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3장. 패선 입성. -01 >
당가타에 진입한 아이들이 하나같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묘하게 다른 분위기가 당가타에 있었던 것이다.
사천당가의 혈족들만 지낼 수 있다는 지역이라서 그런지 분위기가 다른 곳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장사도 하고 음식점도 있는, 다른 거리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지만 살갗에 닿는 분위기가 묘하게 차이가 났다.
“신기하네요. 거리 하나 사이로 이렇게 다른 분위기가 있을 줄이야.”
“기본적으로 내공심법 정도는 다들 익히고 있으니까. 표사나 쟁자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전형적인 무인은 아니지만 무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나. 비록 수박겉핥기식이긴 하지만.”
“중간중간에 고수들도 있는 거 같아요.”
“그게 사천당가의 저력이지. 혈족중심의 가문이 지닌 힘이고. 일단 방계더라도 같은 핏줄이니까. 우리와는 결속력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지.”
서예지가 눈을 빛냈다.
오대세가, 오대세가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녀조차도 이렇게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사천당가의 경우 태상가주인 당민호가 곤륜산에 올 때 당소윤과 그 외 직계 손자들을 데려오기는 했지만 사실 그때는 인원이 적어서 그런지 딱히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다들 고수였지만 벽우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가볍지만 천하를 뒤덮을 수도 있는, 그래 구름 같은 느낌이야.’
독황이라 불리며 한 세대를 풍미한 당민호조차도 벽우진 앞에서는 존재감을 잃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서예지를 비롯한 제자들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고.
“기죽지 마. 우리도 곧 이렇게 될 테니까.”
“맞아.”
“잘 보고 배우자.”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심대혜가 말하자 여기저기에서 호응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흐뭇해하는 벽우진의 모습도.
“자, 들어가자. 아직 사천당가는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어.”
“예.”
“힐끔거려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평소에는 외부인이 거의 없는 곳이라서 그런 거니까 다들 그러려니 해.”
“네!”
우렁차게 대답하는 제자들을 이끌고서 벽우진이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런 그에게로 수십 쌍의 시선들이 날아와 박혔지만 정작 벽우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당가타이기에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우와, 미쳤다.”
“이게 장원이라고? 이건 그냥 요새 아냐?”
“무슨 벽이 저렇게 높아? 장원이 아니라 성 같은데?”
모두가 초행길이기에 묻고 물어 사천당가의 정문이자 유일한 출입구에 도착한 아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
심지어 서예지마저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정도로 장원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장벽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높고 두터운 담도 담이었지만 장원 안에는 망루까지 있었다.
괜히 심대현이 요새라는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근데 줄이 너무 심하게 긴 것 같소만.”
“어?”
“진짜다. 호법님 말씀대로 줄 엄청 길다.”
“입구가 하나뿐이라서 그런 거 아냐?”
“근데 문도 크네.”
청해성 촌놈 티를 여지없이 내며 아이들이 중얼거렸다.
넓은 당가타 만큼이나 사천당가의 장원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 역시 많았던 것이다.
정문 옆에는 쪽문도 있었는데 혈족들은 보통 그곳을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도 기다려야겠죠?”
“아무래도?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
“저희도 마차를 준비할 걸 그랬어요. 편하게 앉아서 기다리게요.”
심대혜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원이 많은 만큼 일단 줄을 서고 일부만 마차를 빌려오면 될 것 같아서였다.
정 구하기 힘들면 하나 마련해도 상관없었고.
“왠지 이곳에서는 마차도 비쌀 것 같아. 우리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겠네.”
심대현의 말에 심대혜가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낸 걸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우와!”
“누구지?”
“성도에 저만한 미녀가 있었나?”
“도복을 입고 있는데, 저기 검에 달린 수실이 어느 문파인지 알고 있나?”
아이들이 어마어마한 줄의 행렬에 기가 질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주변이 웅성거렸다.
가만히 서서 순서만 기다리고 있으니 자연스레 미녀의 등장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혼혈이지만 외모는 지극히 중원인을 닮은 심대혜의 모습도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중원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몸의 굴곡에 몇몇 남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던 것이다.
스스슥!
그런데 그때 사천당가의 정문에서 일단의 무리가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절도 있는 경신술을 선보이며 내원 소속의 녹의대(綠衣隊)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뭐지?”
“왜 갑자기 녹의대원들이 나오는 거야?”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오십 명이나 되는 인원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모습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아침 일찍부터 순서를 기다렸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어서였다.
“안녕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벽우진도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고 있는데 바로 그 녹의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그뿐만 아니라 벽우진을 향해 절도 있는 포권지례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문인. 녹의대를 맡고 있는 당추영이라고 합니다.”
“응? 나한테 온 거야?”
“예. 모시러 왔습니다.”
벽우진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도착하기 무섭게 자신을 데리러 올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다가 이내 당가타에서 느껴지던 시선들이 떠올랐다.
“당가타에서 보고가 들어간 모양이구먼.”
“예. 태상가주님께서 각별히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쯧쯧. 또 애들 피곤하게 유난을 떨었구만. 네가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장문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꼭 뵙고 싶었거든요.”
“봐서 뭐해. 나도 팔다리 네 개인 똑같은 사람인데. 별 거 없어.”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이러는지는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너무 과한 것 같아서였다.
만약 저 줄의 끝에서 기다려야 한다면 짜증이 심하게 나기는 했겠지만, 그렇다고 이게 좋은 건 또 아니었다.
웅성웅성.
녹의대의 등장과 함께, 그것도 녹의대주가 직접 모시러 나오는 광경에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던 것이다.
“그래도 자랑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직접 장문인을 모셨다고요.”
“초대장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냐?”
벽우진이 품속에서 당민호에게 직접 받았던 금색 비단으로 포장된 초대장을 꺼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소란이 일었다.
사천당가에서 뿌린 금색 초대장이 열 장 남짓이라는 걸 몇 명은 알고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다들 휘둥그레진 눈으로 벽우진을 힐끔거렸다.
“다른 지역에서 장문인을 사칭하는 자들이 몇몇 있기는 한데, 적어도 성도에서는 그리 못합니다. 장문인의 얼굴을 잘 아는 곳이 사천당가이니까요. 게다가 제자 분들은 사칭하기도 힘들고요.”
“좀 특별하기는 하지.”
심대혜와 동생들을 슬쩍 바라보며 하는 당추영의 말에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히 자신은 몰라도 저 사남매를 따라 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외모가 비슷한 사람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눈동자마저 똑같은 이는 없을 터였다.
따라한다고 따라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고.
“모시겠습니다.”
“그래.”
당추영이 팔을 뻗었다.
짧은 대화를 끝마치고 본래의 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등장으로 이미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기도 했고.
다만 놀라운 것은 제자들의 반응이었다.
‘장문인이야 연세가 있으시니 딱히 놀라지 않는 게 당연하지만.’
당추영의 시선이 서예지를 비롯해서 제자들에게 향했다.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은 경지가 경지인 만큼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고 해서 평정심이 흔들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다.
제일 나이 많은 이가 도일수였고, 그마저도 얼마 전까지 소규모 표국의 쟁자수였다.
그런데 누구 하나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을 띤 이가 없었다.
‘패선의 제자라는 건가.’
이제 갓 열 살을 넘은 듯한 막내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싱글 거리며 벽우진과 함께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 당추영은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남다르기는 한 것 같아서였다.
‘무공도 그렇고.’
당추영의 얼굴에 언뜻 부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천당가인 만큼 곤륜파에 대해서는 그 어느 곳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제자들에 대해서도.
서예지를 제외하면 본격적으로 무공을 수련한지 1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당추영은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성장세라니.’
서예지만 하더라도 그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으로 보였다.
그런데 더 말이 안 되는 건 다른 제자들의 성취였다.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의 수준이었기에 당추영은 새삼스레 패선이라는 두 글자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안목이 뛰어난 걸까, 아니면 제자들을 잘 키우는 걸까.’
어느 쪽이든 두려울 정도의 능력이기에 당추영은 태상가주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벽우진 같은 인물은 적으로 두기보다는 친구로 두는 게 여러 모로 이득이었다.
“여기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그래. 안내하느라 고생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녹의대주가 안내나 하는 자리는 아닐 텐데.”
장원 내의 또 다른 장원이 있는 듯한 별채를 바라보며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당추영도 마주 웃었다는 점이었다.
“그 정도로 장문인을 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뭐, 나야 편하게 왔으니까. 고맙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라도 시비나 하인들에게 시키시면 됩니다.”
“그래.”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당추영이 정중히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그러자 썰물처럼 녹의대가 빠져 나갔다.
“여기 너무 좋다.”
“이런 공간도 있구나.”
“대체 얼마나 넓으면 이렇게 꾸밀 수 있는 거지?”
“별채가 여기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꽤나 큰 연못도 함께 딸려 있는 별채의 풍경에 아이들이 눈을 떼지 못했다.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여서였다.
게다가 이런 별채는 하나만이 아니었다.
적당한 간격으로 두어 개가 더 있었다.
“교각도 예뻐.”
“다리를 건너서 가는 숙소라니.”
특히 여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곤륜파도 풍광과 운치로 어디 가서 뒤떨어지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자연과의 조화에 중점을 두었다.
실생활의 편리성과 심미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을 여자들은 지금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확실히 건물이 예쁘긴 한 것 같습니다.”
“이런 걸 건축미라고 하나?”
“저희도 한 번 만들어 볼까요?”
여자들만큼은 아니지만 남자아이들도 관심을 보였다.
곤륜파에 비하면 확실히 배치나 구조가 잘빠진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렇다고 공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저는 저희 집도 좋아요. 일단 공기가 맑잖아요. 게다가 산에서 사는 친구들도 많고. 혁문이가 애기들 밥은 잘 주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심소혜가 조막만한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가축들에게 사료를 잘 챙겨주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일단 들어가자. 각자 머물 방도 정해야 하고.”
“예!”
“나 신경 쓰지 말고 쓰고 싶은데 골라. 나는 아무데서나 자도 되니까. 호법도 먼저 고르시지요.”
“저도 상관없소이다. 다만···.”
진구의 시선이 언제 걱정했냐는 듯이 언니들을 따라 교각을 뛰어가는 심소혜의 등으로 향했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는 눈빛이었다.
“제자를 여아로 들이시겠습니다. 하하.”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오. 어차피 도(道)를 궁구하는 여정에 성별은 중요치 않으니.”
진구가 특유의 호탕한 걸음걸이로 교각을 가로 질렀다.
심소혜가 손을 흔들자 흐뭇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벽우진이 묘한 얼굴로 쳐다봤다.
< 제 43장. 패선 입성.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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