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34화 (134/325)

< 제 41장. 곤륜파는 성장 중. -02 >

“뭐야, 그 반응은? 마치 왜 알면서 바뀌지 않는 거냐고 따지는 거 같은데?”

“크흠! 흠!”

당황한 서진후가 시선을 피하며 크게 헛기침을 했다.

마치 사레라도 들린 것처럼 억지 기침을 해댔던 것이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내 성격 괴팍하다고. 나도 귀가 있어.”

“전 그래도 늘 사형 편입니다. 저와 청민 사형은 언제나 청류 사형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지금 네 모습은 누가 봐도 인위적이야.”

“험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서진후가 황급히 입술에 침을 발랐다.

안 그래도 평소에 안 하던 말을 하려니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던 것이다.

“퍽이나.”

“어쨌든 조심하십시오. 괜히 영웅호걸들이 미녀에게 빠져 허무하게 죽은 게 아닙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근데 나 도사인데?”

“혼인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노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장문인들과는 너무나 다른 게 사형이시니까요.”

서진후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생긴 것도 젊어졌지만 혈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벽우진 딴에는 냉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가 보기에는 아니었다.

젊은이 못지않게 혈기왕성한 게 벽우진이었다.

“칭찬이야, 욕이나? 한 가지만 해.”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혼담은 나보다 예지에게 많이 올 것 같은데? 예쁘지, 배경 좋지, 무공도 강하지. 그야말로 완벽하잖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일국이가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워낙에 많은 곳에서 제의가 들어와서요. 중매도 많이 들어오고.”

“슬슬 가도 적당한 나이이기는 하지.”

무가의 여식들이야 좀 늦게 가는 편이라고 하지만 서예지의 가문은 상가였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지금이 결혼적령기라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예지가 별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자기 선택이지. 자기 인생인데 당연히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애초에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키운 것이라면 모를까.”

“저희 가문은 그런 거 절대 없습니다.”

서진후가 정색했다.

정략결혼의 피해자 중 한 명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청하상단의 단주가 된 이후 정략결혼은 아예 사라졌다.

“내가 뭐랬어? 내 생각을 말한 거지. 그렇다고 예지가 노처녀도 아니고. 5, 6년 뒤에 해도 상관없잖아? 그 나이 되도 결혼하자고 남자가 줄을 설 것 같은데?”

“그거야 당연하지요.”

서진후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뿐인 손녀는 그에게 있어 보물이자 자랑이었다.

더구나 성격까지 착해서 별다른 사고도 안 치고 지금까지 자라준 고마운 아이였다.

당연히 그가 으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예지에게 맡겨. 애가 좀 똑 부러져? 자기가 알아서 잘 할 거야. 자기 기준에 맞는 남자 데려오겠지.”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인생이라는 게 가끔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지 않습니까.”

“자식걱정에 이어 손주걱정이냐? 근데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난 그쪽은 아예 몰라. 나 총각이라고.”

“······.”

서진후는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보니 벽우진에게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차라리 당민호라면 모를까.

근데 당민호에게도 말할 수가 없는 게 아마 넌지시 손자 중 한 명을 거론할지도 몰랐다.

“이제 그만 나가서 일 봐. 나 좀 쉬게. 좀 있으면 속가제자들 만나서 가르쳐야 하는데 나도 좀 쉬어야지.”

“알겠습니다.”

“예지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한 번 넌지시 떠볼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벽우진의 손짓에 서진후가 집무실을 나섰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숙소에서 나온 아이들이 똑같은 도복을 입고서 안내해주는 사람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다들 낯선 도복에 신기해하고 있었다.

몇몇은 최대한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입꼬리는 연신 귀로 향하는 중이었다.

곤륜파의 속가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하나같이 기뻐하는 것이었다.

“시험 본 장소라 익숙하지? 다들 적당히 줄 맞춰 서면 된다.”

“예!”

대연무장으로 이동한 아이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친해진 이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다른 날도 아니고 곤륜파 무공에 입문하는 날이었기에 다들 설렌 표정이었다.

저벅저벅.

설렘 반 긴장 반의 심정으로 벽우진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크지는 않지만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에 똑같은 도복을 입고 있는 아이들이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대연무장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벽우진이 아닌 진구였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험상궂게 생긴 얼굴에 몇몇 여아들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시험을 볼 때는 그래도 한쪽에 부모님이라도 계셨지만 지금은 혼자만 남아 있었기에 잔뜩 긴장한 것이었다.

“오, 오셨습니까.”

“그래.”

진구가 어려운 것은 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훈련을 받기 위해 곤륜산에 올랐던 그들은 살아 있는 지옥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승의 지옥을 만든 이가 바로 진구였다.

숙달된 조교이자 악마교관이었던 진구였기에 나이가 많건 적건 표사들은 감히 그와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히끅!

그러한 분위기에 옮은 것인지 여기저기에서 딸꾹질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몇 명은 아예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내가 못 올 곳에 왔냐?”

“그건 아닙니다만.”

“구경 왔다. 형님들이 모두 제자들 키우는데 여념이 없어서.”

유한열이 어색하게 웃었다.

비호표국주이자 이제는 청해성에서 나름 거물급 인사가 된 그였지만 그럼에도 진구는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벽우진은 그래도 말이 통하지만 진구는 아예 통하지가 않는 느낌이었다.

일단 무식하게 크고 단단한 주먹부터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그리고 장문인께서 직접 부탁도 하셨다.”

“예?”

“너희들 오늘 오후에 내려간다며? 청하상단 아이들은 어제 내려갔고.”

“맞습니다.”

“그럼 애들 누가 관리감독 해야 하겠어? 청민이? 아니면 바쁜 청범이?”

유한열이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비호표국의 인원이 하산하면 남는 인원은 정말 적어서였다.

하오문도들이야 당연히 예외였고.

“아침부터 왜 애한테 왜 그러십니까? 제가 봐달라고 한 게 그렇게 불만이셨어요?”

“크흠!”

“죄 없는 아이한테 화풀이하지 마시죠.”

“화풀이 아니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벽우진의 음성에 진구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싸돌아다니는 진구였지만 그에게도 무서운 사람은 있었다.

그렇기에 진구는 이내 표정을 풀고서 조용히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한편 벽우진의 등장에 아이들이 눈에 띠게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다들 벽우진을 보고 곤륜파에 온 것이기에 반응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벽우진의 뒤로는 서예지를 비롯하여 본산제자들 역시 나란히 서 있었기에 속가제자들은 더욱더 눈을 빛냈다.

“올라가시죠, 사부님.”

“그럴까?”

“예. 이렇게 모인 건 처음인데 한 말씀 하셔야죠.”

“흠흠!”

서예지의 말에 벽우진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장문인이 되었지만 그동안 때려 부수는 것만 했지 누구 앞에서 연설을 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명문대파의 수장들과 회의한 게 전부였지.

더구나 아직은 핏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벽우진은 살짝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자자, 박수!”

“우아아아!”

그때 장하삼이 시기적절하게 박수를 유도했다.

벽우진이 단상에 올라간 순간 먼저 박수를 치며 소리쳤던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유도에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넘어가서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고맙다.”

조막만한 손으로 열렬히 박수를 쳐대는 아이들의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묘한 눈으로 장하삼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 시선이 머문 시간은 짧았다.

“다들 잠은 잘 잤고?”

“예!”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작게 말해도 다 들려. 괜히 아침부터 소리 지르는 걸로 힘 빼지 마라. 조금 뒤면 왜 힘을 아끼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하게 될 테니까.”

여기저기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면에 기대하는 표정의 아이들도 있었다.

제대로 무공을 사사한다는 사실에 들떠 있는 것이었다.

“원래 이런 건 짧을수록 좋은 법이지. 이곳에서 지내면서 지켜야 할 규칙은 간단하다. 어기지 말아야 할 것을 어기지 않으면 된다. 가급적이면 사이좋게 지내고.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곤륜파라는 이름으로 묶인 형제가 바로 너희들이다. 또한 누나언니형동생들이고. 문제가 생기면, 이상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날 찾던가 뒤에 있는 아이들을 찾고. 괜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아, 아파도 참지 말고 바로 얘기해. 이거 중요하다. 괜히 병을 더 키우지 말고 이상하다 싶으면 즉각 찾아와. 알겠어?”

“예!”

“그럼 너희들이 기대했던 수련을 시작해볼까?”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의 의미를 아이들은 몰랐다.

자신들의 앞에 어떤 미래가 있을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으어억!”

“주, 죽겠다!”

“죽지 않아. 계속 뛰어.”

“히잉!”

스쳐지나가며 말하는 양이추의 말에 남자아이 하나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느릿하게라도 연무장을 뛰었다.

본산제자들 역시 내공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순수하게 육체의 힘으로만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아이들은 뛰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딱 한 발만 더 뛰어. 그 한 발이 경계선이다.”

대연무장의 중앙에서 벽우진이 팔짱을 낀 채로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다들 헥헥 대느라 대답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벽우진 역시 대답이 없어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고.

“확실히 근성은 다들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지도 있으니까. 게다가 남자들 같은 경우 경쟁심 때문이라도 포기하기 싫겠지.”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누가 봐도 지기 싫은 얼굴로 이를 악물고서 뛰는 게 눈에 보여서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여자아이들도 악착같이 뛴다는 점이었다.

“여아들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소혜에게 지기 싫은 거지. 비슷한 또래인 데다가 같은 여자아이니까.”

“아이들이 목표를 너무 높게 잡은 건 아닐까 걱정됩니다.”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던 청민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본산제자들이야 체력단련에 이골이 나 있지만 오늘부터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는 속가제자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혁문이가 걱정되는 것이겠지.”

“혁문이가 보기와 달리 악바리 근성이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왔고요.”

“벌써부터 자기 제자 챙기기냐? 내 제자들은 뭐 굴곡이 없어?”

“흠흠!”

청민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늘 하나뿐인 제자, 배혁문에게로 향했다.

“문제는 혁문이지. 속가제자들에게 밀리면 그게 무슨 망신이야.”

“그래서 더 악착같이 뛰는 것 같습니다.”

“일단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합격. 정확하게는 형, 누나들을 따라하는 것이겠지만.”

“이제 열 살이라는 점도 감안해 주셔야 합니다.”

“내가 뭐라고 했어? 잘했다고 했지.”

도가 지나칠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청민의 모습에 벽우진이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청민이 제자를 들이고, 가르치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새삼 곤륜파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고.

“있잖아요, 사형.”

“둘이 짰냐? 뭘 그렇게 뜸을 들여? 아침에는 청범이 쳐들어와서 날 피곤하게 하더니.”

“말하지 말까요?”

“또 왜 삐딱선을 타. 그냥 말해. 언제는 뭐 내 눈치보고 말했어?”

< 제 41장. 곤륜파는 성장 중.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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