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2장. 사천행. -01 >
“이제 필교만 남았구나.”
“전 두 분보다 가벼운 사항들입니다.”
“지내는데 부족한 건 없고? 민호가 갈구거나 그러지는 않아? 자주 너에게 찾아간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벽우진이 자기 사람 챙기듯이 물었다.
그리고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했다.
당민호와 당소윤은 사천당가 사람이지만 당필교는 이제 곤륜파의 사람이었다.
죽기 전에 본가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곤륜파 소속이었다.
“심심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많이 도와주십니다.”
“공사를?”
“예.”
“처음 만들었던 설계도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해 보려고 그러는 거 아냐? 네가 수정 많이 했잖아.”
예의 삐딱한 심보가 다시 한 번 나왔다.
친구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당연한 질문이기도 했다.
지금 공사하고 있는 그것은 곤륜파의 비밀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본다고 해서 모든 걸 다 파악하지는 못할 겁니다. 태상가주님은 결국 돌아가실 테고, 저는 계속 곤륜산에 남아 있을 테니까요.”
“계속 개량해 나갈 거다?”
“예. 장문인께서 지원만 해주신다면요.”
벽우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 이상 좋은 대답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공사가 끝난다면 그와 당필교 말고는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걱정하지 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난 늘 같은 대답이니까.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그래도 좀 아껴서 써야 합니다. 점점 커지는 문파 사정도 생각하셔야지요.”
“많이 쓰면 많이 벌면 돼. 그럼 똑같은 거 아냐?”
“어, 음.”
서진후가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였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 많이 버느냐였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뭐 필교한테만 거금을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적정선은 지킬 거야. 필교 역시 마찬가지고.”
“맞습니다. 그리고 일단 공사가 끝나면 아마 큰돈이 들어갈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좋아.”
벽우진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보고할 것이 남았냐는 얼굴로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는 없습니다.”
“저도 없습니다.”
벽우진의 시선에 청민과 당필교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반면에 서진후는 묘한 얼굴로 옅게 웃고만 있었다.
“청범이는 할 말이 남은 모양이네.”
“그럼 저희는 일어나 보겠습니다.”
청민이 눈치껏 일어났다.
서진후가 비청각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당필교를 데려갈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참, 필교야.”
“예. 장문인.”
“진짜 안 가도 괜찮아? 너 하나 간다고 해서 공사가 틀어지거나 진도가 지지부진해지는 건 또 아닐 것 같은데. 다른 기술자들의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공사도 막바지라며?”
“제가 사용하던 물건은 이미 다 가져온 상태고, 친한 지인들 역시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에둘러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당필교의 모습에 벽우진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당사자가 싫다는데 자신이 강요할 수는 없어서였다.
벽우진은 개인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럼 완공하고 휴가라도 한 번 다녀 와. 너무 한곳에만 박혀 있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지 않아. 나를 봐? 정신적으로 황폐해진다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길게는 안 되고. 시설관리는 네 몫인 거 알고 있지?”
“예.”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나 알아서 잘 하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내 도움이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달려오고.”
“예.”
청민과 당필교가 나가자 벽우진의 시선이 서진후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서진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하오문에서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초기단계인데, 눈치를 챈 낌새입니다.”
“괜히 개방과 함께 중원을 양분하고 있는 게 아냐. 오히려 밀도로 따지면 하오문이 한수 위야. 의외로 고급 정보가 많이 돌아다니니까. 개방은 너무 공개되어 있고. 일단 거지가 있으면 경계하게 되잖아.”
“맞습니다.”
서진후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임에도 하오문이 눈치를 챘다는 사실에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오문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을 거야. 언제까지나 자신들에게 의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힘이 정보력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너무 가까운 게 가장 큰 문제인 듯싶습니다.”
“슬슬 내려가겠지. 소문주라는 고급인력을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다른 작전도 실패한 상태고 말이죠.”
“작전?”
벽우진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반문했다.
하지만 서진후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을 뿐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게 있습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기분이 상당히 나쁜데?”
“인원은 혹시 정하셨습니까?”
“대충은.”
벽우진이 여전히 따뜻한 차를 들이켰다.
식기 무섭게 내공으로 데우고 있었기에 찻잔 안에 담긴 차는 늘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천당가까지 따라가지는 않겠지요?”
“설마. 거기가 어떤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폐쇄성이라 독심으로 따지면 천하제일인 곳이 사천당가야. 장원은커녕 당가타도 조심해야 할 걸. 외부인은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게 당가타니까.”
“마치 가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흠흠! 그러니까 이번에 가야지.”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나이는 많았지만 사천성에 가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애 대부분을 시공간의 진에 갇혀 있었고, 그 전에는 청해성 토박이었다.
최근에 가장 멀리 간 게 황하를 타고 감숙성으로 넘어간 게 다였다.
“안타깝게도 제가 모시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제가 빠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요.”
“괜찮아. 길잡이야 뭐 비호표국에서 한 명 데려가도 되고, 아니면 청하상단에 도움을 받아도 되고. 일단 일수가 사천성에도 넘어가본 경험이 있다니까 큰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길치는 아니잖아?”
“대신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을 것 같아서요.”
“결과가 나쁜 적은 없잖아?”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성격이 괴팍하고 폭력적이긴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패선이라 불리며 칭송 받는 것이고.
“사천당가에서 생일연을 준비하고 있을 이들이 불쌍해지네요.”
“나는 걱정이 안 되고?”
“사형이야 뭐. 허허허.”
벽우진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손녀를 걱정하는 게 더 나았다.
아니면 사천당가 사람들을 걱정하거나.
만약 벽우진이 사고를 친다면 그 뒷수습은 사천당가가 해야 했으니까.
“나는 재해다 이거지?”
“지금까지는 덤벼든 쪽이 다 개박살 나지 않았습니까. 수적이야 논외로 치더라도.”
“나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 나이도 적지 않고.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사형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제도 모르고 사형을 건드리는 놈이 있을까 싶어서요.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약관처럼 보이는 게 사형이지 않습니까.”
서진후가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벽우진은 혼자 놔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간에 알려진 것이야 과장된 게 없지 않아 있었고, 실제로는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의외로 조용히 지내는 게 벽우진이었다.
다만 문제는 혹시나 벽우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건드리는 이들이었다.
“민호네 집인데 설마 그러겠어? 다른 곳도 아니고 사천당가인데. 다른 오대세가였다면 모르겠지만 사천당가에서 제 멋대로 날뛰는 놈은 없을 거야.”
“흠.”
삐꺽거리는 다른 오대세가들과는 달리 무서운 기세로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곳이 사천당가였다.
또한 강남 무림을 휩쓸었던 오독문을 밀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기에 현재 사천당가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가히 무당과 비견될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사천당가는 걱정하지 말고 아이들이나 간간히 신경 써줘. 청민이가 있기는 하지만 혼자서는 한계가 있으니까.”
툭.
벽우진이 그리 말하며 두툼한 책자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것들을 허공섭물로 들어서 서진후의 앞에 쌓았던 것이다.
“이건 무엇입니까?”
“낙화검(落花劍), 팔투도(八套刀), 천강수(天剛手), 통벽권(通璧拳)이다.”
“이걸 속가제자들에게 공개하시게요?”
서진후의 두 눈이 흔들렸다.
곤륜파를 대표하는 무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속가제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무공들이었다.
그렇기에 서진후가 마른침을 삼키며 벽우진을 쳐다봤다.
“아껴서 뭐해? 만약 내가 없었다면 소실되었을 무공들이야. 과거에는 거의 사장되었다시피 한 무공들이었고. 아껴봤자 썩기만 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체질에 맞는 아이들이 있을 때 하사하는 게 나아. 아이들이 익혀서 더욱 발전시킬 수도 있고.”
“너무 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진후가 우려를 표했다.
속가제자들에게 가르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수준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태청검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성한다면 절정의 경지는 가볍게 오를 수 있는 게 지금 벽우진이 내민 무공들이었다.
“일단은 전반부야. 후반부는 빼놓았어. 너와 청민이가 가르치기 쉽게 그림도 그려 놓았으니 내가 다녀올 동안 기틀을 잡아놓기에는 충분할 거야. 어떤 아이들에게 어울리는지도 적어 놓았으니까 확인해보고.”
“아, 전반부면 괜찮겠네요. 어차피 전반부를 다 익혀야 후반부도 가능할 테니.”
“더 길게, 높게 보자 청범아. 장사처럼 생각해. 지금은 과도한 투자 같지만 나중에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올 거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도 나에게는 네가 더 소중하단 것도 잊지 말고.”
서진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는 벽우진이 직접 집필한 무공서들을 소중하게 챙겼다.
“돌아오셨을 때 사형께서 만족하실 정도로 가르쳐 놓겠습니다.”
“너무 굴리지는 말고. 적당히. 서두르다가 더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서진후가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나 방문객들이 다 떠났음에도 벽우진은 좀처럼 쉬지 못했다.
몇 가지 문제들이 그가 제대로 쉬는 걸 방해했던 것이다.
“일단은 차근차근 하는 게 좋겠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되찾고 싶지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벽우진이 차를 들이켰다.
밤중에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웠다.
더구나 초겨울이었기에 곤륜산에서 부는 바람은 더욱더 싸늘했다.
하지만 그 차가운 산바람마저도 어쩌지 못하는 공간이 딱 하나 있었다.
끼이익.
곤륜산에서 유일한 대장간에 도착한 벽우진이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단순히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간 것뿐인데도 벽우진의 안면으로 후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오셨습니까.”
“괜찮은 거야? 몸 상태가 말이 아닌데?”
나름 통통했던 볼 살은 사라지고 홀쭉해진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적으로 거의 반쪽이 되어 있는 듯한 배율석의 모습에 벽우진이 퍼뜩 놀라 소리쳤다.
누가 봐도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괜찮습니다. 잠을 좀 못 자고 끼니를 걸러서 그런 겁니다.”
“며칠 동안 작업했는데?”
“열흘 정도 됩니다.”
“뭐?!”
벽우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공심법을 익혔다고 하나 그 성취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재 배율석은 범인과 딱히 차이가 없었다.
내공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신체능력을 어마어마하게 높여주는 수준은 절대 아닌 것이다.
“정말 괜찮습니다. 젊었을 적에는 보름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일했던 적도 있었는 걸요.”
“그건 젊었을 때잖아. 이제는 네 나이를 생각해야지.”
“진짜 괜찮습니다. 겉보기에는 이래 보여도 저는 지금 아주 멀쩡한 상태입니다.”
“전신이 땀범벅인데?”
벽우진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당사자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시죠.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설마?”
< 제 42장. 사천행.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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