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26화 (126/325)

< 제 39장. 늦은 것은 없다. 다만 포기하는 자만 있을 뿐. -01 >

“이만큼 했는데도 안 되는 거면 안 되는 거니까.”

어릴 때부터 꿈이 무인이 되는 것이었기에, 협객이 되어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게 꿈이었기에 장하삼은 형들이 주방에서 칼질을 하고 밀가루로 반죽을 할 때 동네 무관을 기웃거렸다.

어깨너머라도 내공심법을, 운기토납법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하생이 아닌 자에게 무관에서 그런 걸 가르칠 리가 없었고, 형들을 따라 주방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무공서를 살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사기꾼들이 작성한 것이라 효과 없이 돈만 날렸고.

몇 번 그런 경험을 한 후 장하삼은 한동안 꿈을 잊었다.

약관이 지나고 이립이 되면서 자신은 무인이 될 수 없다고 포기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의미 없이, 관성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그는 손님들에게서 곤륜파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정확하게는 속가제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이었다.

그 말을 엿들은 순간 장하삼은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고,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라고 말이다.

“예전의 명문대파라고 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대단한 문파이지. 만약 지금과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내가 문턱을 넘지도 못했을 문파지.”

말 그대로 지원자들로 바글바글한 경내를 둘러보며 장하삼이 중얼거렸다.

개중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장하삼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귀티가 흐르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수발을 드는 시종까지 데려온 모습에 장하삼은 내심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짝짝!

“정신 차리자!”

하지만 부러워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 사실을 35년 간 살아오면서 처절하고 확실하게 느꼈기에 장하삼은 양손으로 자신의 양 뺨을 때렸다.

그러자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으헉!”

“많이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

“고, 곤륜파의 제자십니까?”

“예.”

곤륜파 특유의 연푸른빛 도복을 입고 있는 청년의 모습에 장하삼이 퍼뜩 놀랐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말을 거니 깜짝 놀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곤륜파 제자로 보이는 청년을 빠르게 살펴봤다.

‘나이가, 좀 있네?’

장하삼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제자들과 달리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은 이십대로 보여서였다.

노안일 수도 있지만 오랜 사회생활로 얻게 된 감이 그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눈앞의 청년이 십대는 절대 아니라고 말이다.

“지원하러 오셨다면 간단하게 작성해야 할 서류가 있습니다. 어려운 것은 아니고 간단하게 자신을 증명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상정보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예.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간혹 신분을 속이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요.”

“당연히 확인해야지요. 원래부터 명문대파이던 곤륜파가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은근슬쩍 아부성 발언을 섞는 장하삼의 모습에도 도일수가 담담하게 감사함을 표했다.

자식의 합격을 위해 아부하거나 아첨하는 이들이 지금껏 적지 않아서였다.

다만 그들과 다른 점은 장하삼은 지원자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이는.

“만약에 작성한 것이 거짓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합격자라면 불합격 조치됩니다. 시작으로 거짓말을 일삼은 이를 제자로 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불합격자라면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고요. 우선 저를 따라 오시죠.”

“지원자격에 나이불문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는데, 사실인가요? 혹시 말만 그런 것은 아닌가요?”

장하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격조건에 나이불문이라고 적어 놓은 곳은 많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나이 어린 지원자를 뽑았다.

굳이 무문(武門)이 아니라 일반적인 업종에서도 말이다.

그렇기에 장하삼으로서는 나이불문이라고 공표를 했음에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 빗대어 볼 때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 나이가 중요했다면 제가 사부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스무 살입니다.”

“아직 어리시군요. 허허허.”

장하삼의 얼굴이 미약하게 굳어졌다.

서른다섯 살인 그에 비하면 눈앞에 있는 제자의 나이는 한참이나 어렸다.

그게 장하삼은 너무나 부러웠다.

고작 스무 살에 한창 떠오르는 문파인 곤륜파의 제자가 되었으니까.

“아직 실망하시기는 이릅니다. 심사는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지요. 아직은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요.”

장하삼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만약에, 혹시라는 마음가짐으로 곤륜산을 찾기는 했지만 그도 사실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그가 만약 패선이라면 자신처럼 나이 많고 몸도 굳을 대로 굳은 중년인보다 파릇파릇하고 전도유망한 어린아이를 뽑을 테니까.

하물며 그의 부모님과 형들, 동생이 일하는 식당에서도 신입을 뽑을 때 이왕이면 나이 어린 애를 뽑았다.

‘그게 부리기도 쉽고, 인건비도 적게 드니까.’

막말로 그가 진짜 운 좋게 곤륜파의 제자가 된다면 지금 안내하는 청년에게 깍듯하게 사형이라 불러야 했다.

높임말도 써야 했고.

물론 장하삼은 곤륜파의 제자만 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년 쪽은 아닐 터였다.

‘이래저래 현실만 깨닫게 되는구나.’

부모님이 하시는 식당에서는 주방서열 4위였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다시 밑바닥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장하삼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고의 망설임도 없었다.

곤륜파의 속가제자만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형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기강이라면 주방 쪽도 만만치 않으니까.’

주방에서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경력과 실력이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사회생활을 했었기에 서열에 대해서는 빠삭한 그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아니라 본산제자들이었다.

‘대부분 십대로군.’

제일 어려 보이는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도도도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장하삼은 얼굴이 무거워졌다.

심사를 보지 않아도 자신이 떨어질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였다.

“오늘은 여기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따로 정해진 방은 없고, 편하신 곳에서 오늘밤을 보내시면 됩니다. 단, 분란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저희나 비호표국, 청하상단의 사람을 찾으세요.”

“심사는 언제 봅니까?”

“내일 오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오늘 오신 분들은 내일, 내일 오신 분들은 모래에 심사를 봅니다.”

“하루면 끝납니까?”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반나절 안에 끝난다고 하셨습니다.”

장하삼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하루 만에 심사가 끝난다고 하자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다시 명문대파의 반열로 올라가는 중이니만큼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말이다.

더구나 곤륜산에 오면서 그가 들은 바에 의하면 패선은 성격과 달리 상당히 깐깐하게 제자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자기만의 기준이 확고하다고 했던가.’

여기까지 안내해준 도일수는 중원인이었지만 다른 제자들 중에는 색목인처럼 눈동자 색깔이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색목인은 아니고 혼혈로 보이는 아이들이었기에 처음 봤을 때 그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문도가라 할 수 있는 곤륜파에 혼혈인 아이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무문(武門)들이 은근히 보수적이라고 알고 있던 그에게 혼혈인 제자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쉬시길.”

“수고하십시오.”

장하삼은 몸을 돌리는 도일수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했다.

곤륜파에 찾아온 만큼, 기초이긴 하지만 나름 무공을 익힌 만큼 무인들의 인사를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진짜 무인들과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고.

그것을 도일수도 알아챈 모양인지 옅은 미소와 함께 마주 포권을 해주고는 몸을 돌렸다.

“그래도 곤륜파의 숙소에서 잠도 자보고. 나름 목표는 이룬 건가.”

물밀 듯이 계속 찾아오는 지원자들로 인해 도일수가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자 장하삼은 숙소 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비록 심사에서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더 이상 미련이 남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곤륜파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는 했으니까.

“일장춘몽이라고 하더라도, 미련은 없다.”

장하삼이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도 빙그레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가 향하는 곳은 숙소에서 가장 높은 층의 방이었다.

시끌벅적한 경내와 달리 설백의 처소는 고요했다.

일부러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에 처소를 마련해서였다.

또르륵.

평소에는 혼자만 있는 처소인데 오늘은 달랐다.

손님이 찾아왔기에 설백은 오랜만에 자신을 위한 차가 아닌 남을 위한 차를 준비했다.

“드시지요, 장문인.”

“여기에 제가 온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바쁘시니까요. 허허허.”

벽우진의 잔에 직접 재배한 차를 따르며 설백이 대답했다.

그의 성품만큼이나 고아한 차향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속가제자 모집에 관심이 상당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저도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확실히 준비해야 할 시기이시긴 하죠.”

“사실 많이 늦은 편이지요. 허허허.”

설백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앞에 앉아 있는 벽우진만 하더라도 늦은 편인데 자신은 그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았다.

그렇기에 설백이 멋쩍게 웃었다.

“저는 적당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가장 좋은 때는 마음을 먹었을 때이니까요. 그렇다고 대호법께서 건강이 안 좋으신 것도 아니고.”

“좋았었는데, 점점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세월을 못 속이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저 때문입니까?”

묘하게 돌려 말하는 것 같은 설백의 모습에 벽우진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

그런데 설백도 만만치 않았다.

대답을 아끼며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어 보였던 것이다.

“뭐, 아니라고 할 수가 없긴 하지만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문인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장문인께서 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어울려 지내는 삶의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요. 어쩌면 지금의 경지도 이루지 못했겠지요. 제자를 구하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조금의 여유도 없이 공부에 매진했을 겁니다. 그리고···.”

설백이 잠시 말을 끊었다.

가정이기는 하지만 만약 벽우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종주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는 혼자서 외롭게 죽었을 터였다.

뚫리지도 않을 벽을 노려보면서 말이다.

“홀로 죽었겠지요.”

“그건 가정일 뿐입니다. 현실이 아닌. 또한 하등 필요 없는 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문인은 늘 강인하신 것 같습니다. 특히 정신적으로요.”

“기괴한 공간에서 혼자 58년을 보내면 자연적으로 얻게 됩니다.”

“그건 좀 피하고 싶습니다. 제 나이에 58년이면. 어후.”

설백이 고개를 저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던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 젊었을 때라고 해도 설백은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 마음에 드는 아이를 찾으시면 양보하겠습니다.”

“제일 우수한 아이더라도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저 때문에 수행 중에 속세로 나오셨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이 달라서는 아니겠지요?”

“크흠!”

벽우진이 헛기침을 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사실 벽우진에게 있어 재능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재가 뛰어나면 좋기는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럼 감사히 배려를 받겠습니다.”

“물론 겹친다면 결정권은 아이에게 가겠지요.”

“진구가 제일 울상을 짓겠군요.”

설백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호법들 중에서 인상이 가장 좋지 않은 게 진구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요. 타고난 게 그러니.”

< 제 39장. 늦은 것은 없다. 다만 포기하는 자만 있을 뿐.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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