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2장. 사천행. -02 >
벽우진이 눈을 번뜩였다.
이 늦은 시간에 손자인 배혁문을 시켜 자신을 부를 만한 일은, 보여줄 것은 단 하나 밖에 없어서였다.
그러한 벽우진의 기색을 배율석 역시 읽은 모양인지 은은하면서도 자부심이 서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드디어 완성했습니다. 지금껏 제가 만들었던 녀석들 중에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아이를요. 그래서 완성이 되자마자 장문인을 모신 것입니다.”
“허어.”
벽우진이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배율석이 곤륜파의 장문령부를 만든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아마 못해도 지금까지 만든 실패작들이 세 자리 숫자는 훌쩍 넘어갈 터였다.
“제 기준에는 만족스러운데 장문인의 눈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네 기준에 맞을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칠 것 같은데. 너의 심신을 갈아 넣듯이 해서 만든 검이잖아.”
“그 정도는 아닙니다. 혼신의 노력을 다하기는 했지만요. 허허허.”
자신의 수고를 알고, 인정해주는 벽우진의 모습에 배율석이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상태인 것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맑은 상태였다.
“기대되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달칵.
배율석이 대장간 한쪽에 마련된, 완성된 무구들을 전시해 놓은 방문을 열었다.
이윽고 창문에서 스며드는 달빛을 받아 고고히 빛나는 검 한 자루가 벽우진의 눈에 들어왔다.
방에 들어가는 순간 눈에 띌 수밖에 없게 중앙에 딱 비치되어 있었기에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호오.”
“방금 전에 완성된 검입니다. 아직 열기가 조금 남아 있지만 드는데 무리는 없습니다.”
저벅저벅.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이 월광을 반사시키며 고고하게 빛나는 검의 모습에 벽우진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놀랍게도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주인을 알아보는 듯 벽우진을 격하게 반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우웅! 우웅!
심지어 검명까지 토해내는 모습에 배율석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만들었음에도 이런 반응은 보이지 않았었기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정말 혼이 깃든 모양인데. 그것도 곤륜의 혼이.”
“곤륜산에서 나는 철광석을 이용해 만들었습니다. 현철 또한 100일 동안 곤륜산의 정기가 머물 수 있도록 산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다가 사용했습니다.”
데에엥!
얼른 잡아달라고 보채는 듯이 울어대는 검을 조심스럽게 잡아든 벽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검신의 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손잡이랑 일체형이네?”
“예. 아무래도 따로 만드는 것보다는 일체형이 더 안정적이고 충돌 시 손잡이에 부하도 적습니다.”
“근데 중심잡기가 힘들잖아.”
벽우진이 강도 검사를 마치고서 왼손 검지에 검을 올렸다.
검의 균형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가락 위에 놓인 검은 조금의 기울임도 없이 완벽한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부순 게 제법 많지요.”
“제법은 무슨. 세 자리가 훌쩍 넘어간다고 혁문이가 그러던데. 부수고 녹이고 다시 만들고. 그 세 가지를 무한 반복 중이라고.”
“허허허.”
배율석이 뻘쭘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기색은 없었다.
평생의 역작을 만드는데 그 정도 수고는 수고라고 할 수도 없어서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노력한 게 아니라 완성을 했느냐였다.
“근데 진짜 보검을 만들어낼 줄이야. 이 정도면 전대 장문인께서 사용하던 장문령부 못지않겠는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사실 그 이상의 검을 만들어낼 자신이 저는 없습니다.”
“하면 도나 창을 만들어보는 건 어때? 혹시 알아? 이 녀석과 형제들이라 할 수 있는 녀석들이 탄생할지.”
“으음.”
배율석의 두 눈에 욕망이 떠올랐다.
지금 보이는 검보다 더 나은 검을 만들 자신은 없지만 다른 병기는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배율석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새로운 목표에 가슴에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창은 몰라도 도는 있으면 좋지. 본파에는 뛰어난 도법도 있으니까.”
“저를 끝까지 부려먹으려는 건가요.”
“아니. 멈추지 않게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는 거지. 이대로 소일거리만 하기에는 너무 아깝잖아. 아직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살짝 걱정도 됩니다. 다시는 만들지 못할까봐.”
“그러니까 더 시도해 봐야지. 결과는 시도하는 이에게만 주어져. 포기한 이에게는 실패조차도 허락되지 않지.”
부우우웅.
벽우진이 그리 말하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부드러운 파공성과 함께 창문으로 파고든 월광이 잔잔히 부서졌다.
배율석은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았다.
단순한 휘두름이었지만 그 안에는 삼라만상이 전부 담겨 있는 듯했다.
“오오···!”
“그리고 한 번 만들었는데 두 번이라고 못 만들 이유가 없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서두르지 마. 일단은 몸 좀 추스르고 그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벽우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199명이나 되는 속가제자들의 병기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배율석이었다.
그러니 심적으로 추스를 시간은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장문인. 검의 이름을 지어주시지요.”
“이름은 제작자가 짓는 게 낫지 않겠어?”
“만든 건 저이지만 주인은 장문인이시지 않습니까. 검 역시 그러길 바랄 겁니다.”
우우우웅.
마치 배율석의 말이 맞다는 듯이 검이 잘게 떨었다.
그런데 배율석은 몰랐지만 벽우진의 양팔에 걸려 있는 일월쌍환 역시 은은하게 진동하는 중이었다.
말은 못했지만 벽우진이 느끼기로 질투하는 듯했다.
‘녀석들.’
평소에는 조용한 녀석들이 새 친구의 등장에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벽우진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지만 질투라고 할 것도 없었다.
배율석에게는 미안했지만 지금 들고 있는 검과 일월쌍환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신선이 만든 보패와 인간이 만든 검은 애초에 같은 선상에 둘 수 없었으니까.
‘둘 다 조용히 있어.’
벽우진의 뜻이 전해진 것인지 투정부리듯 번갈아가며 진동했던 일월쌍환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벽우진은 찬찬히 검을 내려다봤다.
특별한 기운이나 힘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검은 아니었다.
신검은 아니더라도 능히 보검의 수준에는 어울리는 검을 벽우진은 지그시 쳐다봤다.
“이름이라.”
“천천히 생각해 보셔도 됩니다. 검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무상검(無上劍).”
“예?”
“본파의 상청무상검도(上淸無上劍道)와 궁합이 잘 맞을 것 같아서.”
뜬금없는 말에 당황했던 배율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어진 벽우진의 설명에 왜 무상검인지 이해했던 것이다.
“곤륜파 최고의 절학 중 하나지 않습니까.”
“맞아. 본파가 자랑하는 절학 중 하나이지. 천하에서 손꼽힐 만한 검공이기도 하고.”
“흔히들 곤륜파하면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을 생각하지만 그건 단순히 가장 많이 알려져서 그런 것뿐이다. 검공 중 최고를 꼽으라면 딱 두 가지지. 상청무상검도와 태청용형검(太淸龍形劍). 이 두 개가 최고야. 그리고 이 검은 그 두 가지 검공과 궁합이 좋아.”
“용형검이라고 짓기에는 아무래도 형태가 수수하지요.”
“그래서 더 좋아. 화려해봤자 균형만 어긋나. 검은 그저 검일 뿐이지.”
웅웅웅웅!
벽우진이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무상검이 격렬하게 떨어댔다.
한데 그러면서도 벽우진의 손에 전해지는 부담은 전혀 없었다.
“여기 검갑입니다.”
“되게 고급스러운데?”
“무상검을 담아야 하는데 아무렇게 만들 수는 없지요.”
“내가 차고 다니기에는 너무 고급스럽지 않아?”
벽우진이 왼손에 검갑을 들고서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일파의 수장이라고 하나 그래도 명색이 도인인데 검갑이 너무 화려한 것 같아서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대 곤륜파의 장문령부인데요. 위신을 위해서라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출 시에는 천으로 가리면 되니까요.”
“흐음.”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고풍스럽게 변할 겁니다.”
“그렇긴 하겠네.”
벽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너무 새것 같아서 화려한 느낌이지만 다음 세대, 그리고 100년이 지나면 소림사의 녹옥불장처럼 자연스럽게 세월의 미를 보여줄 터였다.
탁.
대답과 함께 벽우진이 무상검을 검갑에 넣었다.
그러자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고마워. 완성하기까지 엄청나게 힘들었을 텐데.”
“힘들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또 배운 것도 많고요. 물론 다시 만들라고 하면 못 만들겠지만요.”
“동생을 만들면 되지. 형보다 뛰어난 동생이 어디 한둘이야?”
벽우진이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수많은 실패를 하겠지만 그럼에도 도전하고 또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할 터였다.
오늘 완성된 무상검처럼 말이다.
“그래도 부담감은 크게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장문인은 있는데 장문령부는 없는 상태이니까요.”
“이제부터는 편하게 만들어. 필요한 광물이 있으면 다 말해. 사천당가에서 구해올 테니까.”
사천당가라는 말에 배율석이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당필교를 통하는 것보다는 벽우진이 직접 구하는 게 품질 면에서도 탁월할 게 분명해서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배율석은 이내 두 눈을 빛내며 필요한 것들을 벽우진에게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내리는 눈발의 모습을 벽우진은 지그시 쳐다봤다.
바람결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는 단순한 모습을 더없이 진지하게 응시했던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글쎄. 일정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
“혹시 본산에 있는 속가제자들을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요?”
양일우의 중얼거림에 양이추와 심대현이 작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셋은 연신 벽우진일 힐끔거렸다.
“혹시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닐까? 불현듯 찾아오는 게 깨달음이라고 하잖아.”
“그 정도 분위기는 아닌 거 같은데.”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밥부터 먹어라. 내일은 눈길을 걸어야 하니 평소보다 배는 힘들 것이다.”
“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듯이 진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세 사람이 입을 쏙 다물고서 점소이가 가져다준 음식들을 원탁 위에 적당히 정리했다.
인원이 적지 않은 만큼 모두가 편히 먹을 수 있도록 적절히 배치했던 것이다.
“근데 음식을 너무 과하게 시킨 것 같아요.”
“굳이 이렇게 비싼 음식 안 시켜도 되는데.”
객잔에서 일했던 적이 있는 심대혜와 심대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끼 저녁으로 먹기에는 금액이 너무 과한 것 같아서였다.
“돈은 걱정하지 말 거라. 여비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니까.”
“사부님.”
어느새 생각을 정리한 모양인지 벽우진이 창밖을 주시하던 시선을 돌리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아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그는 알고 있어서였다.
“그래도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사부님.”
“왜? 못 먹을 것 같아?”
“어···.”
심대혜가 말끝을 흐렸다.
한창 자랄 때인 소년만 네 명이었다.
거기에 장정인 벽우진과 진구까지 있었기에 다 못 먹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낭비인 것도 분명했다.
탁.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심대혜의 모습을 보며 벽우진이 젓가락을 집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건 낭비가 아니다.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이지.”
“과정이요?”
“그래. 너희들은 더 이상 객잔에서 일하던 점소이나 잡일꾼이 아냐. 나의 제자들이지. 또한 곤륜파의 일대제자들이고.”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진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벽우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는 단박에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닌 듯 하나같이 모르겠다는 얼굴로 두 눈을 껌뻑거렸다.
< 제 42장. 사천행.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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