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1장. 곤륜파는 성장 중. -01 >
여전히 의자에 늘어져 있는 자세로 벽우진이 입만 움직였다.
하지만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서진후는 담담한 얼굴로 벽우진의 앞에 섰다.
“정보망 구축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습니다.”
“호오? 생각보다 빠른데?”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기본적으로 청하상단과 비호표국에서 흘러들어오는 정보가 대부분입니다. 좀 더 다각화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아직 확실하게 체계가 잡힌 것도 아니고.”
벽우진이 앉아 있는 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으나 이제 시작하는 단계였다.
인력적으로도 많이 부족한 상태였고.
막말로 현재 곤륜파의 지휘부는 그와 청민, 서진후가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해서 제가 해볼까 합니다.”
“응? 네가?”
벽우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 서진후에게서 나와서였다.
“예. 저야 이제는 할 일 없는 뒷방 늙은이 신세이지 않습니까. 시간은 많으니까요. 사형 덕분에 최소 10년은 더 생명이 연장되기도 했고요. 육체 역시 환골탈태까지는 아니더라도 회춘이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젊어졌고요.”
“흐음.”
“그래서 제가 해보고 싶습니다. 청민 사형처럼 저도 사문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상계에서 굴렀기에 나름 조직을 잘 꾸릴 자신도 있고요.”
“금분세수(金盆洗手)를 준비해야 하는 나이에 괜히 일을 크게 벌이는 거 아니야?”
벽우진의 조심스러운 시선이 서진후에게 닿았다.
평생을 장사꾼으로 살아온 이가 바로 사제였다.
그런 사제에게 말년에 괜히 일을 시키는 것 같기에 벽우진은 선뜻 허락할 수가 없었다.
“역마살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집에 있던 시간보다 밖을 싸돌아다니던 시간이 많았습니다. 사형께서 오시기 전에야 몸이 성치 않으니 집에 있었지만 건강해지니 좀이 쑤시더라고요. 그리고 저도 제대로 한 손 거들고 싶고요. 가문이야 이제는 아들이 알아서 잘 하고 있고, 손자도 제 몫을 다하니 제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문은 다르죠.”
“괜히 말년에 너에게 일을 시키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네.”
“그렇게 따지면 사형께서 더 고생하시지 않습니까. 다들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곤륜파를 만든 게 사형이라는 것을요. 또 장문인이라는 자리를 원하시지 않았다는 걸요. 아마 다른 대안이 있었다면 사형께서 장문인의 자리에 앉으시지는 않았겠죠.”
“너나 청민이나 나에 대해서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허허허. 괜히 사형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서진후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언뜻 듣기에는 갈구는 것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까칠하고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벽우진은 그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다만 적이라고 생각되는 이에게만 가차 없을 뿐.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본파에서 제일 말이 많은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사형이 첫 순위에 꼽힐 겁니다.”
“허어.”
벽우진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동시에 가장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사람 역시 사형입니다. 사실은 제자들이 많아서 그런 것이지만요.”
“뒷말을 안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지.”
“일단 제가 기틀을 잡아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조직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름이라.”
두 다리를 여전히 책상 위에 올린 채로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묘한 반동으로 몸을 꿈틀거리면서 말이다.
“아무래도 조직명은 사형께서 직접 내려주시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제가 작명에 좀 약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아들 이름이 일국이 되었지.”
“상계에서 왕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주었습니다만. 의미는 좋지 않습니까?”
서진후가 살짝 기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스스로 판단하기에는 잘 지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너무 평범해. 그리고 의미가 좋으면 뭐해? 진부해서 기억에 잘 남지 않은데. 오히려 작명은 일국이가 낫지. 서예지, 서현기. 세련되고 좋잖아?”
서진후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서일국이라는 이름보다는 서예지, 서현기가 훨씬 나아서였다.
“저도 나름 고민한 끝에 지어준 이름입니다.”
“알고 있지. 그걸 모르는 건 아냐. 조직명이라. 비청각(秘淸閣) 어때?”
“호오.”
서진후가 눈을 빛냈다.
묘하게 입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익숙한 청(淸)자가 들어가 있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괜찮지?”
“예.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기는. 입가가 씰룩거리는데.”
“크흠! 흠!”
“너무 혼자하지 말고 적당한 인원 데려다가 써.”
벽우진이 다시 걱정하는 표정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자신이야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다른 게 없지만 서진후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이번에 좀 똘똘한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를 데려갈까 합니다.”
“직접 키우게?”
“예. 적당한 녀석이 보여서요.”
“흠.”
벽우진이 팔짱을 끼었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눈에 든 아이가 있는 것 같아서였다.
더불어 벽우진 역시 떠오르는 녀석이 있었고.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일단은 기본기가 먼저이니까요. 대 곤륜파의 제자가 되었는데 모자란 모습을 보이면 안 되죠. 사형의 명예가 걸려 있는데.”
“속가제자인데 뭐 어때.”
“그 속가제자를 그렇게 열심히 선별하신 게 사형이십니다.”
“마음에 안 드는 애를 받을 수는 없잖아. 난 피곤하고 짜증나는 애들은 질색이라고. 더구나 어떻게 보면 이제 벽돌을 차곡차곡 쌓는 단계인데 당연히 신중해야 하지 않겠어?”
본산제자들이 대들보이자 기둥이라면 속가제자들은 벽돌이었다.
하나하나가 쌓여 세찬 비바람을 막아주는 벽이 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불량품은 피해야만 했다.
작은 구멍이 큰 구멍이 되는 법이었으니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형의 기준이 따랐던 것이고요.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인원을 뽑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재능보다 듬직한 아이들이 필요해. 재능이 전부가 아냐. 인성이 그르면 절대 사문에 도움이 안 돼. 나중에 사고를 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한 게 사람입니다.”
서진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사람에 관해서는 벽우진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어서였다.
온갖 군상들을 다 겪어 보았기에, 웬만한 진상들은 다 만나 보았기에 서진후는 장담할 수 있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도 않지만, 사소한 계기에 의해서 정말 한순간에 바뀌기도 했다.
“잘 알지. 이 세상에서 사람보다 무서운 게 없으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잘 알겠어. 걱정하지 마. 나도 나이를 꽁으로 먹은 건 아냐.”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죠. 허허허.”
“일단 알겠어. 비청각은 네가 맡아.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나에게 말해.”
“알겠습니다.”
서진후가 히죽 웃었다.
안 그래도 무료함에 지쳐가고 있었는데 새로운 일거리가 생기자 즐거웠던 것이다.
나름 적성에도 잘 맞는 것 같았고 말이다.
“필요한 거 있으면 청민에게 말해서 받아가. 문파 내 대소사 중 큰일은 내가 결정하지만 자잘한 건 청민도 할 수 있으니까.”
“청민 사형에게 떠넘기려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내가 부재중일 때 곤륜파의 장문인 대리는 청민이야. 당연히 이 정도 일은 맡아줘야지.”
벽우진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듯이 콧대를 세웠다.
하지만 그 모습이 서진후에게는 일을 안 하려고 뺀질거리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사천성행 말고는 당분간 외출이 없지 않습니까?”
“예행연습 해야지. 나 있을 때 해야지 언제 하겠어? 그래야 좀 감도 익히고, 실수도 줄이고. 다 그런 거지. 아는 사람이 왜 그래?”
“허허허허.”
서진후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웃긴 게 또 틀린 말은 없어서였다.
“혁문이 때문에 정신없는 거 알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번에 속가제자로 들어온 애들만 199명이잖아.”
“예. 추가로 여섯 명 더 받으셨죠. 사형께서 하루 정도는 늦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셔서. 아, 물론 저도 거기에는 동의합니다. 타지에서 온 사람이라면 헤매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척박하고 넓은 곳이 바로 곤륜산이니까요.”
“사람이 인정도 좀 있고 그래야지. 너무 야박하면 인간미가 없어.”
“알겠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사형. 그런데.”
서진후가 잠시 말을 끊었다.
표정으로 보아하니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쉽사리 꺼내기 어려운 내용인 듯싶었다.
“말해, 편하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 청민은 그럴 자격이 있어. 곤륜파에 단 둘뿐인 장로 아냐? 청민이는 본산대표, 넌 속가대표.”
“속가대표라는 말도 있습니까?”
“뭐 어때. 내가 장문인인데. 내가 말하고, 임명하면 생기는 게 직위지. 적어도 곤륜파 내에서 나는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권력자인데.”
벽우진이 거들먹거리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웃긴 건 저렇게 말하면서도 딱히 장문인이라는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 청민이 그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58년 동안 갇혀 있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사형.”
“그러니까 쉬엄쉬엄해. 너랑 청민이마저 없으면 난 어떡해? 분명히 내가 더 오래 살 텐데.”
“안쓰러웠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네요.”
“사실인데 뭐.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망설이지 말고.”
편하게 말하라는 듯이 벽우진이 턱짓을 했다.
일단은 들어주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오문을 너무 믿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당연하지. 무림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어. 단지 이해관계가 맞느냐, 맞지 않느냐일 뿐이지. 그래서 비청단을 준비한 것이기도 하잖아. 정보력을 갖추려고. 하오문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늘 중립을 유지할 거야. 그래야 존립이 가능하니까.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조건만 맞으면 우리에 대한 정보를 어디에다가도 팔 수 있다는 뜻이지. 심지어 오독문이나 북해빙궁, 마교에다가도.”
“그렇습니다.”
서진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장사꾼으로 평생을 살아오다 보니 하오문과는 이래저래 엮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하오문을 신뢰할 수 없었다.
차라리 돈이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인지하고 있으니까. 남에게 내 목줄을 쥐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미인계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뭐? 미인계?”
이상할 정도로 진지한 서진후의 말에 벽우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서진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아무래도 이런 부분에서는 벽우진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오문주가 왜 굳이 소문주를 이곳에 앉혔을까요? 그것도 미모도 대단한 소녀를요.”
“사회경험을 위해서? 사실 내가 대하기 편한 성격은 아니잖아.”
“···그건 알고 계시는군요?”
주제가 잠깐 삼천포로 빠졌지만 서진후는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 번쯤은 거론하고 싶었던 말이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반응했던 것이다.
“알지. 나를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현재의 나를 알아야 더 나은 나로 나아갈 수 있는 건데.”
“근데 왜···.”
단 세 글자였지만 그 안에는 정말 많은 의미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니, 휘몰아쳤다.
그러자 벽우진이 도끼눈을 떴다.
< 제 41장. 곤륜파는 성장 중.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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