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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141화 (141/325)

< 제 43장. 패선 입성. -02 >

태상가주의 생일연으로 외당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태상가주의 생일이었기에 찾아오는 손님들만 하더라도 엄청났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봉문했던 가문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모습에 성도의 모든 사람들이 신기한 듯 사천당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 분위기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이들 역시 존재했다.

또르륵.

세 사람이 모여 있었지만 들리는 소리라고는 차를 따르는 소리 밖에 없었다.

무거운 고요가 방 안을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창문 역시 단단히 닫혀 있었기에 더욱더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다들 고민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상황이 너무나 많이 달라졌으니.”

이번에 새롭게 종남파의 장문인이 된 곽자량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멸문지화는 가까스로 면했지만 북해빙궁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거의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특히 고수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기에 곽자량은 앞이 캄캄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더욱 똘똘 뭉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독문에게 큰 피해를 입은 점창파의 장문인 채중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를 주최한 이답게 먼저 말문을 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앞에 앉은 두 사람을 연신 살폈다.

‘자신감이 극도로 떨어져 있군.’

채중륭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둘과 같은 처지였기에 누구보다 두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해하는 선에서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현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미래였다.

“아마 두 분 역시 느끼고 계실 겁니다. 분위기가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요.”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대놓고 차별을 하는데.”

“대놓고까지는 아니지요. 엄밀히 말하면. 그저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

공동파의 장문인이 된 목진자가 곽자량을 나무랐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아서였다.

언뜻 보기에는 자격지심을 가진 것 같기도 했고.

“초대장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소이까! 우리들 중에 금색 초대장을 받은 이가 있습니까?”

“화산과 소림 역시 일반 초대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곳은 우리와 상황이 많이 다르지 않소? 솔직히 구대문파라고 해서 다 똑같은 구대문파가 아니니.”

곽자량이 입술을 깨물었다.

세인들은 구대문파를 보며 정도의 기둥이니, 중심이니 하면서 우러러 보지만 실상은 달랐다.

구대문파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게 아니었다.

그 안에서도 소위 말하는 급이 있었다.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지 않소? 두 분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채중륭이 고개를 슬쩍 숙였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역시 궁금했다.

도대체 누구에게 금빛 비단으로 포장된 초대장을 보냈는지 말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요.”

“서운하지 않소? 그래도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희는 곤륜파와 사천당가를 내버려두었죠. 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욕심 때문에.”

“그건···.”

목소리가 높아지던 곽자량이 말끝을 흐렸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어서였다.

게다가 곤륜파와 사천당가가 당했던 일을 이번에는 자신들이 당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적어도 곤륜파와 사천당가에 따질 자격은 그들에게 없었다.

“서운해도 저희는 따질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초대해준 것에 감사해야지요. 더구나 점창파의 경우 사천당가 덕분에 오독문을 몰아내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곤륜파가 북해빙궁을 멸절시켜주었고요.”

“으음. 그건 사실이지만···.”

“알죠.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지요.”

채중륭이 화제를 환기시켰다.

지금 이 자리는 잘잘못을 가리자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논의하고자 만든 자리였기에 채중륭은 앞에 앉은 두 사람을 먼갈아 쳐다봤다.

“안 그래도 채 장문인께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미래를 논의하자는 것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구대문파의 자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

목진자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곽자량은 눈을 빛냈다.

목진자와 달리 그는 채중륭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이해한 듯했다.

“구대문파라 함은 역사와 전통은 물론이고 중원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무문들을 꼽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저희들이 상황은 썩 좋지 않지요. 더구나 전례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까.”

“형산파를 말하는 것이구려.”

“맞습니다.”

적절하게 치고 들어오는 곽자량의 말에 채중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마대전으로 인해 곤륜파가 멸문지화를 당하자 그 빈자리를 형산파가 자연스럽게 채웠다.

팔대문파보다는 형산파를 받아들여 구대문파라는 이름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상황이 지금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일단 한 자리는 곤륜파가 차지할 테고. 정확하게는 복귀겠지요.”

곽자량이 부러운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비록 인원은 적지만 현재 곤륜파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장문인인 패선의 활약을 생각하면 다시 구대문파의 일원으로 복귀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북해빙궁주를 쓰러뜨린 것으로 이미 자신의 실력을 만천하에 드러내기도 했고.

“더구나 원래 구대문파의 일원이던 곤륜파였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없을 겁니다.”

“문제는 우리들이지요.”

“그렇습니다. 소림과 화산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우리들과는 상황이 다르지요.”

“허면 두 자리가 남는데···.”

곽자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대문파에서 밀려난다면 가뜩이나 안 좋은 상황이 더욱더 안 좋아질 게 분명해서였다.

그렇기에 반드시 현재의 위상을 유지해야만 했다.

“답은 하나입니다. 다른 곳을 밀어내야지요.”

“어디를 말입니까?”

“가장 만만한 곳을 밀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채중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밀려나기 싫다면 밀어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으니까.

반면에 목진자는 두 사람과 생각이 달랐다.

“꼭 그래야 하겠습니까?”

“목진자께서는 생각이 다른 모양입니다?”

“두 분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곤륜파와 형산파의 경우를 봤으니까요.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언제나 꽃이 만발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에 굴곡이 있는 것처럼요.”

“그럼 귀 파가 물러나시겠습니까?”

채중륭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두 개뿐인 자리에서 공동파가 양보해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점창파가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

“역시 그건 싫지 않습니까?”

대답이 없는 목진자의 모습에 채중륭이 비릿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목진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얼굴 가득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일개 장로였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그는 공동파를 대표하는 사람이자 많은 제자들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였다.

“우리 솔직해집시다. 장문인께서도 밀려나면 어찌 되는지 알지 않습니까. 곤륜파를 보십시오. 저렇게 다시 복구되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요.”

한풀 꺾인 어조로 목진자가 대답했다.

정마대전의 시작을 알렸고, 가장 앞장서서 천년마교를 막아섰던 곤륜파는 말 그대로 멸문지화를 당했다.

본산이 불탄 것은 물론이고 본산제자, 속가제자 할 거 없이 전멸을 면치 못했다.

남아 있는 본산제자가 청민이 유일할 정도로 말이다.

“그마저도 패선이 돌아왔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패선이 없었다면, 곤륜파의 장문인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후우.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함께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일어나시겠습니까?”

채중륭은 선택을 강요했다.

함께 하지도 않을 이한테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는 없어서였다.

사실 여기까지 말한 것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공개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알려줘도 큰 문제가 없고 말이지.’

현재의 점창파가 예전 같지 않은 위세인 것처럼 공동파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말이 새나가도 그 영향력은 크지 않을 터였다.

현재 공동파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목진자의 말을 믿기보다 의심부터 할 테니까.

‘증거도 없고 말이지.’

앞날이 걱정되어 신세한탄을 하기 위한 자리라고 곽자량과 말을 맞추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은 목진자였다.

또한 목진자의 말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었다.

그렇기에 깊은 내용이 나오기 전에 선택을 강요한 것이기도 하고.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지금 나누었던 대화는···.”

“걱정하지 마시길. 공동파의 장문인으로서 이 자리에서 있던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목진자는 망설임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고민이 서려 있지 않았다.

실리를 위해서라면 이 자리에 앉아서 두 사람과 뜻을 함께 하는 게 맞았다.

장문인이라는 자리는 정치도 해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옳지 않아. 비록 정치는 못할지라도 명예는 아는 장문인으로 남겠다.’

애초에 장문인은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가 앉게 되었을 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과 명예를 내버리고 실리만 쫓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이면 당당한 장문인이 되고 싶었다.

‘그 분처럼 말이지.’

맨땅에서 지금의 위치까지 일파를 끌어 올린 누군가를 떠올리며 목진자가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두 사람이 어이없다는 듯이 지켜봤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도(正道)를 걷고 싶은 모양이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외도(外道)를 걸으려는 것은 아닌데 말이지요.”

곽자량이 비아냥거리는 듯이 말했다.

일문을 이끌기 위해서 정치적인 역량은 필수였다.

무공이 천하를 떨칠 정도라면 마음대로 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협력하는 것은 필수였다.

혼자는 약해도 모두는 강한 것처럼 말이다.

“알아서 뒤쳐져준다면야 저희야 좋지 않겠습니까.”

“소림과 화산은 빠른 시일 내에 복구가 될 테니까요.”

“소림사는 소림무제 법무 대사가 건재하지 않습니까. 화산도 비록 검제가 돌아가셨다고 하나 제자가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고.”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채중량이 목소리를 깔았다.

공동파가 빠졌다고 하나 아직 안도하기는 일렀다.

구대문파에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던 무문인 만큼 비록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나 잠재력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본산제자들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 속가제자들의 세력은 건재한 편이었다.

“그렇지요.”

“때문에 한 가지 작업이 더 필요합니다.”

“고견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곽자량이 눈을 빛냈다.

역시 아무 대책 없이 이 자리를 만들지는 않은 것 같아서였다.

“아무래도 곤륜과 형산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 사이이지 않습니까. 곤륜파가 몰락했다고 하나 어떻게 보면 곤륜파의 자리를 형산파가 차지한 꼴이니.”

“설마···.”

< 제 43장. 패선 입성.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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