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9장. 늦은 것은 없다. 다만 포기하는 자만 있을 뿐. -03 >
“네가 알아서 잘 처신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너무 과대평가 한 건가?”
“아니에요.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있어요. 저희 역시 손해는 아니고요.”
“걸러야 할 애들은?”
“전음으로 말씀드릴게요.”
설아린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
하오문의 역량으로 세작이 아닐까 의심되는 이들을 모두 다 알아내서였다.
향후 곤륜파에 있어 암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었기에 설아린은 벽우진을 따라 이동하면서 가짜 신분으로 서류를 제출한 이들을 전음으로 전달했다.
“일단 알았다. 청범아.”
“예, 사형!”
빠르게 읊어주는 설아린에게 대충 대답한 벽우진이 청범을 불렀다.
그러자 청하상단의 인원들과 함께 대연무장 주변을 둘러보던 청범이 빠르게 달려왔다.
화려하고 우아한 곤륜파의 경신술을 선보이며 벽우진의 앞에 내려섰던 것이다.
“다 모은 거야?”
“예. 어제 도착한 인원 전부입니다.”
“얼마나 돼?”
“329명입니다.”
“많네.”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하는 청범을 보며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한 인원이 모여서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속가제자 모집은 앞으로 6일이나 더 남아 있었다.
“보호자들까지 합치면 더 됩니다.”
“그래 보여.”
“근데 심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이것 때문에 아이들도 많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서진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저기에서 문의하는 이들은 수두룩한데 정작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어서였다.
분명히 벽우진이 따로 생각해둔 게 있을 텐데 말이다.
“간단해. 달리기야.”
“예?”
앞에 서 있던 서진후는 물론이고 청민과 설아린도 놀랐다.
평범하지 않을 거라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단순할 줄은 몰라서였다.
“내가 왜 괜히 대연무장에 지원자들을 모았겠어? 다 공간을 쓰려고 장소를 여기로 정한 거지.”
“진짜 달리기로 심사를 보실 생각이십니까?”
“응. 그게 가장 평등할 것 같아서. 꼭 몇 바퀴를 돌아야 하는 규칙은 없어. 그냥 자기가 뛸 수 있는 만큼 뛰면 된다고 전해.”
“어···.”
서진후가 머뭇거렸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단호했다.
“내 방식이 싫으면 가라고 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알겠습니다. 바로 전파하겠습니다.”
“청민도.”
“예.”
두 사람이 발 빠르게 흩어졌다.
벽우진의 뜻을 안내자 겸 도우미 역할을 맡고 있는 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오열에 맞춰 서 있던 지원자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기색이 떠올렸다.
무섭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곤륜파이니만큼 무언가 색다르고 신선한 방법으로 선별할 줄 알았는데 흔하디흔한 달리기로 심사를 보겠다고 하자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떠올렸던 것이다.
“사부님답네요.”
“그러게.”
“요자를 붙여야지. ‘그러게요’라고.”
“진짜 그렇게 나에게서 따박따박 존대를 받아야겠어?”
은근슬쩍 서예지의 곁에 다가와 있던 양일우가 인상을 썼다.
평소에는 의젓하고 점잖은 양일우이지만 동갑내기라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서예지하고는 늘 티격태격 댔다.
“당연하지. 내가 먼저 들어왔으니까.”
“대제자는 난데?”
“인연은 내가 더 깊어.”
“끄응!”
매번 이런 식의 대꾸에 양일우는 할 말이 없어졌다.
서예지는 속가제자이지만 신분은 본산제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름뿐이기는 하지만 조부가 장로이기도 했고.
“그러니 윗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도록 해.”
“에휴.”
“대답 안 하니?”
“니예.”
“뭐라는 거야?”
서예지가 쌍심지를 켰다.
하지만 양일우도 만만치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녀에게서 멀어졌던 것이다.
“진짜 달리기라고?”
“그냥 뛰기만 하면 되나?”
“힘들면 멈춰도 된다는데?”
하룻밤을 보내서 그런지 친해진 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있던 아이들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우왕좌왕 하는 아이들에게 조언을 해준 부모님이나 보호자는 없었다.
오롯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달리기라는 말에 오히려 긴장을 푸는 이들도 있었다.
“달리기라면 자신 있지. 체력관리는 일을 하면서도 늘 해왔으니까.”
갈피를 못 잡는 아이들과 달리 장하삼은 익숙하게 몸을 풀었다.
달리기는 그가 평소에도 자주 하던 운동이어서였다.
체중관리에도 정말 좋았고, 가끔 울분이 쌓이면 자주 뛰기도 했었기에 장하삼은 자신 있었다.
“아저씨.”
“왜?”
“아저씨도 참가하시는 거예요?”
작은 체구들 사이에서 홀로 우뚝 솟아 있는 장하삼에게로 아이 한 명이 다가와 당돌하게 말을 걸었다.
다른 아이들과 키는 비슷한데 체격은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꼬마 같지 않은 꼬마의 모습에 장하삼이 피식 웃었다.
“아저씨는 지원하면 안 되냐?”
“그건 아닌데 신기해서요. 저희 아버지하고도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것 같거든요.”
“그럴 지도 모르지.”
장하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약에 그가 일찍 혼례를 올렸다면 눈앞의 꼬마만한 아들이 있었을 터였다.
“혹시 장가 아직 안 가신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왔겠지?”
“우와.”
“그 반응은 뭐야. 놀랍다는 거야, 아니면 이상하다는 거야?”
“둘 다요.”
꼬마가 히죽 웃었다.
거의 아빠뻘인 장하삼을 아무렇지 않게 대했던 것이다.
주변에 있는 아이들은 한 발짝 씩 떨어져서 훔쳐보기 바쁜데 말이다.
“이름이 뭐냐?”
“찬승이요, 송찬승.”
“넉살은 좋구나.”
“제가 또 성격이 좋죠. 그리고 아저씨를 보는 순간 느낌이 딱 왔어요!”
“무슨 느낌?”
장하삼이 피식 웃었다.
꼬마가 보통 넉살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더구나 자신은 인상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닌데 말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주변에 있는 아이들 부모들이 경계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 때문에 자신의 아이가 탈락할까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아저씨에게 근성이 있을 것 같은 느낌? 아니, 자신감?”
“오늘 처음 본 주제에. 나이도 어린 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흐흐흐흐!”
“심하게 능글맞기도 하고.”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와는 심하게 거리가 먼 모습에 장하삼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밉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제가 좀 정신연령이 높기는 하죠.”
“그게 아니라 얼굴이 두꺼운 거 같은데.”
“그래도 예의는 압니다. 엄한 가정에서 자랐거든요.”
송찬승이 언제 히죽거렸냐는 듯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근데 그 자세가 확실히 남달랐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티가 났던 것이다.
“모두 준비해 주십시오!”
“시, 시작한다.”
“으으. 나 떨려.”
송찬승과 수다를 떠는 사이 어느새 시작이 코앞에 다가왔다.
곳곳에서 비호표국의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준비하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 소리에 송찬승도 황급히 몸을 풀었다.
“읏차! 읏차!”
“이미 늦은 거 같은데?”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최적의 시기라는 격언도 있지요.”
“그게 늦은 거야.”
뒤늦게 몸을 푸는 송찬승을 일별하며 장하삼이 대연무장 한쪽에 마련된 작은 단상을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그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벽우진을.
“천하고수.”
“멋있죠? 저도 꼭 장문인과 같은 절대고수가 될 거예요. 천하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난 호호할아버지가 되더라도 괜찮은데.”
장하삼이 진심을 다해 말했다.
젊은 나이에 벽우진 정도 되는 고수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무리였다.
지금 보이는 벽우진도 겉모습만 약관으로 보이는 것이지 실제 나이는 일흔이 넘었다.
그렇기에 장하삼은 백발의 노인이 되더라도 벽우진 만큼 강해지고 싶었다.
“따로 정해진 규칙은 없습니다. 뛸 수 있는 만큼 뛰시면 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삐이이익!
시작을 알리는 호각소리에 지원자들이 일제히 한쪽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따로 조를 나누지 않았기에 그냥 단순하게 뛰었던 것이다.
그런데 개중에 벽우진의 시선을 받을 요량인지 초반부터 전력질주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떻게든 눈도장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파바바밧!
등수를 정해지는 시험이 아님에도 마치 1등을 하겠다는 듯이 전력질주를 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한두 명이 시작하자 따라하듯이 전력질주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벽우진의 시선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도대체 왜 이런 방식으로 시험을 보는 걸까요?”
“고수의 깊은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까라면 까는 거지.”
“의외로 단순하시네요. 고민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신가 봐요.”
“···넌 안 뛰냐?”
“저렇게 뛰는 게 정답이 아닌 것 같아서요. 보세요. 장문인은 쳐다보지도 않잖아요. 저렇게 열심히 추월하고 있는데.”
장하삼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보통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영악하기도 했고.
“그걸 또 용케 봤네.”
“오늘의 심사는 저에게 있어 아주 중요하거든요. 제 인생이 걸려 있는. 그리고 얼마나 뛰라고도 말 안 했지만 빠르게 뛰라는 말도 안 했으니까요. 그러니 일단은 체력 조절하면서 계속 뛰어봐야죠.”
“좋은 선택이야.”
“아저씨는 괜찮겠어요?”
송찬승이 나름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우려가 되지 않을 수가 없어서였다.
“네 앞가림이나 신경 쓰렴. 난 체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래요?”
“응.”
“그럼 승부하죠. 누가 더 오래 뛰나!”
파바바밧!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찬승이 치고 나갔다.
하지만 장하삼은 속도를 올리지 않았다.
치기 어린 승부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싶지 않아서였다.
몇 바퀴를 뛰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장하삼은 최대한 오래, 많이 뛸 생각이었다.
‘어쩌면 진짜 체력시험일지도 모르니까.’
지금이 그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장하삼은 섣부른 결정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로만. 후욱!’
깊은 심호흡과 함께 장하삼의 두 눈이 번쩍거렸다.
하품을 하면서 억지로 달리고 있는 몇몇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설아린은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는 벽우진을 흘깃거렸다.
도무지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체력심사였는데 그게 과연 중요할까 싶었다.
본산제자도 아니고 후원금만 어느 정도 지불하면 될 수 있는 게 속가제자였는데 말이다.
‘물론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제자에 대한 욕심이 상당하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현재 곤륜파의 가장 큰 약점이자 단점이 바로 인원이었기 때문이다.
청하상단과 비호표국의 규모가 커지면서 곤륜파의 지지기반 역시 크고 탄탄해지는 중이었지만 아직 다른 구파일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번처럼 속가제자 모집을 대규모로 하는 것이고.
‘달리기만으로 알 수 있나? 진짜?’
그간 보아온 벽우진을 생각하면 심사는 진짜 이것이 전부일 가능성이 컸다.
따로 들은 언질도 없었고.
그렇기에 설아린은 얼굴 가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체력적인 부분을 안 보는 곳은 없지만, 오로지 체력시험만 보는 곳도 없어서였다.
“많이 궁금한 모양이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요. 저로서는 이해가 안 가기도 하고요.”
“달리기만 시키니까?”
“예. 근데 정말 이걸로 선별이 가능할까요?”
설아린이 벽우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녀로서는 벽우진의 심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서였다.
“충분해. 내가 원하는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두 가지요?”
“응. 그리고 호법들의 얼굴도 봐봐. 나만 보지 말고.”
< 제 39장. 늦은 것은 없다. 다만 포기하는 자만 있을 뿐.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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