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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123화 (123/325)

< 제 38장. 속가제자 정시모집. -02 >

청민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홀로 폐허가 된 사문을 지키고 있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는 내년을 장담하지 못했었다.

그 정도로 건강은 물론이고 심적으로도 매우 힘든 상태였다.

한데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건했다.

“큰 사고만 없으면 30년 정도는 어찌어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전에 환골탈태하면 되지. 반을 이뤘는데 나머지 반을 이루는 게 어렵겠어?”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흠.”

벽우진이 의자에 늘어진 채로 청민을 쳐다봤다.

언제 흐리멍덩했냐는 듯이 벽우진의 눈빛은 진지했다.

“하늘의 허락을 바랄 게 아니라 네가 뚫고 나가야지. 뭔 허락을 받느니 마니 하고 있어. 네 인생은 하늘이 결정짓는 게 아냐. 네가 만들어 나가는 거지. 하늘은 네 인생에 조금도 관심이 없어. 그냥 지켜볼 뿐이지. 하늘의 뜻이니 뭐니 하는 건 다 개소리다. 인간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해. 하늘의 뜻을 어찌 인간이 짐작할 수 있겠어?”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자기 편하게 해석한 헛소리에 불과해. 차라리 그 시간에 널 가로막고 있는 벽이나 깨부술 궁리나 해.”

“가끔 사형은 참 멋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무공에 관해서는 더욱더요.”

“난 원래 멋있었어.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매력이 철철 넘치지.”

청민의 칭찬에 벽우진이 콧대를 세웠다.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했던 대로 무공에 있어서 벽우진은 대종사였다.

심지어 곤륜파의 무공을 전부 다 익히고 있기도 했고.

‘잠자는 시간을 빼면 모든 시간을 무공을 수련하는데 썼다고 하니까. 그것도 무려 58년 동안이나 말이지.’

말이 58년이지 그 시간은 강산이 무려 여섯 번 가까이 바뀔만한 시간이었다.

더구나 벽우진이 말하기를 시공간이 비틀려 있기에 그것보다 더 흘렀으면 흘렀지 적게 흐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했다.

‘난 버티지 못했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뺀질거릴 것 같은 벽우진이었지만 적어도 무공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또한 근성과 오기 역시 엄청났기에 그 말도 안 되는 공간에서 버티는 게 가능했을 터였다.

단지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기에 뺀질거린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사형께서 그래도 나름 객관적으로 자신의 외모를 보고 계시는 것 같아서 참 다행인 것 같습니다.”

“남자는 외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건 바로 매력이야. 난 그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고.”

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성이 없어서였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를 다 했으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사형.”

“와, 지 할 말만 하고 가는 것 보소.”

“이제 저에게는 가르쳐야 할 제자가 있지 않습니까? 제 개인수련에, 문파 내정에, 거기다 혁문이까지 가르치려면 시간이 모자랍니다.”

“허!”

합당한 명분에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줄은 몰라서였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

벽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뚱한 표정으로 손만 휘저었다.

그러자 청민이 옅게 웃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진짜 많이 바뀐 거 같아요.”

“풍광은 그대로지. 다만 세인들의 평가와 인식이 달라졌을 뿐.”

“저는 대충 예상했지만 말이죠.”

당소윤이 과거와 달리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산길을 보며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에는 이 산길에 사천당가의 사람들만 있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반 양민들이 상당히 많았다.

속가제자를 모집한다는 소식 때문인지 곤륜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에도 사람들이 꽤 많은 상태였고.

“예상 못하는 게 이상하지. 그 녀석이 있는데.”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해요.”

“패선이라는 별호가 붙을 만 하지. 그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민호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친우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패선이라는 요상한 별호가 붙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좀 독특한 별호이기는 한데 또 계속 듣다 보니 입에 익었어요.”

“그게 바로 별호니까. 나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장문인을 잘 아시니까요.”

“한데 왜 따라온 것이더냐?”

당민호가 묘한 눈빛으로 옆에서 걷고 있는 손녀를 쳐다봤다.

자신이야 벽우진과 친우사이라지만 당소윤은 딱히 깊은 관계가 아니어서였다.

기껏해야 몇 번 본 게 전부인.

“집에 있기 불편해서요.”

“불편할 게 뭐 있더냐? 집인데. 누가 너한테 뭐라 하는 것도 아니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지만, 귀찮을 정도로 편지가 많이 오잖아요.”

“허허허허.”

얼굴 가득 귀찮은 기색이 가득한 손녀의 모습에 당민호가 웃었다.

누구에게도 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인기가 많으니 기분은 좋았던 것이다.

“할아버지도 싫으시잖아요.”

“난 좋은데. 내 손녀에게 연정을 품은 이들이 많다는데 어찌 싫을까. 오히려 관심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제 성에 차는 이는 없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적당히 있는 게 좋아. 게다가 네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기도 하고.”

당민호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당소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본가의 위세가 높아져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저 그런 가문의 여식이었다면 이 정도의 관심까지는 없었겠지. 물론 우리 손녀의 미모가 있으니 구애편지야 끊임없이 왔을 테지만.”

“병 주고 약 주시는 건가요.”

당소윤이 흥흥거렸다.

조부의 말이 마치 약올리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그녀도 어느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다.

사천당가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자신의 가치 역시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있는 그대로를 말해주었을 뿐이다.”

“새로 받아들였다는 제자들도 강하겠죠? 서 소저처럼요.”

“아마도. 이미 수적들을 상대로 상당한 활약을 펼치기도 했고.”

서예지만 하더라도 단기간에 당소윤 못지않은 고수로 성장했다.

게다가 당민호는 비천단과 상청단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새로 들였다는 제자들 역시 비천단을 하사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으니까.’

당민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직접 비천단과 상청단의 효능을 봤기에 새로운 제자들의 활약이 그는 놀랍지 않았다.

동시에 당민호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상청단은 불가능하겠지만 비천단은 구할 수만 있다면 더 구하고 싶어서였다.

‘딱 세 개만 더 있으면 좋겠지만, 욕심이겠지.’

당민호는 이게 자신의 욕심임을 너무나 잘 알았다.

지난번의 계약 역시 벽우진이 친구이기에 많은 부분을 양보해 주었다는 것도.

비천단 같은 영단을 일반 철검처럼 찍어 내듯이 만들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당민호는 욕심이 나지만 그것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정도 염치는 있었으니까.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응? 무엇을 말이더냐?”

“제 말 못 들으셨죠?”

“허허허. 잠깐 우진이를 생각하느라고. 뭐라 물었더냐?”

당민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비천단을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빠진 듯해서였다.

“곤륜파요. 곧 구대문파에 다시 오르겠죠?”

“일단 빈자리가 있으니. 하지만 형산파와의 관계가 문제다.”

당민호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역사와 전통을 생각하면, 지금의 위상을 감안하면 곤륜파는 당장 구대문파의 지위를 손에 넣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북해빙궁의 침략으로 공동파, 점창파, 종남파, 화산파가 멸문지화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니까.

게다가 태산북두라 불리던 소림사 역시 반파 이상의 피해를 입은 상태였기에 곤륜파가 공석이라 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제가 보기에는 형산파에 밀릴 것 같지 않은데요.”

본산을 잃은 문파들만큼은 아니더라도 형산파 역시 오독문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곤륜파를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라고 당소윤은 생각했다.

“단순한 전력으로 보면 밀리지 않겠지. 하지만 인원이 너무 적어.”

“일인문파도 있는데요.”

“그렇긴 한데, 글쎄다. 이 문제는 민감한 문제라. 하지만 근시일 내에 제자리를 되찾을 것은 분명하지. 그 시작이 속가제자들을 모집하는 것일 테고.”

“시기가 시기인 만큼 꽤 많은 이들이 지원할 것 같아요.”

당소윤이 그리 말하며 주변을 훑었다.

단순히 사당을 방문하기 위한 사람들이라고 하기에는 나이 어린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마치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곁눈질하기도 했고.

“생각이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일단 입문과 동시에 일대제자와 같은 항렬이니까. 장로라고 해봐야 둘뿐이고.”

“게다가 떠오르는 신성도 있고 말이죠.”

“일흔다섯 살 먹은 노물을 신성이라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만.”

당민호가 친우를 신랄하게 까댔다.

하지만 그 모습에 당소윤은 오히려 웃었다.

이렇게 태격태격 하는 게 둘의 일상이어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자네가 우진이의 막내제자인가보군.”

“도일수라고 합니다.”

“허어.”

많은 사람이 오가는 산문에서 유일하게 곤륜파의 도복을 입고 있는 도일수가 다가와 인사를 하자 당민호가 눈을 빛냈다.

사천성에 있었지만 곤륜파에 대한 소식은 주기적으로 받고 있었기에 단번에 도일수를 알아봤던 것이다.

그런데 도일수를 본 당민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손에 박힌 굳은살이 장난이 아니어서였다.

‘수없이 벗겨지고 벗겨진 손이로군.’

보고 받았던 대로 도일수는 평범했다.

수재도 귀재도 아닌 말 그대로 범재의 화신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특징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무재가 아예 없지만은 않다는 것 정도.

‘지극히 평범한 아이로구나.’

어디를 봐도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신체적으로 봤을 때였다.

오성이나 끈기, 집중력 이런 것들 역시 재능의 한 부분이었다.

만약 보이지 않는 이 부분들을 도일수가 풍성하게 가지고 있다면 말은 달라졌다.

‘그렇다고 해도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기는 쉽지 않겠지만 우진이에게는 그 해결책이 있으니.’

다른 무문이었다면 도일수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터였다.

이왕이면 근골이 좋은 아이가 고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서였다.

더구나 도일수는 무공에 입문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기도 했고.

“모시겠습니다.”

“내가 도착할 시간을 알고 있던 모양이구나.”

“저는 그저 사부님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인자하게 웃으며 묻는 당민호의 말에 도일수는 사무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그러자 당소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성질을 부리지는 않았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당소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가자꾸나.”

“그럼.”

잘 참았다는 듯이 당민호가 손녀의 어깨를 다독일 때 도일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중간 당민호와 당소윤에게 집중되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도일수는 신경 쓰지 않고 두 사람을 옥청궁으로 데려갔다.

똑똑똑.

“사부님. 손님들을 데려왔습니다.”

“들어 와.”

벽우진의 허락에 도일수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이끌고서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랜만이야.”

“시간이 꽤 흐르긴 했지.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앉으라는 말도 안 하냐?”

“말 안 해도 앉을 거잖아?”

까칠한 대꾸에도 당민호는 넉살 좋게 의자를 빼내서 앉았다.

그리고는 당소윤에게도 눈짓으로 앉도록 지시했다.

“저는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안 그래도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텐데.”

“아닙니다.”

도일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게 다 사문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도일수는 자신이 하는 일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우면 모를까.

“조금만 더 고생해줘.”

< 제 38장. 속가제자 정시모집.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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