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22화 (122/325)

< 제 38장. 속가제자 정시모집. -01 >

계획했던 일정을 모두 마무리 짓고 벽우진은 곤륜산으로 복귀했다.

흑구채도 말끔히 털어먹고는 미련 없이 곤륜산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지.”

평소 감정변화가 거의 없는 벽우진인데 오늘은 달랐다.

얼굴 가득 설레는 표정을 지으며 청민이 열심히 작성한 기획안을 찬찬히 읽고 있었다.

“언제까지 우리가 소규모, 소수정예로 나갈 수만은 없으니까. 명성은 갖춰졌으니 이제는 규모를 키울 때가 됐지. 암.”

벽우진이 감회가 새로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 시공간의 진에서 탈출한 후 그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얼마의 세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적어도 수십 년의 세월을 갇혀 있었다는 것을.

때문에 벽우진은 그 빌어먹은 진에서 빠져 나가면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면서 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런 벽우진의 바람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 깜짝 놀랐었지.”

기억 속의 곤륜파는 사라지고 폐허가 된 사문의 모습에 벽우진은 할 말을 잃었었다.

과거의 영광이었다는 듯이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청민이 곤륜파의 터를 홀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며 그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결국 여기까지 왔지.”

벽우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 청민뿐이던 곤륜파는 더 이상 없었다.

이제는 제법 일대제자다운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었고, 청범과 청하상단이 있었다.

자신에 이어 청민도 제자를 받아들였고 말이다.

“율석이도 있고, 호법들도 있으니.”

이제 시간이 흘러 4년 정도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었다.

사람의 정이라는 게 뜻대로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였다.

게다가 호법들은 나이가 많은 만큼 맥을 이을 제자도 찾아야했다.

비인부전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맥이 끊어지는 것보다는 기준에 못 미치더라도 받아들이는 게 나았다.

그렇게 이어지다 보면 정작 딱 맞는, 오히려 과분한 이에게 맥이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 부분은 차차 생각해도 되고. 일단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사형.”

“들어 와.”

“너무 바로 대답하는 거 아닙니까?”

문을 열며 들어오던 청민이 헛웃음을 흘렸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허락이 떨어져서였다.

“너인 거 알고 있는데 뭐 하러 시간을 끌어. 물론 내가 쫌 바쁜 것도 이유 중 하나이고.”

“사형께서요?”

자연스럽게 한 쪽 자리에 앉으며 청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농땡이와 게으름의 대명사인 벽우진이 바쁘다고 하자 어이가 없어서였다.

“왜 그래? 나도 할 일은 다 해. 개인수련도 빼먹지 않게 하고. 나보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사람은 진짜 몇 없을 걸? 율석이는 그래. 나도 인정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진하는 배율석은 벽우진도 인정했다.

아무리 기본공을 익혔다지만 대장간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 가끔 과로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여서였다.

물론 찰나의 순간에 명작이 나올 수도 있기에 그리 하는 건 이해하지만 배율석의 나이가 있는지라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류의 양이 그대로인 것 같은데요?”

“꼼꼼히 봐서 그래, 꼼꼼히. 근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일이라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좋은 일이지만요.”

“네 선에서 해결 안 돼?”

벽우진이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청민은 넘어가지 않았다.

벽우진이 얼마나 강철체력인지 그가 가장 잘 알아서였다.

단지 귀찮아 하는 것뿐이었다.

“가능은 하지만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서면보고로 해도 되잖아.”

“안 보시잖아요.”

“···보기는 봐.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너도 봐봐. 내가 봐야 할 게 한두 장이야?”

벽우진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러나 청민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 문파의 장문인이라면, 수장이라면 이것 역시 감내해야할 부분이었다.

“저는 사형을 믿습니다. 모든 걸 하실 수 있다는 것을요.”

“아니. 믿지 마. 나 역시 일개 인간에 불과하니까.”

“신선이시잖습니까. 최소 반선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과대평가야.”

벽우진은 맞아도 인정하기 싫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여기서 인정했다가는 더 고역스러운 일을 맡을 것 같았기에 벽우진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두고 보면 알겠죠.”

“어째 점점 더 능구렁이가 되어 가는 것 같아. 순수했던 청민이 그립구나.”

“사람은 다 변하기 마련입니다.”

“에휴.”

벽우진이 진심을 담아 깊게 한숨을 쉬었다.

갓 나왔을 때의 청민이 정말로 그리워서였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해. 어차피 내가 안 듣겠다고 해도 할 거잖아.”

“맞습니다.”

청민이 씩 웃었다.

다른 이들은 이렇게 따박따박 대답할 수 없지만 그는 가능했다.

호법들 중에서는 진구가 유일했고.

“뭔데 이 아침부터 찾아온 건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 두 가지나 있다고?”

“예.”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나쁜 일이라면 머리가 아파오겠지만 좋은 일은 달랐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에 벽우진이 얼른 말하라는 듯이 눈빛으로 보챘다.

“예상했던 것보다 속가제자 모집에 대한 반응이 격렬합니다. 청해성에서 이름 좀 날린다 싶은 권문세가들은 다 문의를 해온 상태입니다.”

“그렇게 후손들이 많다 이건가?”

“기본적으로 부인과 첩을 두니까요.”

“근데 많으면 뭐해? 실속이 있어야지.”

확실히 좋은 소식이기는 했지만 벽우진은 이내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왔다.

잘 먹고 잘 자며 잘 싸면서 자란 아이들인 만큼 신체적으로 건강하기는 하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무재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사형께서는 무재는 많이 안 보시지 않습니까?”

“대신 인성을 보지. 개차반이나 싸가지 같은 놈들은 무조건 걸러야 해. 괜히 한 놈 때문에 다른 애들까지 물들 수 있어. 썩은 콩 하나가 멀쩡한 다른 콩들을 썩게 만드는 것처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인원이 적은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벽우진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몸은 의자에 눕듯이 널브러진 상태였다.

“감숙성과 사천성에서도 문의가 제법 있었습니다. 느낌으로 보건데 두 곳에서도 많은 이들이 지원하러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꽤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그래도 본산이 멀쩡한 청성파와 아미파가 있는데 여기까지 올까?”

“대신 중진이 될 수 있는 기회이지 않습니까. 10년만 수련하면 본파의 중역이 될 수 있으니까요. 더구나 사형께서도 계시니.”

“야망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지. 너무 과하면 문제가 되지만. 두 번째 좋은 소식은?”

속가제자 모집에 많은 이가 지원한다면 벽우진으로서는 좋았다.

일정이 고달파지기는 하겠지만 그마저도 벽우진은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속가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건 그 만큼 곤륜파의 명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니까.

벽우진이 직접 황하수로채를 쓸어버리고 다닌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본보기를 보여주어 경고하는 것이었지만.

“사천당가에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왜? 따로 챙겨줄 것이 있데?”

“그런 게 아니라 태상가주께서 본파를 방문할 예정이랍니다.”

“···민호가?”

벽우진이 미간을 좁혔다.

왜 또 오는지 이유가 짐작가지 않아서였다.

“저도 방문 목적이 궁금합니다.”

“재능 있는 아이를 빼내려고?”

“···사천당가의 무공은 문외불출이지 않습니까. 최소한 방계라도 되어야 가문의 무공을 허락하는 곳이 사천당가입니다.”

“그럼 데릴사위?”

“사형을요?”

벽우진의 눈매가 더 이상 치솟을 수 없을 만큼 솟구쳤다.

그 정도로 어이가 없는 발언이어서였다.

“뭐라고?!”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지금 나를 뭘로 보고!”

“그런데 태상가주님의 눈빛이 심상치 않기는 했습니다. 손녀와 사형을 번갈아 쳐다보는 게 제 눈에만 몇 번이나 걸렸습니다.”

청민이 격노하는 벽우진을 향해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그러나 벽우진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속물이라고 해도 친우의 손녀를 처로 앉힐 정도로 막나가지는 않았다.

나름 도의를 지키는 이가 바로 그였다.

“헛소리하지 말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 나이가 일흔다섯이다. 결혼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저 쪽에서 원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략결혼이야 명문세가에서는 늘 있는 일이니까요. 더구나 사형의 무명이 천하에 알려지기도 했고요.”

청민은 만약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벽우진이 펄쩍 뛰는 것처럼 당민호 역시 손녀사위로 벽우진을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서 끔찍한 말을 하고 있어.”

“그래도 좋은 소식인 건 맞지 않습니까. 이제는 한 명만 남은 친우인데요.”

“썩 좋은 친우는 아니지만.”

벽우진이 예전에 했던 계약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벽우진도 완전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비천단과 상청단을 준 대가로 충분한 것을 얻었으니까.

‘일단 필교가 남는다고 했으니.’

상급자가 수두룩한 사천당가와 달리 곤륜파에서 기술자는 당필교가 유일했다.

게다가 이번에 배율석이 터를 잡게 되면서 같이 어울릴 사람도 생겼기에 당필교는 사천당가에서 생활하던 때보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저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합당한 거래이기는 했지만, 사실 당가가 좀 더 이득이었으니까요.”

“내 일부러 빚을 남겨둔 것이지. 그걸 이자까지 합쳐서 받아올 날이 있을 게다.”

“저도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안 되면 혁문이에게라도 전달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원한도 잊으면 안 되지만 직접한 선행 역시 기억해야해. 그래야 나중에 은혜를 갚는다고 할 때 어버버 대지 않지.”

“맞습니다.”

이럴 때는 참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청민이 벽우진에게 많이 물들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래서 언제 온다고 그러는데?”

“내일 도착한답니다.”

“···내일?”

벽우진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출발할 때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도착 하루 전날에 알려주는 게 무슨 심보인가 싶어서였다.

“원래는 더 일찍 보냈다고 하는데 중간에 전서구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거 확인하느라 시간이 늦었답니다.”

“아, 그래?”

전서구라고 늘 완벽하지는 않았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비둘기일뿐 맹금류에게 사냥을 당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아예 전서응을 길들이는 경우도 있었고.

속도도 빠르지만 일단 비둘기보다 안전성적인 부분에서는 전서응이 훨씬 뛰어났다.

“그렇게 말하니 저로서도 따질 수가 없더라고요.”

“잔머리일 가능성은?”

“너무 삐딱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굳이 사천당가가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천하의 사천당가에서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그러겠어. 이제는 남궁세가도 거의 따라잡았는데.”

“이번에 무명이 상당합니다. 당가주가 독절(毒絶)이라 불린다고 하더라고요.”

청민이 말하면서 살짝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막 강호에 이름을 알린 그와 달리 한참이나 어린 당문경은 어느새 천하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어서였다.

“상청단을 먹었는데 그 정도도 안 되면 재능이 없는 거지. 민호가 곁에서 도와줬을 텐데.”

“그런 거겠죠?”

“길게 봐, 길게.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아.”

“흐음.”

청민이 침음을 흘렸다.

한창 젊을 때의 육체를 지니고 있는 벽우진에게야 많은 시간이 남아있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비천단으로 환골을 이루기는 했지만 길어 봐야 30년이 한계일 터였다.

‘30년도 엄청 긴 세월인데 말이지.’

< 제 38장. 속가제자 정시모집. -01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