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43화 (143/325)

< 제 44장. 그 사부에 그 제자들. -01 >

기분 좋은 성도 나들이를 끝마치고 전야제 할 수 있는 연회에 초대 받은 서예지는 시종일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연회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별의 별 남자들이 그녀에게 치근덕대고 있어서였다.

“정말 장난 아니네요.”

“너도 만만치 않은 거 같은데?”

“그래도 사저만큼은 아니에요.”

심대혜가 머쓱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녀도 나름 미인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청해일미라 불리던 서예지하고는 비교할 수 없었다.

더구나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적었다.

“면사라도 쓸 걸 그랬나.”

“쓴다고 해서 달라질까요?”

“더 티가 나겠지?”

“써도 알아볼 거예요.”

서예지가 입맛을 다셨다.

동시에 후기지수라는 이들이 참으로 많이 살아남았다는 생각도 했다.

어디 가문의 자제다, 어느 무문의 일대제자다 등등 온갖 후기지수들이 인사하러 찾아오니 전쟁을 치렀다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정작 피를 흘린 이는 다른 곳에 있겠지.’

어떻게든 자신에게 다가와 말 한 번 섞어보려는 승냥이 같은 남자들이 주변에 수두룩했다.

미모도 미모지만 현재 한창 중원을 떨쳐 울리는 패선의 제자라는 것도 그녀에게 몰려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자고로 강자와 친분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의외로 일우 오빠나 동생들은 인기가 없네요. 똑같이 사부님의 제자들인데.”

“실질적으로 무공을 배운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활약을 했다고 하지만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고.”

“그래도 너무 관심이 없는데요. 다들 사저에게만 관심이 있고.”

“다행스럽게도 여자들은 나에게 안 오잖아.”

“나란히 서 있으면 비교되잖아요. 대신 질투의 눈빛은 가득한 걸요.”

심대혜가 빙그레 웃으며 눈짓으로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하나같이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을 말이다.

그러나 수수한 도복 차림의 서예지보다 그녀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목숨 걸고 치장했음에도 서예지의 미모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매가 내 옆에 있다는 건 그만한 자신감의 표출이겠지?”

“저도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신감 좋네. 아주 좋아.”

서예지가 옅게 웃었다.

처음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아서였다.

바닥을 치던 자존감이 쑥쑥 자라나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아이였고.

“역시 사마세가는 보이지 않네요.”

“초대할 이유가 없지. 괜히 동맹이 아닌데. 얼굴에 철면을 깔고 왔어도 사부님이 가만히 계셨겠어?”

“아마 굴욕이라는 굴욕은 다 주지 않았을까요.”

“살아있는 게 더 힘들다는 걸 몸서리치게 느꼈겠지.”

“여기 있었네.”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서예지 역시 연회장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인원이 상당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였다.

혹시나 사마세가의 사람들이 와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당 소저.”

“어때? 우리 집에서 마련한 연회장이.”

“화려하네요.”

직설적인 당소윤의 질문에도 서예지는 당황하지 않았다.

원래 성격이 이런 걸 알고 있기도 하거니와 당소윤과는 나름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낯설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소윤이 불편하다면 모를까.

“인기가 장난 아니던데?”

“당 소저도요.”

“나야 여기 주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손님들이 모일 수밖에. 기본 예의라는 게 있으니까. 그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어?”

“······.”

서예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묵묵부답에도 당소윤은 조금도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혼담 많이 들어온다고 들었거든.”

“당 소저도 많이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야 뭐, 늘 그랬고. 다만 아직은 생각이 없을 뿐. 그리고 나랑 결혼하려면 데릴사위로 들어와야 하잖아.”

“저도 생각 없어요.”

서예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음식을 탐하고 있는 사제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후기지수들에 관심을 보였지만 지금은 다들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르친 대로 기품 있는 식사예절을 선보이면서 말이다.

“하긴. 아직은 어리니까.”

“많이 어리진 않아요. 당 소저랑 두 살 차이니까요.”

“그런데 꼭 그렇게 딱딱하게 예의를 차려야겠어? 이제는 편하게 말해도 되잖아.”

“저는 이게 편해요.”

손가락을 대면 베일 듯한 날카로운 단호함에 당소윤이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슷한 또래이기에 자신도 할아버지처럼 서예지와 친근한 사이가 되고 싶은데 상대방은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였다.

‘내가 뭐 잘못했나?’

당소윤이 곰곰이 과거를 곱씹었다.

하지만 딱히 서예지나 다른 아이들에게 실수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대련을 자주 했기에 함께 보낸 시간은 많은 편이었고.

‘대체 왜 그러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가?’

당소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신은 친해지고 싶은데 서예지는 아닌 것 같아서였다.

심대혜야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처음부터 자연스러웠고.

하지만 일정 선을 넘지 않는다는 점에서 거리를 두는 건 비슷했다.

“음식은 어때? 봉문 후 처음으로 여는 큰 행사라 진짜 많이 신경 썼는데.”

“맛있어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요. 아이들도 잘 먹고 있고요.”

“진짜 맛이었어요!”

“완전 꿀맛이에요!”

“후식이 많아서 행복해요. 헤헤헤!”

묻기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빠른 속도로 음식들을 비우던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던 것이다.

특히 과일류가 가장 빠르게 비워지고 있었다.

“다행이네. 숙소는 어때? 할아버지께서 특히 신경 써서 배정했는데.”

“저희는 물론이고 사부님도 만족스러워 하세요. 일단은 조용하니까요.”

“그 부분에 가장 큰 중점을 두었지. 일단 본가에서 가장 중요한 손님이기도 하고. 아마 지금쯤 아빠를 만나고 계실 거야. 근데 진 호법님은?”

“별채에 혼자 계세요.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래?”

당소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벽우진을 보좌해도 모자랄 판에 혼자 있다고 하자 약간 이상했던 것이다.

“생각이 많으셔서 그래요. 요즘 제자 문제로 고민이 깊으시거든요.”

“아하.”

진구의 성격 상 고민하는 모습이 쉽게 연상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사람이었다.

고민이 없을 리가 없었다.

또한 호법들에 대해서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알고 있는 당소윤이었기에 더 이상 깊게 묻지 않았다.

한편 당소윤이 서예지와 함께 있자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인 당소윤이 스스럼없이 다가가 대화를 나누자 다들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냈던 것이다.

게다가 셋 다 미녀들이었기에 자연스레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되기도 했고.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말 걸 기회를 노리던 남자들이, 은근슬쩍 접근하던 이들이 썰물처럼 물러났다.

사천당가의 소가주인 당주혁이 후기지수들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구룡오화들을 이끌고서 세 여인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특히 당주혁은 연회장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서예지에게 인사했다.

“음식은 좀 입에 맞으십니까?”

“이미 내가 물어봤어.”

“아, 그래?”

당소윤의 말에 당주혁이 무안한 듯 웃었다.

너무 진부한 질문을 던진 것 같아서였다.

“둘째 오빠는?”

“관심 없다고 수련 중이다. 어떻게든 날 이겨먹겠다고.”

“또 폐관에 들어간 거야?”

“그건 아니고 연공실에서 개인 수련. 내일 아침에는 나올 게다. 할아버지를 봐야 하니까.”

대답하며 당주혁이 주위를 슥 훑어봤다.

연회장에 들어오면서부터 느끼긴 했지만 확실히 이곳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것도 남녀를 불문하고 말이다.

‘확실히 대단한 미녀이기는 하지. 오화(五花)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미모이니까. 분위기도 남다르고 말이지.’

예전에는 무위로 인해 상대적으로 하향된 평가를 받았던 서예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소윤에 필적할 정도로 무공에도 물이 올랐기에 오화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후기지수가 서예지였다.

‘후후후!’

그 사실을 증명하듯 구룡이라 불리는 이들조차도 서예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함께 있는 오화도 아름답지만 서예지도 그 못지않자 다들 놀란 것이다.

게다가 패선의 제자였기에 더더욱 집중된 시선을 받았다.

툭.

“아, 소개해 드리는 걸 제가 깜빡했군요. 여기 서 소저는 청해성 청하상단의 금지옥엽이자 곤륜파 장문인의 첫 번째 제자십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는 구룡오화의 시선을 지켜보고 있을 때 당소윤이 팔꿈치로 큰오빠의 옆구리를 때렸다.

지금은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어서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예지입니다.”

“양일우입니다.”

“양이추라고 합니다.”

서예지에 이어 아이들이 차례대로 포권을 했다.

먹는 걸 멈추고 구룡오화와 인사를 나누었던 것이다.

“반갑습니다. 남궁세가의 남궁혁입니다.”

“안 그래도 만나 뵙고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기회가 닿게 되네요. 구양세가의 구양검입니다.”

아이들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구룡오화도 차례대로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반가워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못마땅해 하는 이들 역시 존재했다.

남몰래 구양검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던 표향림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형산파의 제자였기에 더더욱 서예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그만 이동하죠. 반가운 얼굴들이 많은데.”

“맞아요. 너무 한곳에만 있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요. 더구나 당 소협께서는 다른 분들도 신경 쓰셔야 하잖아요.”

갑자기 등장한 서예지로 인해 다섯 명의 여인들이 똘똘 뭉쳤다.

미모로는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그녀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서예지의 외모는 위협적이었다.

더구나 한창 무림을 뜨겁게 달구는 패선의 제자였기에 그녀들은 이 자리가 불편했다.

늘 주인공이었던 그녀들이었기에 새로운 미녀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우리까지 함께 이동할 필요도 없고 말이지.”

동갑내기인 남궁혁이 당주혁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나이도 같지만 이름도 끝자리가 같기에 처음 본 순간부터 둘은 친해졌고, 지금은 죽마고우나 마찬가지였다.

가문은 선의의 경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맞습니다. 어차피 어디에 있는 사람들이 다 몰릴 텐데요.”

구양검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구룡에 뽑히고 나서 어느 곳을 가든 늘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그런 만큼 꼭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저희들이 불편하다면요?”

“예?”

그때 서예지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예전이었다면, 벽우진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이 자리 자체를 영광이라 생각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들과의 인연이 아니라 사제들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구룡오화의 등장으로 장내의 시선들이 모조리 쏠리자 다들 당황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말이 좀 심한 것 같은데.”

저벅저벅.

갑자기 집중된 수많은 시선에 막내인 심소혜가 체한 듯 얼굴이 하얗게 변했을 때 근처에 있던 거구의 장한 한 명이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구룡오화가 관심을 보여주면 감사해하지는 못할망정 이쯤에서 축객령을 내리니 그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패선의 제자라고 하나 그렇다고 저들이 패선인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후기지수로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거한은 무서운 얼굴로 서예지에게 다가갔다.

“그쪽이 낄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라고?”

“저희들끼리 대화 중이지 않습니까.”

서예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거한을 향해 도일수가 조용히 막아섰다.

위협적인 접근에 그가 먼저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신경을 건드린 모양인지 거한이 인상을 썼다.

“사부가 패선인 게 벼슬이라도 되는 모양이군.”

“부럽다면 부럽다고 하시죠. 그렇게 비비 꼬아서 말하지 말고. 그리고 그 전에 예의부터 차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만.”

“허!”

< 제 44장. 그 사부에 그 제자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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