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42화 (142/325)

< 제 43장. 패선 입성. -03 >

곽자량이 흠칫했다.

가만히 말을 들으니 불길한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채중륭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앞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제 말은 두 문파를 이간질시키자는 게 아닙니다. 그런다고 한들 싸움이 되겠습니까. 거리도 상당하고, 명분도 약한데.”

“그렇긴 하지요.”

곽자량이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문파를 이간질시키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높아서였다.

특히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 곤륜파를 적으로 돌리는 건 너무나 위험했다.

‘도사답지 않게 패도적이다 못해 꼴통이라는 말까지 있으니.’

벽우진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들리는 말은 많았다.

난세의 영웅이라느니 호걸이라느니 하는 칭송도 많았지만 반면에 성격이 이상하다는 소문 역시 늘 따라다녔다.

일반적인 도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패선이어서였다.

‘소림무제도, 그리고 제왕검도 어쩌지 못한 북해빙궁주를 일대일로 쓰러뜨린 존재니까.’

모두가 쉬쉬하고 있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현재 중원에서 가장 강한 자를 꼽으라면 패선이 반드시 들어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무당권제 역시 건재하지만 그렇다고 패선보다 강하다고 장담하는 이는 적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살짝만 조성한다면 상황이 흥미롭게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흥미롭게라.”

“둘 다 서로를 견제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세력적인 부분으로 보면 형산파가 우세하지만 대표 고수를 생각하면 곤륜파가 위지요.”

“서로가 서로를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는 하죠.”

곽자량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곤륜파 입장에서는 형산파가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자리를 형산파가 빼앗아간 셈이니까.

“그러니 자연스레 틈이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작았던 균열이 이내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두 곳이 치고 박고 싸우면 그리 될 가능성이 높지요.”

“지금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혼란입니다. 체계가 잡히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체계가 확실하게 잡히기 전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단 아홉 개 뿐인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채중륭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반드시 그 의자를 차지하겠다는 의지가 그의 두 눈에서, 표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둘 중 어느 곳이든 상관없지요. 하나만 떨어져 나간다면.”

“예상치 못한 곳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고 말이죠.”

채중륭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에 곽자량 역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번잡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별채에 자리 잡은 벽우진은 3층의 방을 사용했다.

가장 높은 방이자 3층에서 딱 하나뿐인 방을 그가 사용했던 것이다.

물론 벽우진이 결정한 것은 아니고 제자들의 의견이었다.

“난 딱히 상관없는데 말이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탁 트인 전경을 응시하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저 멀리 사천당가 소속의 하인, 하녀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벽우진의 시선은 그들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시선은 전방에 향해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단전, 상단전이라.”

근래 들어 벽우진이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바로 하나였다.

어떻게 하면 초대 곤륜파의 장문인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진짜 신선이셨던 것은 분명해. 그리고 상단전을 열었던 것도 확실하고. 하지만 연다고 해서 다가 아니지.”

하단전은 무림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인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사용하는 것일 뿐 하단전을 제대로 활용하는 이는 손에 꼽았다.

그 손에 꼽은 이들이 현재 무림에서 고수이자 강자로 불리고 있고.

“시조께서 살아계실 적에는 진짜 신선들이 존재했을 테지.”

누군가는 말한다.

현재가 무림의 최전성기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은 언제나 늘 있었고, 전체적으로 따져봤을 때 진보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건 평균적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예 사라졌지.”

최상위층을 보면 얘기가 달라졌다.

가까운 예로 곤륜파의 시조 때만 하더라도 신선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보패라고도 불리는 신병이기들 역시 실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검과 명기들은 존재하지만 신병이라 할 만한 것들은 없었다.

“최소한 시공간의 진은 만들고 싶은데.”

누구에게는 꿈만 같은 경지에 닿아 있었지만 벽우진은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까지 왔기에 더욱더 높은 곳에 오르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기만 당할 수는 없다는 이유도 존재했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 그 좋은 걸!”

벽우진이 느닷없이 소리쳤다.

심지어 주먹도 불끈 쥐고서 하늘을 향해 거칠게 내질렀다.

물론 뒷말에는 조금의 진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뭐, 안전장치로는 확실하니까.”

당한 사람은 분기탱천할 수밖에 없지만 후대를 위해서라면 확실히 좋은 방법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흐르기에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진 자체의 힘이 약해지거나 흐트러지지 않았으니까.

만약 시조가 만들어둔 시공간의 진이 없었다면 지금의 벽우진도 없었고, 곤륜파도 없었을 터였다.

청민의 대에서 자연스럽게 끊어지며 곤륜파는 역사에만 남았을 터였다.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해?”

“넌 문도 안 두드리냐?”

“나 오는 거 알고 있었잖아?”

“여기는 곤륜산이 아냐.”

“밖에서는 기감이 반으로 뚝 떨어지냐? 둔해져?”

당민호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헛웃음을 흘렸다.

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나 당연하게 잘하는 것 같아서였다.

“밀도가 다르잖아, 밀도가. 이 좁은 장원 안에 천 명이 넘는 인원이 있는데. 당가타까지 합치면, 어후.”

“여기가 좁다고? 오대세가 중에서 규모랑 면적만 따지면 우리가 제일 큰데? 공방도 있고.”

당민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수 규모만 따지면 남궁세가보다도 더 큰 게 사천당가의 장원이었다.

괜히 요새나 성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곤륜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

“···그건 그러네.”

자존심과도 연관된 부분이었기에 발끈하던 당민호가 순간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교대상이 곤륜산이라면 사천당가의 본가도 작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좁은 공간에 수많은 인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정신사납다.”

“그래도 난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워낙에 내 경지가 높아서 말이지.”

“지금은 준할 만한 이들이 꽤 되던데?”

“뭐야? 둔해진 거 아니잖아?”

“정신사납다고 했지 둔해졌다고는 말 안 했는데?”

특유의 빈정거림에 당민호가 못 당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벽우진은 벽우진이었다.

“소림무제는 물론이고 무당권제도 왔으니까. 남궁세가주 역시 왔고.”

“그들만 온 게 아닌 거 같은데? 구파일방 오대세가는 다 온 것 같구만.”

“맞아. 그리고 그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바로 너고.”

“그래서 날 이곳에 처박아 둔 거냐?”

벽우진이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는 자신을 배려한 것도 있겠지만 차단시키려는 의도 역시 있을 게 분명해서였다.

“처박아두다니. 잠시 피신시켜 준 건데. 너 손님 많이 찾아오면 귀찮아 할 거잖아.”

“그래도 나름 궁금하기는 해. 강북 쪽 실세들은 한 번씩 만나봤지만 강남 쪽은 아니니까.”

“강남 쪽 실세는 네 눈앞에 있잖아?”

“아직은 아니지. 무당권제가 건재한데. 구파일방을 제외하더라도 제왕검이 떡하니 제 자리를 지키고 있고.”

벽우진이 놀리듯이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아직은 멀었다는 의미였다.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지금이라면 할 만하다고 생각하거든.”

“당가주가?”

“응. 멀쩡한 제왕검이라면 힘들겠지만 왼팔을 잃은 제왕검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흐음.”

벽우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곤륜산에서 본 남궁진은 사실 위태위태해 보였었다.

아무래도 한쪽 팔을 잃은 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벽우진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왜? 아닐 거 같아?”

“곤륜산에서 만난 이후로 다시 보지 못해 확신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만만하게 봤다가 큰 코 다칠 걸? 잃어야만 얻게 되는 것도 있으니까.”

“음?”

당민호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반문했다.

진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뭐, 네 말마따나 만만해졌을 수도 있고.”

“의뭉스럽게 말을 하다 마는 것은 뭐야? 할 거면 다 하지.”

“내가 신인가. 나도 몰라. 그냥 예상만 하는 거지.”

“그 예상을 말해보라고.”

당민호가 닦달했다.

평소 본가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친구이기에 드러내는 모습이기도 했다.

“안 해. 틀리면 쪽팔리니까.”

“참나.”

“그리고 제왕검은 봤지만 네 아들은 못 봤잖아.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 암.”

“안 그래도 내일 저녁에 보게 될 거다. 내 아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현재 이곳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다 모여 있는 건 알지?”

당민호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그러나 벽우진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자랑하는 거냐? 네 생일잔치에 특급 거물들이 다 모였다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다들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할 말? 오독문?”

“그 문제도 있고, 정확하게는 구대문파에 대해서지. 자리는 아홉 개지만 현재 거론되는 문파는 열 군데이니까.”

“호오. 나도 껴주는 거야?”

벽우진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이런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짐작 못했어?”

“솔직하게 말하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고나 할까. 난 그냥 초대장 받아서 온 건데.”

“···그럼 오늘 서운한 것도 없겠네?”

“뭘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고 살아. 청범이라면 모를까 난 그런 거에 관심 없어. 아, 녹의대주 덕분에 편하게 들어온 건 좋았어. 솔직히 기다릴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정문에서 봤던 그 긴 줄을 떠올리며 벽우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루 종일 기다린다고 한들 순서가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였다.

“이해해주니 고맙네. 문경이가 요즘 정말 바쁘거든. 워낙에 대단한 인사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도 정신없었고.”

“전체적으로 그래 보여.”

벽우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늘어지게 누워서 손을 휘저었다.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온 것만으로도 그는 정말 만족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마중을 나가고 싶었는데···.”

“그럼 더 큰 소란이 일었겠지. 오히려 잘 했어.”

“근데 초대장은 왜 꺼낸 거야?”

“당연히 보여줘야 하는지 알았지. 내가 뭐 어디 돌아다닌 경험이 있나? 처박혀 있는 경험만 있지.”

당민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벽우진은 사천성에 온 것도 처음이었다.

나이는 그와 동갑이었는데 말이다.

“오전에는 구경 좀 시켜주마. 의외로 볼거리가 많아.”

“제자들도 함께?”

“당연하지. 애들도 성도는 처음일 거 아냐?”

“돈도 네가 책임지는 거냐?”

벽우진이 눈을 반짝였다.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게다가 성도의 주인이라 불리던 사천당가 아니던가.

하루 얻어먹는다고 당민호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지는 않을 터였다.

“걱정마라. 손님에게 돈 쓰게 만들 정도로 우리 형편이 안 좋지 않으니까.”

“좋았으!”

“한 번은 제대로 구경시켜 주고 싶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는 여전히 동맹관계잖아?”

크게 기뻐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당민호 역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친구가 기뻐하니 그도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더불어 은근슬쩍 자랑도 하고.

< 제 43장. 패선 입성.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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