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36화 (136/325)

< 제 41장. 곤륜파는 성장 중. -04 >

진구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먼 허공을 응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를 그렇게 만든 심소혜는 해맑게 웃으며 두 다리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오래오래 저랑 함께 있어주세요.”

“후후. 그래. 약속하마.”

“약속하신 거예요?”

“물론이지. 대신 내 제자와도 친하게 지내야 한다?”

진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너무나 맑고 투명해서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심소혜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물론이죠! 제가 잘 보살피고 챙길게요!”

“고맙구나.”

별 거 아닌 목마에도 신나하는 심소혜의 모습에 진구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방금 전까지의 고민이 정말 쓸데없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직 시간은 4년이 넘게 남았고,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또한 지금 목마를 태우고 있는 심소혜도 부쩍 커 있을 터였다.

‘이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순리에 맞게.’

홀로 사는 삶은 외로웠다.

말해도 들어줄 사람조차 없기에 진구는 그저 살았다.

사부가 유언처럼 남긴 부탁을 이루기 위해 외로움을 꾹꾹 누르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어쩌면 그걸 알기에 일부러 속세에 내려오는 걸 기피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근데 너무 앞서 생각하는 것 아니냐? 아직 내 제자는 없는데.”

“곧 생기지 않을까요? 사숙도 갑자기 혁문이를 제자로 들이셨잖아요.”

“흐음.”

진구가 선뜻 아니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였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마음에 드는, 진짜 인연처럼 제자가 생길지도 몰랐으니까.

“저는 호법님이 빨리 제자를 들이셨으면 좋겠어요.”

“왜?”

“조금 외로워 보이셔서요.”

“그래?”

“네! 물론 제가 곁에 있으니 앞으로는 외롭지 않겠지만요.”

심소혜가 그리 말하며 헤헤헤 웃었다.

그러자 진구도 마주 웃었다.

심소혜의 웃음은 이상하게도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다.

듣게 되면 반사적으로 따라 하게 되는.

“참 신기해. 네 오빠들은 날 무서워하는데 말이지.”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왜 그러지?”

“머리가 굵어져서 그런 거겠지. 생각이 많으니까.”

“전 커서도 안 그럴 거예요.”

“그래주면 고맙고.”

진구는 대화하면서 은근슬쩍 대연무장의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혹시나 청민과 속가제자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심소혜와 좀 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려는 속셈도 있었다.

운무가 가득한 곤륜산에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왔던 것이다.

이제는 제법 쌀쌀한 아침 날씨에 벽우진이 창문 앞에 서서 따뜻하게 우린 약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렇게 먹는 것도 나름 괜찮네.”

곤륜산의 기후 조건 상 차밭을 조성하는 건 힘들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비현과 함께 약초밭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제법 큰 규모의 약초밭을 조성했던 것이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지금 마시는 차였다.

“쓴맛이 조금 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묘한 매력이 있어. 일단 곤륜산에서 난 약초로 만든 것이니까.”

지력 때문에 매해 같은 땅에서 키우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벽우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있는 곤륜산은 중원에서도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거대했기에 지력이 떨어졌다 싶으면 장소를 바꾸면 되었다.

일단 곤륜산은 곤륜파의 영역이었으니까.

똑똑똑.

“사형. 저 청민입니다.”

“들어와.”

“저도 같이 왔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장문인.”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청민과 서진후, 당필교가 들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셋이 함께 방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겨울이 다가와서 그런지 둘 다 옷차림이 두꺼워져 있었다.

“확실히 계절이 바뀌긴 바뀐 모양이야. 옷이 달라진 것을 보면.”

“몸은 젊어졌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까요.”

“그럼 난 솜털 옷을 입어야겠는데?”

“사형은 수화불침이시잖아요.”

청민이 넉살 좋게 대꾸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벽우진이 들고 있는 차를 지그시 쳐다봤다.

“옆에 놓인 차 주전자에 차 있다. 따라 마셔.”

“예.”

“감사합니다.”

은근히 따라주길 바라는 낌새였으나 벽우진은 단칼에 거절했다.

지금은 창문 앞에서 아침바람을 쐬는 게 좋아서였다.

그리고 셋 다 손발이 다 있기도 했고.

“무슨 일인데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찾아왔어?”

“해는 다 떴는데요?”

“먹은 조식이 소화도 안 됐다.”

“보고할 게 있어서요.”

“셋 다?”

창문을 등지고서 벽우진이 세 사람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보통은 각자 혼자서 찾아오지 이렇게 셋이 함께 온 경우는 드물었기에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요 앞에서 만났습니다.”

“요즘에 밥은 같이 안 먹나 보다?”

“아무래도 다들 챙겨야 하는 이가 있으니까요.”

“예지는 나랑 밥 먹는데?”

대답은 청민이 했지만 벽우진의 시선은 서진후에게로 향했다.

서진후에게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서예지는 아침, 점심, 저녁 다 벽우진과 함께 하고 있었기에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낸 것이다.

“그게 맞지요. 사형제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니까요. 전 오히려 속가제자들과 같이 먹는 게 편합니다. 나름 눈여겨보는 아이들도 있어서요. 그리고 제가 속가제자들의 대표이지 않습니까. 특이하게도 장로직을 겸직하고 있기도 하고.”

“총 관리자 느낌도 들긴 하지.”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같은 속가제자이니 잘 통하는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또 제가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투닥거리는 거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하삼이가 그래도 애들을 잘 제어하더라고. 생긴 게 좀 무섭게 생겨서 그런가.”

“오히려 아이들은 좋아하던데요. 엄하기도 하지만 또 챙겨줄 때는 확실하게 챙겨주니까요. 게다가 나이 차이가 워낙에 많이 나서 그런지 다들 경쟁자라기보다는 그냥 동네 삼촌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분위기가 아주 좋습니다.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혹시 그걸 노리고 뽑으신 건가요?”

서진후가 짐짓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 말에 청민은 물론이고 당필교도 관심을 보였다.

장하삼 덕분에 속가제자들이 큰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는 걸 둘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럴 리가. 뽑을 만 했기에 뽑은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서 선별했을 것 같아?”

“아니죠.”

“저희가 오해했네요.”

서진후와 청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은 것이었다.

“하삼이 없었고, 말썽쟁이들이 수두룩했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거다. 시간 차이가 조금 있었을 뿐 결국에는 지금처럼 됐을 거다.”

“그렇긴 하죠. 본산제자 애들도 만만치 않으니까요.”

“뭐, 그래도 하삼이의 역할이 크다는 건 알고 있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잘해주고 있어서.”

“제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아이 중 한 명입니다.”

“그래?”

서진후의 말에 벽우진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비청각과 어울리는지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확신하기 이르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예. 지금은 일단 기초를 잡는 게 먼저지만요.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면 넌지시 말을 꺼내볼 생각입니다. 따로 조용히 얘기를 나눠봤는데 집에 꼭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고요.”

“그러니까 도전하러 왔겠지. 가정이 있는데 왔으면 그건 욕심이지. 실격사유야.”

“맞습니다.”

개개인의 꿈은 중요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개인일 때였다.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은 논외였다.

“근데 좀 안쓰럽기는 하네. 서른다섯 살인데 아직 혼자라.”

“사형께서 그리 말씀하시니까 좀 이상한데요.”

“너나 나나. 그래도 난 외관상으로는 젊어 보이니까 괜찮아. 내 이름하고 신분만 안 밝히면 그냥 청년으로 볼 걸?”

“그리 말씀하셔도 안 부럽습니다. 전 지금이 좋습니다. 허허허.”

청민은 벽우진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 넘어갈 필요가 없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에 만족해서였다.

이 이상은 욕심이라고 생각했기에 청민은 벽우진이 부럽지 않았다.

“사실 진짜 도인은 너지. 난 쫌 도인과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래도 잘 해오고 계시지 않습니까.”

“근근이 버티는 거지. 그래. 누구부터 보고할래?”

“청민 사형부터 하시죠.”

벽우진의 말에 서진후가 청민을 쳐다봤다.

나이로 보나 항렬로 보나 셋 중에 청민이 가장 높아서였다.

“그럼 저부터 하겠습니다.”

“그래.”

“속가제자들의 훈련에 대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현재 전부 다 소천기공을 스스로의 힘으로 소주천 할 수 있는 상태이고 체력 역시 상당히 올라와 있는 상태입니다. 몇몇이 살짝 부족하기는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인 것을 감안하면 그래도 최소한의 기준에는 부합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된다는 거지?”

“예.”

긴 설명을 단 한 마디로 축약한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째서 청민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준비를 다 해두었지. 각자의 소질에 맞게 무공을 구분해 두었으니까.”

“아, 그리고 본산제자에 대해서 물어오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건 보류. 넌 모르지만 난 당분간 제자는 더 이상 받지 않을 거야.”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선은 혁문이부터 제대로 가르치고 싶습니다. 적전제자로 받아들일 만한 아이도 아직은 보이지 않고요.”

벽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마땅한 인재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입문 시험이었던 달리기는 말 그대로 최소 기준이었다.

본산제자의 기준은 그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도 노력 여하에 따라 태청검의 전반부는 가르쳐 줄 수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잘 말해줘. 소청신공과 소청검이 속가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재능만 있다면 그 이상도 가르쳐줄 생각이 있으니까. 그 예가 예지이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다음.”

속가제자들의 성취에 대해 보고가 끝나자 벽우진이 곧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최대한 빨리 끝내서 쉴 생각이었던 것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이번에 입문한 속가제자들에게서 후원금이 제법 많이 들어왔습니다.”

“자기 자식 잘 부탁한다는 뜻이겠지. 미리 기름칠도 좀 해두고.”

벽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애초에 후원금은 부수적인 목적이었다.

진짜 목적은 곤륜파의 제자들을 늘려 규모를 키우는 것이었기에 벽우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런 것 치고는 금액이 상당합니다.”

“적당히 돌려줘. 우리가 거지도 아니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제는 안정적인 수입원도 생겼으니까요. 임대업을 통한 수입도 꾸준히 들어오고 있고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주 잘 굴려주고 있어.”

“제가 장사꾼 출신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기본이죠. 더구나 청해성에 한정해서는 아직 제 인맥이 많이 남아 있기도 하고요.”

서진후가 빙그레 웃었다.

현역에서 물러났다고 하나 그가 오랜 세월 쌓아온 인맥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서진후는 그것을 십분 활용해서 곤륜파의 재산을 불려 나가는 중이었다.

“너무 크게 욕심을 부리진 말고. 청해성을 벗어나면 분명히 견제가 들어올 거다. 그러니 특산품으로 밀고 나가야 해. 우리만이 고유한 물건으로.”

“감숙성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인접해 있기도 하고 현재 공동파의 위세가 많이 약해진 상태이니까요.”

“욕먹는다. 남의 것까지 탐한다고. 청해성 정도가 딱 좋아. 성도인 서녕 인근에만 사둬도 이득이야. 서역과 연결되는 길목 위주로 일단은 땅이든 건물이든 사 놓아.”

“알겠습니다.”

곤륜파는 청하상단이 아니었다.

또한 중원도맥을 잇는 무문이었기에 서진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제 41장. 곤륜파는 성장 중.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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