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9장. 늦은 것은 없다. 다만 포기하는 자만 있을 뿐. -02 >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생긴 게 그러니 누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었다.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이며 살 수밖에는.
“잔인하지만 현실이니.”
그리고 그 부분에서는 설백도 동의했다.
무재가 부족해서 아쉬운 것처럼 외모도 마찬가지였다.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환골탈태를 해도 외모는 타고난 것이기에 크게 바뀌지 않았고.
“예상했던 것보다 지원자들이 많으니 마음에 드는 아이를 찾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동생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 비인부전(非人不傳)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지라.”
“다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벽우진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까운 예로 그만 하더라도 인성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어떻게 보면 재능보다 더 말이다.
“하지만 가장 급한 건 비현의 제자겠지요?”
“정확하게는 의술입니다. 연단가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과욕은 좋지 않으니까요.”
벽우진이 차를 후르릅 들이켰다.
욕심 같아서는 비현의 진전을 이은 제자가 곤륜파에 머물러 주었으면 싶었다.
지금 같은 시대에 비현 정도의 연단가는 찾기가 드물었다.
더구나 의술 역시 상당했기에 벽우진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다.
“비현이 정말 필요한 인재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인연이 없다면 어쩔 수 없는 문제이지요.”
“비현도 고민은 하고 있을 겁니다. 자신의 대에서 명맥이 끊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요. 이번이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청해성을 넘어 감숙성과 사천성, 그 외의 다른 성에서도 지원자가 몰려오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만큼 설백은 재능 있는 이들이 제법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디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많이요. 하하하.”
“두 명이 적당하기는 하겠군요.”
세상에 의원은 많았지만 생각보다 실력 있는 이들은 적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살짝 욕심을 냈다.
제자가 두 명이라면 한 명 정도는 곤륜파에 잡아둘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것 또한 바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제 바람일 뿐이라. 또 강요할 수도 없는 문제이니.”
“잘 풀릴 겁니다. 지금처럼 말이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벽우진이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고요한 찻잔 안의 차에 향해 있었다.
잔을 들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설백은 늘 그렇듯이 담담한 얼굴로 차를 들이켰다.
이른 아침이건만 경내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부산했다.
또한 숙소 뒷마당에는 아침부터 많은 이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세상이 어찌 흘러가는지 모르지 않기에 아이들이 각자 익히고 있던 기본공으로 몸을 푸는 중이었다.
“그렇지! 아이고 잘한다!”
“좀 더 힘차게! 장문인과 장로님께 잘 보여야지!”
하지만 대부분이 비몽사몽인 모습이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부모의 닦달에 끌려나온 것이었다.
“옳지! 그렇게만 해! 그럼 합격이야!”
“합격은 무슨. 발길질에 힘이 전혀 없는데.”
“뭐야?”
물론 건전한 경쟁구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괜히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오고갔다.
아무래도 다들 예민하다보니 한 마디 한 마디에 흥분했던 것이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아이들도 덩달아 긴장하고 있었고.
“아침부터 난리도 아니구먼.”
“이럴 거라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둘째 날부터 이럴 줄은.”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가길 기원해야지요.”
지원자들을 관리감독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나온 유한열이 앓는 소리를 해댔다.
잠을 더 자고 싶어도 여기저기에서 떠들어대니 더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비호표국의 국주이기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도 했고.
오랜만에 곤륜산까지 왔는데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국주님!”
“어? 가주님 아니십니까?”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청해성에 몇 안 되는 권문세가이자 지금도 부친이 관직에 있는 송덕화가 다가오자 유한열이 깜짝 놀라며 마주 인사했다.
평범한 옷차림이지만 적어도 청해성에서는 능히 거물로 꼽힐 수 있는 인물이 송덕화였다.
한데 그런 이가 여기에 와 있는 모습에 유한열은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야 늘 잘 지내지요. 그런데 송 가주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댁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상당한데.”
송덕화의 가문은 청해성의 성도인 서녕에 있었다.
곤륜산과는 거의 끝과 끝에 위치해 있었기에 유한열이 놀라며 물었다.
“둘째 아들이 무인이 되겠다며 하도 떼를 써서 말이지요. 제가 보기에도 공부에는 영 소질이 없기도 하고요.”
“처음 뵙겠습니다. 송찬승입니다.”
“···몇 살입니까?”
“열두 살입니다. 허허허. 애가 좀 많이 크지요?”
“확실히 공부할 체격은 아니네요.”
장사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우람한 송찬승의 모습에 유한열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말이, 무공이 관심이 있다는 말이 단박에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같이 서 있던 정휴도 마찬가지인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렇지요? 허허허.”
“잘 부탁드립니다!”
송찬승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하지만 유한열은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심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서였다.
“나에게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다. 결정권은 장문인과 장로님, 그리고 호법님들만 가지고 계시거든.”
“그래도 한 마디 정도는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렇기는 한데 아마 큰 영향은 없을 겁니다.”
“허어.”
송덕화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는 얼굴을 만났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나 싶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강하게 부탁할 수가 없는 게 적어도 청해성에서는 벽우진의 성격이 너무나 자세히 알려져 있었다.
“당장 저만 하더라도 심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요.”
“국주께서도 말입니까?”
“예. 아시겠지만 장문인이 곧 곤륜파나 마찬가지니까요.”
가히 절대 권력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누구 하나 그 부분에 대해서 말을 딴죽을 걸 수 없었다.
몰락한 곤륜파를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게 바로 벽우진이었으니까.
“이제 슬슬 이동하시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군.”
“전 다른 무리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대화가 길어지자 정휴가 적당히 끊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해진 시간에 늦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렇기에 정휴가 서둘러 숙소 뒤쪽으로 향했다.
“우리도 가시죠.”
“나도 참관할 수 있는 겁니까?”
“예. 다만 조용히 지켜보셔야 합니다. 참견하시거나 간섭하시면 안 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송덕화에게 주의사항을 주지시킨 유한열은 송찬승에 이어 주변에 있던 아이들을 모아서 대연무장으로 이끌었다.
오늘의 심사가 있을 장소가 바로 대연무장이어서였다.
“어후.”
“저들이 다 제 경쟁자란 말이죠.”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대연무장의 모습에 송덕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부모들로 보이는 이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모여 있는 광경을 보자 벌써부터 기가 질렸던 것이다.
반면에 건장한 신체를 가진 송찬승은 눈을 빛냈다.
몇 백 명은 되어 보이는 경쟁자들의 모습에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호승심을 불태웠던 것이다.
“어마어마하네.”
“지원자들은 연무장으로 모여 주십시오! 보호자 분들은 저쪽에 선을 쳐 놓은 곳으로 이동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송덕화가 짧은 감상평을 내놓을 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대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지원자와 보호자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자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이왕 하는 거 후회를 남기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오너라.”
“예.”
“탈락하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
“꼭 본산제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저잣거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시끄러운 장내였지만 송찬승의 목소리는 그 소음조차도 갈랐다.
그 우렁찬 기백에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의, 전형적인 문사와도 같은 송덕화가 피식 웃으며 보호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본산제자라. 꿈이 크네.”
“멍청한 애 아냐? 오늘은 속가제자를 뽑는 날인데.”
“내 말이.”
평범한 장삼을 입어서 그런지 엄마들로 보이는 여인들이 그를 보며 쑥덕거렸다.
하지만 송덕화는 그런 말들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런 말들에 일일이 반응할 정도로 그는 한가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속가제자를 모집한다고 해서 꼭 속가제자만 뽑는다는 법은 없으니.’
위치가 위치인 만큼 송덕화는 곤륜파 내부의 사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장문인인 벽우진에게 여덟 명의 제자가 있고 장로인 청민에게는 단 한 명의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둘째가 청민의 눈에 든다면 속가제자가 아닌 본산제자가 될 수도 있었다.
‘곤륜파는 본산제자라고 해서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송찬승은 둘째이기에 꼭 대를 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왕이면 둘째 아들도 장가를 갔으면 싶었다.
자고로 남자는 가정을 이루어야 진짜 남자가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더불어 손주들도 많이 낳아주고 말이다.
“장문인이시다!”
“패선! 패선!”
“우아아아!”
이제 열두 살에 불과한 송찬승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상상까지 하던 송덕화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레와 같은 함성에 망상에서 빠져 나온 것이었다.
“진짜 젊어 보이네.”
두 명을 데리고서 대연무장으로 걸어오는 벽우진을 본 송덕화가 눈을 반짝였다.
소문대로 진짜 약관 남짓으로 보여서였다.
알려진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근데 여자는 누구지?”
똑같이 낡은 도복을 입고 있는 노인은 물어보지 않아도 장로인 청민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묘령의 소녀가 벽우진과 함께 있자 송덕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모가 대단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청해일미라 불리는 서예지는 아니어서였다.
게다가 곤륜파의 도복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옆에 여자는 누구야?”
“글쎄. 청하상단의 서예지는 아닌 거 같은데.”
“서예지도 속가제자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기는 한데 마지막까지 곤륜파와의 신의를 지킨 공을 인정받아 본산제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하더라고. 속가제자지만 장로인 조부도 있고.”
자신처럼 묘령의 여자가 궁금한 모양인지 애엄마로 보이는 이들이 소곤거렸다.
그래 봤자 옆에 있는 그에게는 다 들렸지만 말이다.
“저기 호법님들도 나오신다!”
“우와! 선풍도골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네.”
“산적 같은 분도 한 분 계시고 말이야.”
“그 분이 바로 태산권이셔, 이 사람아!”
벽우진에 이어 호법들까지 모습을 보이자 주변이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송덕화의 시선은 시종일관 벽우진에게 향해 있었다.
그에게서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일가를 이룬 이들만이 가진 존재감이랄까.
“일대종사 느낌이로군.”
보는 이를 압도하는 묘한 존재감을 가진 벽우진의 모습에 송덕화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대단한 인물임은 분명해 보여서였다.
“잘 해야 할 텐데···.”
벽우진을 일별한 송덕화가 이번에는 둘째 아들을 쳐다봤다.
여전히 호승심을 불태우는 송찬승을 말이다.
“바글바글하네.”
“예상하셨잖아요.”
“조사는?”
한편 청민, 설아린과 함께 대연무장에 도착한 벽우진은 미간을 좁혔다.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불혹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남자들끼리 모두 대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나름 오와 열을 맞춰서 말이다.
그런데 숫자가 상당했다.
“다행히 시간에 맞출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곁에 있어도 괜찮을까요?”
“네 신분에 대해서는 모를 거 아냐? 대외 활동은 전혀 안 했다며?”
“예.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정 궁금하면 네 신상에 대해서 파보겠지.”
“너무 무신경하신 거 아니에요?”
설아린이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신경을 안 쓰다 못해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였다.
< 제 39장. 늦은 것은 없다. 다만 포기하는 자만 있을 뿐.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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