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8장. 속가제자 정시모집. -04(5권 끝) >
당민호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기긴 했으나 너무나 큰 우환거리를 남겨 놓아서였다.
결국 남만의 제 영역으로 돌아갔으니 오독문주와 사군은 칼을 갈며 복수의 날만을 준비할 터였다.
“그럼 쳐들어가면 되잖아?”
“쉽지 않아. 남만은 독초와 독충이 우글거리는 땅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독물들이 너무 많아. 본가조차도 웬만해서는 남만에 들어가지 않는데 다른 이들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
“환경적인 부분이 문제가 되는군.”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바위를 부수고 강을 가르는 괴력을 지닌 게 무인들이었지만 그래도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인간은 절대 자연을 뛰어넘을 수 없었고.
“정말 원정을 가야 한다면 만반의 준비가 필요해.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도무림은 원정을 성공적으로 실행할 결속력이 부족해.”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 구조이니까. 이건 어쩔 수가 없어. 무림맹이 결성되어도 삐꺽거리는 게 백도무림인데.”
“내 말이.”
“그렇다면 결국 지켜만 봐야 한다는 거로군.”
“다들 자신들이 입은 피해 먼저 복귀해야 한다는 쪽이라.”
당민호가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확실하게 매듭짓지 못하는 모습에 너무나 답답하고 짜증이 났던 것이다.
반면에 곤륜파는 그냥 싹 다 쓸어버렸다.
벽우진이 늘 하는 말대로.
그게 당민호는 너무나 부러웠다.
“어쨌든 결과는 나왔으니 늦게나마 칠순잔치를 열겠다? 나이 일흔다섯에?”
“못한 건 해야지. 갈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한을 남기면 쓰나.”
“그러니 나도 와라?”
“친구가 너 하나뿐인 걸 어떡해?”
당민호가 능글맞게 웃었다.
왠지 모르게 음흉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툭.
“생각 좀 해보고. 나도 일정을 좀 봐야 하니까.”
“아직 여유 있는데? 10월이면 꽤 남았어.”
“왜 이래? 나 곤륜파 장문인이야. 평소에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뒷방 늙은이가 된 너랑은 사정이 다르다고.”
“······.”
틀린 말이 아닌데 묘하게 신경을 팍팍 긁는 벽우진의 말에 당민호가 인상을 썼다.
그러나 그가 얼굴을 찌푸리든 말든 벽우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 이러기냐? 이렇게 튕길 거야?”
“일단 기억은 해둔다니까?”
“친구 생일 축하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내가 이렇게 직접 초대장을 주러 왔는데?”
“알았어. 일단 적어는 놓으마.”
“비싼 척 굴기는.”
당민호가 고개를 저었다.
어째 지난번보다 더 콧대가 높아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벽우진과 지금의 벽우진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사천당가에서 와주기를 바랄 정도로 말이다.
“그게 사실인 거 어떻게?”
“에잉!”
“넌 인정하기 싫겠지만, 어쩔 수 없어. 이게 현실이야. 독황은 잊었지만 패선은 현재진행형이지. 크크크!”
“숙소는 원래 쓰던 별채 쓰면 되지?”
당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굴욕은 당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밖에 나가면 알아서 안내해줄 거야.”
“설마 다른 곳이냐?”
“늘 같은 곳만 쓸 수는 없잖아? 이참에 다른 곳도 써 봐야지.”
“허어.”
당민호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반면에 당소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벽우진과의 대련은 물 건너갔지만 대신 그녀에게 있어 호적수라 할 수 있는 서예지가 있어서였다.
게다가 여기까지 안내해준 도일수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심심하지는 않겠어.’
당소윤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조부와 함께 옥청궁을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곤륜산이 부산스러웠다.
평소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곤륜산을 올랐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문전성시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에 어제 가까스로 곤륜파에 도착한 비호표국의 사람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연히 지원자가 많을 거라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많을 줄은 몰라서였다.
“확실히 위상이 달라지기는 한 거 같습니다. 처음 곤륜산에 오를 때만 해도 찾아오는 이가 한 명도 없었는데.”
이제는 대표두가 된 정휴가 격세지감을 느낀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은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만약 벽우진의 선택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그 역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성취도 없었을 테고 말이지.’
오랜 세월 마치 철벽처럼 굳건히 서서 그를 가로 막았던 벽을 뚫게 해준 게 곤륜파였다.
물론 곤륜파의 무공을 익히지는 못했다.
다시 익히기에는 그가 지금껏 익힌 무공을 버릴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소속이 곤륜파인 것은 분명했고, 속가제자가 됨으로써 수박겉핥기 식으로나마 곤륜파의 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 덕에 가로 막고 있던 벽을 부술 수 있었고.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강북 무림을 초토화시킨 북해빙궁을 물리쳤는데.”
“청해성의 웬만한 권문세가의 자식들은 다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계 쪽 가문들도 마찬가지고요.”
“인연을 맺어두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니까. 이미 청해성을 넘어 중원 전역에 장문인의 이름이 쭉쭉 퍼져 나가고 있지 않나.”
“안 그래도 저에게 넌지시 청탁해오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둘 뿐인 대표두이지 않나. 허허허.”
영세한 표국이었던 비호표국이 이제는 당당히 청해제일표국이 되었다.
곤륜파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자 그야말로 가파르게 성장했던 것이다.
더구나 청하상단도 옆에서 도와주었기에 비호표국은 그 어떤 표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예전에는 굽실거리기 바빴던 그가 이제는 남이 굽실거리는 걸 보는 위치가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국주님은 더 많으셨겠지요?”
“꽤 많이. 그것도 부탁을 거절하기 쉽지 않은 이들이 많았지.”
“허어.”
조용히 있던 또 다른 대표두 마종석이 장탄식을 흘렸다.
자세히 듣지 않아도 어떤 상황이었을지 눈에 훤해서였다.
“진짜 부담스러우셨겠네요.”
“맞네. 근데 생각해보니까 어려운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어렵지 않으셨다고요?”
정휴는 물론이고 마종석도 두 눈을 끔뻑거렸다.
거물들이 은근히 부탁해오는 걸 거절하기가 어렵지 않았다고 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응. 어차피 결정권자는 내가 아니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참고사항 정도를 전달하는 게 전부니까.”
“아, 그렇군요. 모두 다 넘기신 거군요.”
“험험! 장문인께 넘겼다기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이지. 막말로 내가 추천한다고 장문인께서 어이쿠 좋다 하며 받아들이겠는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시죠.”
정휴와 마종석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알고 있는 벽우진은 청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속물적인 근성도 없지 않아 있지만 곤륜파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칼과 같았다.
명확한 기준이 있기에 세 사람이 아무리 추천을 한다고 한들 벽우진이 세운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터였다.
“호법님들도 이번에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면 제자로 삼겠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
“예. 지나가다 우연히 들었습니다. 진 호법님이 다른 호법님들과 대화하는 것을요.”
“하긴. 호법님들은 연세가 상당히 많으시지.”
유한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막내인 진구만 하더라도 벽우진보다 연장자였다.
대호법인 설백의 경우 나이가 세 자리 숫자였고.
그런 만큼 지금이라도 구해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아드님을 넌지시 보여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안 그래도 데려왔는데, 별 다른 말씀이 없으셨네.”
유한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휴가 생각한 것을 그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우연을 가장해서 호법들에게 아들을 인사시켰지만 딱히 관심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벽우진조차도 그냥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린 게 다였다.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그런 게지.”
씁쓸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는 사이 비호표국과 청하상단에서 온 인원들이 빠르게 산문을 넘어오는 이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속가제자에 지원하러 온 이들을 나이에 따라 분류했던 것이다.
“청하상단도 고생이 많네요.”
“고생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다 망해가던 가문을 일으켜준 게 본파인데.”
“그, 그렇죠.”
천검문으로 인해 상단 자체가 사라질 뻔 했던 게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청하상단은 아예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었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고. 장문인께서 거둬주시지 않았다면 다들 백수나 한량이 되었을 게야.”
“그 정도까지는 안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하.”
“우리는 그렇지만 밑에 있는 애들은 장담할 수 없어. 특히 쟁자수들은.”
마종석의 말에 정휴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어서였다.
실력 있는 아이들이야 일자리를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겠지만 못 구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터였다.
“자자, 이제 그만 움직이세. 오늘 오후까지는 얼추 선별을 끝내 놓아야지.”
“첫 날에 이 정도면 마지막 날에는 더 많겠지요?”
“그만큼 우리의 사문이 커진다는 말이기도 하네. 또한 사제들이기도 하고.”
도일수에 이어 곤륜파의 제자가 된 세 사람이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도일수는 본산제자이고 세 사람은 속가제자라는 점이 달랐지만
어쨌든 지원자들이 이번에 합격해서 속가제자가 된다면 셋의 사제가 되는 셈이었다.
“사제들이라···.”
“속가제자들 중에서는 저희가 최고참이네요.”
“흐흐흐흐!”
마종석의 말에 정휴가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표국주인 유한열과 무기명제자라 할 수 있는 서예지를 제외하면 속가제자들 중에 그보다 항렬이 높은 이는 없어서였다.
이번에 50명만 속가제자로 받아도 그 밑으로 50명이나 되는 사제들이 생기는 것이었다.
“또 헛된 상상하고 있군. 사제로 들어와도 핏덩이들이야. 거의 아들 뻘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애들 갈궈서 뭐하게. 오히려 우리가 욕먹지.”
“그건 생각 못했네.”
망상을 하던 정휴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좋다가 만 느낌이었다.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른 것 같은데. 의외로 나이대가 다양한 것 같으니.”
유한열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조손지간이나 부자지간과는 달리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남자가 산문 주위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긴. 장문인께서는 나이에 딱히 연연하지 않으니시니까요.”
유한열이 바라보는 곳을 응시하던 마종석이 입을 열었다.
가까운 예로 도일수만 보더라도 나이에 상관없이 직계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다만 이립 정도로 보이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자, 우리도 일하지.”
“예. 국주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모여드는 인파에 유한열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하지만 세 사람이 합류했음에도 곤륜산을 오르는 이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장하삼은 주변을 말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많아 보이는 아이가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이었다.
그처럼 서른을 훌쩍 넘은 이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늦었나···.”
장씨 집안에서 여름에 태어난 셋째라 별다른 뜻도 없이 하삼(夏三)이라는 이름을 부모님께 받은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형들과 함께 가업을 이으며 지금껏 살아왔지만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꿈이 있었다.
그건 바로 무림인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꾸욱!
십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운명을 믿었다.
언젠가는 그의 무재를 알아보는 무인이 나타나 데려갈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환상이 깨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장하삼은 습관적으로 양손을 움켜잡았다.
“마지막이다. 오늘마저도 안 되면 깨끗이 포기하는 거야. 그 마음으로 온 거잖아.”
20년 가까이 해왔던 주방일을 내려놓고서 부모님과 형들에게는 여행을 떠나겠다고 편지만 써 놓고 곤륜파까지 온 그였다.
그런 만큼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결과는 얻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비록 그 결과가 그가 원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 제 38장. 속가제자 정시모집. -04(5권 끝)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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