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9장. 늦은 것은 없다. 다만 포기하는 자만 있을 뿐. -04 >
벽우진의 말에 설아린이 한쪽에 나란히 서 있는 열 명의 호법들을 쳐다봤다.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지원자들을 주시하고 있는 그들을 말이다.
특히 평소에는 보기 힘든 비현마저도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설아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호법들은 알고 계신 건가요? 장문인의 생각을.”
“당연하지. 내가 막내야. 그런데 내 생각을 어찌 모를까.”
“으음.”
설아린이 미간을 좁혔다.
왠지 모르게 자신만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 더 이상 못 뛰겠어.”
“나도 포기. 이런 걸 왜 시키는 거야?”
“그러니까. 근골만 보면 되는 거 아냐? 난 고수들이 만지작거릴 줄 알았는데.”
전력질주를 했던 아이들이 이내 지친 얼굴로 멈춰 섰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만큼 했으면 됐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뒤로 설렁설렁 뛰거나 건성으로 대충 뛰던 아이들이 멈췄다.
애초에 부모님이 억지로 데려온 것이었기에 하나둘 달리는 걸 포기하자 은근슬쩍 묻혀가려는 것이었다.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별 거 없네.”
“그냥 산이야, 산.”
“놀 것도 없을 것 같아.”
“근데 저 누나들은 엄청 예쁘다. 만약 속가제자가 되면 저 누나들이랑 같이 지내는 건가?”
멈춘 아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바로 서예지와 심대혜가 서 있는 곳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두 소녀의 모습에 남자아이들이 소곤거렸다.
“포기한 자들은 옆으로 빠져 나오너라!”
“포기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멈추지 않았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방해되니 가장자리로 물러나!”
심사의 진행을 맡은 비호표국 표사들의 외침에 한쪽에 모여 있던 보호자들이 소리쳤다.
바로 뛰는 걸 멈춘 아이들의 보호자들이었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느낀 보호자들이 소리쳤지만 중년의 표사는 짧게 대답한 후 어슬렁거리고 있는 아이들을 대연무장의 가장자리로 몰았다.
열심히 뛰고 있는 지원자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빠르게 조치한 것이었다.
“헉헉헉!”
“으아아아!”
329명이던 인원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조금 뛰다가 포기한 애들도 있었고,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지만 끝내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쓰러진 애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뛰고 있는 누구도 대충 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호오.”
벽우진의 시선이 몇몇 아이들에게 머물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악착같이 한 발이라도 더 뛰려고 하는 아이들을 쳐다봤던 것이다.
그리고 뛰는 건지 걷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지만 그래도 앞만 보고 움직이는 애들을 보며 벽우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 근성을 보시는 건가요?”
“그것도 포함되지.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두 가지를 보신다고 하셨는데, 그 두 가지가 무엇인지요?”
“하나는 네가 말한 대로 근성이다. 끈기, 혹은 집념이라고 해도 무방하고. 다른 하나는 바로 한계다.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지켜보는 중이지.”
“아!”
설아린은 그제야 벽우진이 왜 달리기를 택했는지, 정해진 규칙이 없는지 이해했다.
애초에 한계는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에 딱 잘라 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진짜 무골이 뛰어나다면야 이런 식의 시험은 큰 의미가 없지. 그런데 천재라고 불릴 만한 무재를 가진 애들은 드물어. 괜히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하수와 중수, 고수는 어떻게 나뉘는 걸까?”
“의지력, 정신력의 차이인가요.”
“단기적으로 보면 재능의 영향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어. 시작점 자체가 다르니까.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둔재라도 꾸준히, 오랫동안 노력을 하면 천재를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럴 것 같아요.”
“그 예 중에 하나가 나이기도 하고. 요는 자신의 한계를 직접 마주하고 뛰어넘을 수 있느냐, 없느냐인 거지.”
털썩!
여기저기에서 엎어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끝내 방전되어 쓰러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몇은 쓰러졌음에도 다시 일어나서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흐으읍!”
장하삼이 바로 그 중 한 명이었다.
적당한 속도로 달리던 그도 결국에는 한계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걸음이라도 더 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저도 안 져요!”
“으읍!”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 다가왔는지 송찬승이 있었다.
애티가 남아 있는 동그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송찬승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이 많은 아저씨도 뛰는데 자신이 먼저 쓰러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반면에 장하삼은 대답할 기력도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서 양다리를 움직였다.
쿠웅!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나이에 비해 체력이 좋은 것이었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다.
더구나 나이는 어려도 명문가 출신들은 기본적으로 나름의 운기토납법을 익힌 상태였다.
즉 수준은 낮아도 어느 정도는 공력을 쌓았고, 그걸 다룰 수 있는 상태였기에 장하삼으로서는 그 격차를 좁힐 수 없었다.
“후웁!”
그러나 장하삼은 포기하지 않았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장하삼은 쓰러지지 않았다.
비록 주저앉았을지언정, 두 무릎을 꿇을지언정 엎어지지는 않았다.
두 무릎과 양손으로 몸이 쓰러지는 걸 가까스로 막았던 것이다.
부르르르!
그리고는 잠시 동안이지만 힘을 회복하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얼마만큼 뛰어야 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뛰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 줌의 미련도 남기지 않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기에 장하삼은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있었다.
한 가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태였기에 장하삼은 창백한 안색으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으으, 아저씨. 어떻게 일어난 거예요?”
“흐으으!”
어느새 한 바퀴를 더 돈 송찬승이 다가와 물었지만 장하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듣지 못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상태였기에 송찬승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대단하다.”
그 모습에 송찬승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악바리 근성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그게 송찬승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나이 많은 아저씨도 저렇게 끈질기게 버티는데 한참 어린 자신이 먼저 쓰러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만 포기하지.”
“어차피 안 될 텐데.”
“보아하니 운기토납법도 익히지 못한 모양인데.”
“방해되는데 왜 안 치우는 거야?”
내공심법, 혹은 운기토납법을 익힌 아이들이 두 사람을 스쳐지나가며 투덜거렸다.
남들에게야 대단해 보이고 안쓰러워 보일 테지만 그들에게는 장애물이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지나가면서 툭 내뱉는 그 말을 벽우진은 물론이고 장로들과 호법들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잘한다!”
“역시 우리 아들!”
“이대로 쭉 달려! 1등 하자!”
시간이 흘러 이제 뛰고 있는 아이들은 적게나마 공력을 쌓은 이들뿐이었다.
비록 조금일지라도 공력의 유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여유롭게 뛰고 있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뛰고 있는 아이의 보호자들만 신나서 떠들었다.
“더 볼 필요 없겠군.”
“지금 바로 선별하실 생각이십니까?”
“누구를 골라야 하는지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자연스럽게 벽우진의 주변으로 다가온 청민과 서진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까 설아린에게 설명해 주었을 때 둘도 같이 있었기에 어떤 기준으로 합격자와 탈락자를 구분해야하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아, 그 전에 호법님들께 한 번 여쭤봐.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나. 내가 우선권을 드린다고 약속했거든.”
“안 그래도 이쪽으로 오시네요.”
“응?”
청민의 말에 벽우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자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설백과 비현, 그리고 파풍이었다.
“장문인.”
“예, 대호법.”
“어제 장문인께서 말씀하신 우선권 말입니다.”
“사용하시게요?”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개인적으로 그 역시 설백을 비롯한 호법들이 제자들을 들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였다.
어떻게 보면 곤륜파의 장문인으로서 인재를 빼앗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벽우진은 호법들이 제자를 거두었으면 했다.
속세로 끌어 들인 만큼 작게나마 보답을 하고 싶어서였다.
“장문인께서 허락을 해주신다면 사용하고 싶습니다.”
“두 분도요?”
“예.”
벽우진의 시선이 파풍과 비현에게로 향했다.
특히 비현의 등장에 벽우진은 그 어느 때보다 눈을 반짝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세 분께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발견하셨다는데 제가 어찌 안 된다고 하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장문인.”
“부디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벽우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물론 가장 오랜 시간 바라보는 이는 비현이었다.
다른 호법들도 현재의 곤륜파에게 꼭 필요한 인재들이었지만 비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때문에 벽우진은 비현이 마음에 드는 아이를 찾았다는 게 가장 기꺼웠다.
저벅저벅.
세 사람이 각자 흩어지는 것을 보며 벽우진도 단상에서 내려왔다.
사제들이 알아서 잘 선별하겠지만 몇 명 정도는 그가 직접 합격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허억! 허억!”
“아저씨 괜찮아요? 아직도 말 못할 정도에요?”
“마, 말 걸지 마. 혀도 지쳤으니까.”
“에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혀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대(大)자로 벌러덩 누워서 창창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송찬승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장하삼은 당당했다.
“숨 쉴 때 혀는 가만히 있냐? 그리고 혀도 몸의 일부야. 지친 걸 다 공유한다고.”
“니예니예. 근데 역시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아저씨는 회복도 느린 거 같아요.”
“네가 비정상인 거야. 열두 살에 그 몸이 말이나 돼?”
“그래도 얼굴은 딱 열두 살 같지 않아요? 귀여움이 묻어 나오잖아요.”
“우웩!”
장하삼이 토악질을 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참으로 애매했다.
하필이면 송찬승이 귀여운 표정을 지을 장하삼이 구토를 했던 것이다.
“···이왕이면 말로 하죠. 토가 뭡니까, 토가.”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냐. 진짜 갑자기 올라왔다고.”
“으히.”
송찬승이 누운 채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침에 뭘 먹은 건지 토사물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어우. 미안하다. 빈속인데 이상하게 많네. 어제 먹은 게 올라온 건가.”
툭.
장하삼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주변의 흙을 모았다.
임시방편이지만 흙으로 토사물을 덮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무더기의 흙더미가 날아와 그의 토사물을 덮었다.
“어?!”
갑자기 날아온 흙더미에 장하삼이 두 눈을 끔뻑거릴 때 송찬승이 비명과도 같은 괴성을 질렀다.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이름이 뭐지?”
“허업!”
그리고 그 충격은 장하삼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왜냐하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두 사람 앞에 서 있어서였다.
“내가 온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저는 이해해요.”
“그렇단 말이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설아린의 대답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송찬승이야 어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장하삼은 누가 봐도 중년의 나이였다.
그런데 자신을 봤다고 놀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문인이시잖아요. 강북 무림의 전쟁을 끝낸 패선. 마주했는데 심장이 벌렁거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죠.”
“뭐, 그럴 지도. 근데 진짜 이름 말 안 해줄 거야?”
“자, 장하삼입니다!”
“나이는?”
“서른다섯 살입니다.”
들떴던 장하삼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나이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어서였다.
“왜 스스로 주눅 들어? 나이가 뭐 어때서. 설마 나이가 많다고 합격을 포기하려는 건 아니겠지?”
“예?”
“하삼이 너 합격이라고. 그거 말해주려고 왔어.”
“지, 진짜 합격한 것입니까?”
< 제 39장. 늦은 것은 없다. 다만 포기하는 자만 있을 뿐.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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