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8장. 속가제자 정시모집. -03 >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진짜로 힘들지 않다는 듯이 빙그레 웃어 보인 도일수가 공손히 인사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그 모습을 벽우진은 흐뭇하게 쳐다봤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느리지만 차근차근, 확실히 성장하고 있어서였다.
“비천단이지?”
“글쎄. 근데 넌 본파에 꿀이라도 발라 놨냐? 왜 이렇게 자주 와?”
벽우진이 구박하듯 인상을 찌푸리며 한 소리를 했다.
그러나 당민호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익숙하게 찻주전자의 차를 공력으로 데워서 두 개의 찻잔에 따랐다.
하나는 자신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당소윤의 것이었다.
“허!”
그 모습에 벽우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연해도 그렇게 태연할 수가 없어서였다.
“우리 사이에 뭘 그래? 우리는 친구사이 아닌가? 꼭 도움을 주고받아야만 친구사이인가?”
“딱히 도움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필교한테서 서신이 왔더라고.”
당민호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본가에서, 그러니까 한창 그가 가주로서 활동할 때 자주 짓던 얼굴이었다.
“그건 필교의 결정이지. 네가 뭐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필교 나이도 생각해야지.”
“문외불출이라는 말 모르냐?”
“당가의 기술은 공사를 마무리 짓는 것으로 끝이다. 그 외의 창작물은 필교의 것이지. 또한 연을 아예 끊겠다는 것도 아니고 필교 나름대로 당가 쪽에 자신의 공부를 남길 생각도 있다던데.”
“···언제부터 준비한 게냐?”
찌르기 무섭게 반박하듯 쏟아지는 벽우진의 대답에 당민호가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어디 하나 빈틈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공사가 시작하는 와중에. 이왕이면 전문가가 관리하는 게 우리 쪽에도 좋으니까. 그리고 당가에서 이리로 보낼 정도면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인재는 아니라는 뜻일 테니까. 필교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흐으음.”
당민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같이 맞는 말들이라 반박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서였다.
“아쉬우면 나한테 따지지 말고 필교를 찾아가서 마음을 돌렸어야지. 이러는 건 나한테 투정 부리는 것 밖에 안 된다.”
“투정이라니. 그냥 넌지시 물어본 거다.”
“넌지시라는 단어에 진지함이 들어가 있던가?”
벽우진의 비아냥거림에 당민호가 입맛을 다셨다.
역시 입심으로는 벽우진을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오늘따라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어? 속가제자 모집하는 행사 때문에 정신없어서 그런 거냐?”
“난 원래 이래.”
“평소보다 더 까탈스러운 거 같은데.”
“난 말을 자꾸 돌리는 네가 더 수상한데.”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당소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쳐다봤다.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독 둘 다 날이 서 있는 것 같아서였다.
더구나 둘은 천하에서 독황과 패선으로 불리는 고수들이었다.
“그냥 놀러오면 안 되는 곳이냐?”
“뭐 하러 여기까지 와? 이제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밑에 애들 많은 집에 있는 게 최고 아니냐? 네 수발 들어줄 애는 여기에 없어. 우리 애들은 그럴 시간도 없고.”
“진짜 야박하게 구네.”
“내가 해준 걸 생각하면 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끄응!”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벽우진의 모습에 당민호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항복 선언을 한 것이다.
“나 바쁜 사람이야. 얼른 용건부터 말해.”
“차 한 잔 할 시간도 없다고?”
“알잖아. 곧 심사해야 하는 거.”
“원래 일 안하잖아.”
당민호의 시선이 벽우진의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더미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맨 위에 먼지가 쌓여 있나 없나를 확인했다.
“안 하기는. 다 해. 남들에게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할 거는 다 한다고.”
“그래?”
“설마 구경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네 가문은 외부인을 문내로 들이지 않잖아. 방계들도 재능이 없으면 무공 한 구절 가르치지 않는 곳이면서.”
“구경하러 온 것도 반쯤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아이가 따라올 줄은 몰랐지만.”
꾸벅.
이제야 눈이 마주치자 당소윤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그래봤자 벽우진의 시선은 창졸간에 다시 당민호에게로 향했지만.
“나머지 반을 말해. 다른 때라면 모를까 요즘 속가제자 모집하는 것으로 정신없어서 널 일일이 챙겨줄 수 없다.”
“이걸 주려고.”
“뭐야?”
“읽어 봐.”
당민호가 빙긋 웃으며 품속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된 서찰을 꺼냈다.
그것도 당가주의 인장이 찍혀 있는 서찰을 말이다.
“쓸데없이 돈 쓴다니까.”
“품위유지비의 일종이야.”
“그러시겠지.”
“도문과 속세에 속한 가문을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되지. 참고로 금색 비단으로 포장된 서찰을 받은 사람은 널 포함해서 열 명이 안 돼.”
당민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특별대우라도 해주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아니까.”
“좀 좋게 넘어가주면 안 되냐?”
“응.”
벽우진이 단칼에 자르듯이 대답했다.
속이 너무 뻔히 보여서 넘어가주려고 해도 넘어가줄 수가 없었다.
“쯧!”
“어디 보자.”
살짝 삐친 듯한 친우의 모습에도 벽우진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약간 호기심이 서린 표정으로 금색 비단을 풀어 서찰을 꺼냈다.
“영광으로 알아야 해. 이 몸이 여기까지 직접 온 것을 말이야.”
“영광은 무슨. 마실 겸 나온 거 다 아는데. 봉문하면서 짱 박혀 있었으니까 답답해서 싸돌아다니는 거 아냐?”
“말을 해도 참···.”
당민호가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그런데 중요한 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소싯적 당민호는 역마살이라도 있는 것처럼 온 강호를 유람하고 다녔었다.
“뭐야? 고작해야 이거 알려주려고 이렇게 비싸게 포장했단 말이야?”
“고작이라니!”
당민호가 고성을 터트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생일을 고작이라고 하자 흥분한 것이었다.
“생일연 하나 여는데 이 정도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다는 거지.”
“단순히 내 생일연을 여는 게 아니라서 그렇다.”
“주인공 티를 톡톡히 내겠다? 가세도 좀 보여주면서?”
“겸사겸사.”
무신경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게 벽우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당민호는 알고 있었고.
때문에 그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하긴. 칠순연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테니.”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만?”
“나야 아직 한창이지. 그리고 난 내 나이를 아직 인정 못한다.”
“내가 있는데?”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자신이라는 듯이 당민호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 모습에도 벽우진은 미간을 좁히며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만 죽으면 내 나이를 증명할 이는 아무도 없지.”
“청민도 있잖아.”
“사제인 청민이 내게 안 좋은 말을 할 리가 없었자? 청민이랑 청범은 무조건 내 편이지. 너랑은 같은 선상에 둘 수가 없어.”
“마치 나보고 일찍 죽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당민호가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대놓고 차별을 하니 섭섭했던 것이다.
“네가 한 짓을 생각해봐. 과연 누가 그동안 손해를 봤는지.”
“끄으응!”
“정보력을 빌려준다고 했는데 한 게 뭐 있어? 오독문이라 쳐부수러 갔지. 천하제일가의 이름을 손에 넣겠다고 말이야.”
“···원하는 게 뭐야?”
정곡만 쏙쏙 찌르는 벽우진의 말에 당민호가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당소윤은 옅게 웃으며 쳐다봤다.
본가에서는 그렇게 근엄하고 위엄 넘치는 조부가 벽우진만 만나면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옛말에 나이 먹으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영단을 다시 빼앗아 올까?”
“무, 무슨 소리!”
당민호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두 개를 남겨 놓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후대를 위해 남겨놓은 것이었다.
그런 만큼 절대 되돌려줄 수는 없었다.
얼마나 아까웠으면 연구조차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빼앗는다는 말은 어감이 좀 그러니까 되찾아온다는 단어가 낫겠지?”
“왜 그러는 거야?”
“계약 이행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냐. 사천당가 측에서 제대로 했어봐. 내가 이런 서운한 감정을 품었겠어?”
“···돈이 필요한 거냐?”
당민호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칼자루를 벽우진이 들고 있다는 걸 순순히 인정한 것이다.
“나 돈 많아. 아직 못 들었나 본데 내가 이번에 황하를 좀 털었거든.”
“청해성, 감숙성 쪽을 싹 다 턴 건 들어서 알고 있다. 아예 탈탈 털었다던데.”
“하지만 민초들에게 욕을 먹진 않았지. 관부도 좋아하고. 나도 좋고. 무려 일석삼조의 효과랄까.”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떻게 보면 자기 마음대로 행한 일이었지만 일단 명분이 곤륜파에게 있었고, 수적들은 세상에 해악만 끼치는 존재들이었다.
더구나 벽우진은 수채에서 턴 재화들을 결코 혼자 독식하지 않았다.
정확히 반을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인근에 거주하는 양민들에게 돌려주었기에 다시 한 번 벽우진에 대해 칭송했다.
“그런 쪽으로는 잔머리가 참 잘 돌아가.”
“잔머리라니. 다 민중을 위한 나의 하해와 같은 마음인 거지. 난 명문대파인 곤륜파의 장문이니까. 엣헴!”
다시 한 번 콧대를 세우는 벽우진의 모습에 당민호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비위가 좋은 그라도 더 이상은 봐주기가 힘들어서였다.
“제자들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장문인.”
“우리 애들이 많이 크기는 했지. 네가 꽤 발전한 것처럼.”
“저기, 장문인.”
당소윤이 몸을 비비 꼬았다.
왈가닥으로 사천성에서 유명한 그녀였지만, 한때 벽우진에게도 그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났다고 당소윤은 눈치를 살폈다.
벽우진이 자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 예전과는 다르게 고분고분하게 말문을 열었던 것이다.
“왜?”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안 돼.”
“예?”
“안 된다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당소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들어보기도 전에 거절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였다.
그런데 웃긴 건 마치 벽우진은 자신이 어떤 부탁을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 제가 무슨 부탁을 드릴 줄 알고요?”
“뻔하지. 그 할아비에 그 손녀일 텐데. 보나마나 자기에겐 이득이고 나한테는 귀찮은 걸 부탁하겠지.”
“크흠!”
당민호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창밖의 구름 가득 낀 하늘을 지그시 쳐다봤던 것이다.
“사천당가는 이미 쓸 수 있는 건 다 끌어다 썼어. 나에게, 곤륜파에게 갚을 것만 남았지.”
“네에···.”
단호한 벽우진의 말에 당소윤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당민호도 어쩌지 못하는 인물이 벽우진이었다.
한낱 후기지수에 불과한 그녀가 조른다고 될 상대가 아니었다.
“그보다 얘기 좀 해봐. 오독문은 어떻게 된 거야? 넌 자세한 상황을 들었을 거 아냐?”
“어디까지 아는데?”
“이겨서 몰아냈다는 것 정도?”
“얼추 알기는 하네. 근데 내가 보기에는 반쪽짜리 승리야.”
다시 벽우진에게로 고개를 돌린 당민호가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아들에게 듣기로 이기긴 했으나 확실하게 이겼다고는 말하기 힘든 상황이어서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오독문주와 사군(四君)이 건재해. 다섯 명 다 적지 않은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렇다고 중상을 입은 건 아냐. 즉 부하들은 싹 다 죽었지만 다섯 명은 살아있다는 뜻이지.”
“후환이 남았군.”
벽우진은 왜 당민호가 반쪽짜리 승리라고 표현했는지 이해했다.
그 다섯 명을 놓쳤다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었다.
언제라도 다시 세력을 일굴 수 있을 테니까.
차라리 부하들이 많이 남았더라도 다섯 명을 처치하는 게 중원무림에게는 훨씬 더 이득이었다.
“악착같이 추격했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고 하더라고.”
< 제 38장. 속가제자 정시모집.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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