각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지.’

퍼어억!

고개만 까딱여서 언기준의 주먹을 피한 도일수가 발을 들어 찍어 찼다.

훤히 열린 언기준의 복부를 향해 시원스러운 앞차기를 날렸던 것이다.

“커헉!”

발바닥으로 찍어 차는 깊숙한 일격에 언기준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동시에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싸움에 모두가 놀란 것이었다.

“공력 안 실었어. 일어나.”

“크헝헝!”

거구의 언기준이 울부짖었다.

언제 바닥을 굴렀냐는 듯이 노호성을 터트리며 사납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진짜로 도일수를 죽이겠다는 듯이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위험···!”

그 살벌한 기세에 주위에 있던 몇몇 후기지수들이 당혹성을 토해내며 소리쳤지만 그보다 언기준의 쇄도가 먼저였다.

마치 맹수처럼 도일수에게 짓쳐들었던 것이다.

스륵.

하지만 그 맹렬한 움직임에도 도일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얼굴로 검집 채 검을 잡았다.

좋은 날 피를 보는 건 아니었기에 검을 뽑지는 않았던 것이다.

“죽여 버리겠다!”

흉흉한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언기준이 연신 양주먹을 휘둘렀다.

진주언가권(晋州彦家拳)의 절초들이 연거푸 뿌려지며 도일수의 전신 사혈을 노렸다.

도일수를 진짜로 죽이겠다는 듯이 치명적인 살초만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살벌한 공격에도 정작 도일수에게 닿는 것은 없었다.

“느리네.”

“이 자식이 감히···!”

도일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남들이 보기에는 속절없이 밀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저 후기지수의 수준을 살펴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천당가의 잔치에 초대받을 정도의, 전통 있는 명문정파 후기지수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허접하기까지 해서 실망스러운데.”

“크아아앙!”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도일수의 모습에 언기준이 이성을 잃었다.

더욱 거칠고 사납게 쌍권을 휘둘렀다.

어떻게든 한 방만 먹이면 된다는 생각에, 그 다음은 일사천리라고 생각했기에 일단은 한 방만 맞으라는 식으로 두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공격은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강력해보일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제 살 파먹기였다.

동작이 큰 만큼 체력 소모 역시 극심했던 것이다.

푹.

더구나 제자들 중에 가장 경험이 많은 도일수에게는 더더욱 그 빈틈이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도일수에게 몸소 가르침을 내려주는 이는 벽우진이었다.

“큭?!”

전방을 가득 채우는 두 주먹 사이의 작은 빈틈으로 파고들어 심장을 찌르는 검 끝에 언기준이 움찔거렸다.

조금만 세게 찌르면 단숨에 절명할 수 있는 치명적인 부위가 바로 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기준은 반사적으로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죽은 거 알지?”

“감히 버러지 따위가!”

도일수의 이죽거림에 언기준이 포효했다.

운 좋게 한 번 성공한 것으로 마치 자신이 아래인 양 쳐다보는 게 참을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도일수의 공격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애초에 이대로 끝내기 싫은 건 도일수도 마찬가지였다.

퍼퍼퍽!

그리고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이미 충분히 눈에 익었기에 도일수는 언기준의 공세를 모조리 피해내며 검을 휘둘렀다.

검집에 들어가 있는 검을 몽둥이처럼 사용하며 언기준의 거구를 말 그대로 두들겼던 것이다.

묘하게 박자감이 있는 매타작에 주위에 있던 후기지수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허!”

“저게, 말이 되나?”

“패선의 제자들은 무공을 익힌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기준이라면 구룡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 실력을 인정 받는 후기지수였다.

구룡은 힘들더라도 그 언저리에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후기지수 중 상위 스무 명 정도를 꼽으면 반드시 들어가는 이 중 한 명이었다.

본가가 있는 진주에서는 단연 손꼽히는 후기지수이고.

그런데 그 언기준이 도일수에게 두드려 맞고 있었다.

“쯧쯧! 저렇게 보는 눈이 없어서야.”

반대로 당소윤은 두들겨 패는 소리를 제외하면 적막감이 내려앉은 연회장에서 크게 혀를 찼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녀는 왜 언기준이 도일수에게 달려들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잘 알았다.

도일수의 경지가 보이지 않으니 자기보다 못할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덤벼든 것이 분명했다.

그 결과는 지금 모두가 보고 있는 그대로이고.

“다행스럽게도 손속에 사정은 두는구나.”

“정말 다행이죠. 장문인이셨다면 일단 사지부터 분질러 놓았을 텐데.”

“···설마.”

당주혁이 흠칫하며 대답했다.

아무리 막 나가는 벽우진이라도 친구 생일잔치에 그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당소윤은 고개를 저었다.

“장문인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세요. 죽이지는 않으시겠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걸요. 얼마나 성격이 단호하신데.”

“컥! 켁! 끅! 읍!”

당소윤과 당주혁이 대화를 하는 사이에도 매타작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금방 끝낼 수 있음에도, 그만한 격차가 나는데도 도일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가히 폭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언기준을 두들겨 팼다.

“조금 심한 거 같은데···.”

“하면 변 공자가 말리겠소?”

“으음!”

지극히 차분한 신색으로 언기준을 짓밟는 도일수의 모습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일단 폭급한 성격 덕분에 언기준과 친한 이가 드물었을 뿐더러 명분은 도일수와 서예지가 가지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이곳의 주인은 따로 있기도 했고.

“덩치에 비해 엄살이 심한데.”

“이 노옴···!”

멍투성이가 된 얼굴로 언기준이 노성을 터트렸다.

반격다운 반격은 하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 것과 달리 아직은 두 눈이 힘이 실려 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작 이 정도에 신음을 흘리는 것을 보면.”

빠각!

도일수의 발끝이 언기준의 정강이를 때렸다.

검집으로 때릴 것처럼 하면서 실질적인 공격은 발로 했던 것이다.

“끄윽!”

정강이에서부터 시작된 찌르르 울리는 고통에 언기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독한 고통에 순간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도일수는 놓치지 않았다.

퍼퍼퍼퍽!

비 오는 날에 먼지 나도록 팬다는 속담처럼 진짜 시원스럽게 두들겼던 것이다.

지켜보는 이가 섬뜩할 정도로 말이다.

“마지막 기회다. 사저께 사과해라.”

“시, 실타!”

“그렇다면야.”

입술이 불어터져서인지 새는 발음으로 대답하는 언기준의 두 눈에는 아직도 악이 서려 있었다.

이렇게까지 당했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단한 건 도일수였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도일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매타작을 이어갔다.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광경에 언기준과 그나마 친분이 있던, 구룡 중의 일인 황보추가 조심스럽게 당주혁에게 말했다.

이쯤에서 수습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다른 날도 아니고 사천당가 태상가주의 생일연이었다.

유혈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사태는 썩 좋지 않았다.

“내가 왜 말려야 하지?”

“예?”

“무시를 당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황보추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정말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웃긴 건 주변에 모여 있는 이들의 반응이었다.

< 제 44장. 그 사부에 그 제자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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