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7장. 보고 싶었다. -04 >
흑구채가 상상조차 못한 반격에 우왕좌왕 할 때 도룡선은 어느새 포구에 닿아 있었다.
화살비가 쏟아질 때 배들은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여 포구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룡대가 몸을 날렸다.
설아린의 지시에 나무 방패를 암기처럼 사방팔방에 던져대며 흑구채를 공격했던 것이다.
“우리도 가자!”
“예!”
“다 쓸어버려주마!”
방금 전의 화살 공격에 식겁해서 그런지 아이들의 기세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벽우진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자연스레 노기와 함께 적개심이 치솟았던 것이다.
하지만 흥분한 모습과 달리 아이들은 지극히 냉정하게 전투를 치렀다.
지금껏 수 없이 연습했던 대로 손발을 맞추며 합격진을 이루고서 흑구채를 공격했던 것이다.
콰앙! 쾅!
물론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완숙한 절정지경에 오른 서예지와 도일수는 단독으로 움직였다.
둘 다 태청검법을 자유자재로 펼치며 덤벼드는 수적들을 도륙했던 것이다.
“읏차!”
무룡대에게 뒤지기 싫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수적들을 쓸어버리는 제자들의 모습에 벽우진도 몸을 일으켰다.
뱃전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던 그가 가볍게 몸을 날려 포구에 착지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장문인.”
“그럴 것까지야.”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장문인을 모셔야 하지 않을까요?”
“애들 지휘는 하지 않을 모양이지?”
뒷짐을 진 채로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던 벽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바로 무룡대가 피 튀기며 싸우는 곳을 힐끔 쳐다봤던 것이다.
“무룡대주와 부대주가 있으니까요. 실전 경험은 저도 충분히 쌓았고요.”
“단체전 경험이 필요할 때이긴 하지. 지금 같은 토벌전이 아닌 이상 쉽게 얻을 수 있는 경험은 아니니까.”
“패, 패선!”
“오냐. 이 몸이 패선이니라.”
곳곳에서 펼쳐지는 살벌한 전투에도 마치 마실이라도 나온 양 유유히 걸음을 옮기던 벽우진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싱긋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그 대답을 들은 장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음부터, 벽우진이 뱃전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어서였다.
창졸간의 그 마주침 때문에 지금껏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고.
“꼭,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냐!”
“그럼 난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야 했냐?”
“······!”
똑같이 받아치는 벽우진의 말에 독사를 닮은 듯한 삼각형 모양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흑구채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하니 이렇게 맞받아칠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나 설아린은 이런 광경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기에 뒤에서 조용히 웃었다.
“내가 수채들을 깨부수고 다니는 걸 알았다면 왜 이러는지도 눈치챘을 텐데? 그 정도 머리는 다들 가지고 있잖아? 설마 생각하는 게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겠지?”
“왜 당신 정도의 고수가···.”
“정말 모르겠느냐?”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벽유진이 심유한 눈빛을 뿌렸다.
사방이 난리도 아니었지만 벽우진만은 홀로 전투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고고한 기도를 뿌리며 서 있었다.
이런 게 진짜 고수라는 듯이 주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한 번쯤은,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잖아! 너 정도의 고수가 뭐가 아쉽다고! 곤륜산에 그냥 있어도 되건만!”
“그래서 나왔어. 너무 동네북이 된 것 같아서. 네들 같은 놈들에게 경고도 좀 할 겸. 요즘 말로 그런 말이 있더라고. 가만히 있으면 호구가 된다고. 난 그 말이 정말 싫거든. 아량? 용서? 물론 정도(正道)에 필요한 요소이긴 하지. 근데 그건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소리야. 사람이길 포기한 놈들에게까지 그 범위를 넓힐 필요는 없지.”
흑구채주가 이를 악물었다.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더구나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말 그대로 끝장을 보자는 것이기에 흑구채주가 반평생을 함께 했던 낭아봉을 움켜잡았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나를 만만하게 본 것을 말이야.”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말고 진짜 날 후회하게 만든 다음에 그 말을 꺼냈으면 더 멋있었을 텐데 말이지.”
“넌 다치지 않겠지. 하지만 제자들은 과연 멀쩡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당연히. 내가 어떻게 키운 아이들인데. 평소에는 순한 강아지 같은 아이들이지만 적 앞에서는 달라. 맹수가 되어버리지. 내가 그렇게 키웠으니까.”
순둥순둥한 얼굴들과는 달리 제자들의 실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비천단으로 내외공을 급격히 끌어 올린 후 기초부터 탄탄히 다졌다.
거기에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기에 현재 제자들의 수준은 강호명문의 후기지수들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쌔애애액!
하지만 흑구채주는 그런 벽우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벽우진의 말을 듣는 시간에 공격을 한 번이라도 더 하는 게 이득이어서였다.
특히나 지금처럼 방심하고 있을 때야말로 그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
스윽.
그러나 맹렬한 파공음을 토해내며 뻗어오는 흑구채주의 낭아봉을 벽우진은 고개만 까딱이며 피했다.
딱 낭아봉의 타격점만큼 고개를 꺾은 것이다.
물론 낭아봉이 끌고 온 날카로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지만 정작 벽우진이 입은 상처는 없었다.
“치잇!”
그 모습에 흑구채주가 아쉬운 얼굴을 잠시 지었다가 재차 봉을 휘둘렀다.
쭉 뻗은 상태에서 벽우진의 머리를 향해 횡 베기를 하듯 팔을 휘저었던 것이다.
스르륵.
그러나 순식간에 이어지는 연계기에도 벽우진은 미끄러지듯이 흑구채주의 공격을 피해냈다.
흑구채주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복장 터지게 미꾸라지처럼 회피했던 것이다.
파바바밧!
하지만 흑구채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 공세가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십존 중 둘을 때려잡고 무려 그들이 경배하는 북해빙궁주조차도 처치한 이가 벽우진이었다.
그런 만큼 흑구채주는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
도망이라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것을 버렸다.
내빼다가 꼴사납게 잡히느니 희박하더라도 싸우다가 죽는 걸 선택했다.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는 말처럼 어쩌면 천운이 따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더구나 방심한 고수를 하수가 쓰러뜨리는 경우는 무림에서 의외로 많았다.
‘심장과 목, 혹은 머리를 노려야 해. 일격필살만이 살 길이다!’
흥분한 듯 보였지만 흑구채주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한 상태였다.
또한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집중력 역시 극도로 상승해 있었다.
슈욱! 슈우욱!
매서운 파공성과 함께 낭아봉이 연신 허공을 꿰뚫었다.
강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며 벽우진의 사혈만을 노렸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허초였고 진짜는 머리와 목, 심장과 단전이었다.
‘제발 하나만! 한 번만 맞으면···!’
흑구채주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낭아봉을 휘둘렸다.
평생을 고련한 절초들을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중에 벽우진의 몸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그의 초식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 절묘하게, 종이 한 장 차이로 벗어났다.
쿠웅.
그리고 벽우진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가볍게 땅을 구름과 동시에 처음으로 흑구채주에게 손을 뻗었던 것이다.
‘붙잡히면 죽는다!’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경종이 아니더라도 흑구채주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붙잡히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흑구채주는 전력을 다해 뒤로 보법을 펼치며 벽우진의 권역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덥석!
“큭!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노력은 헛된 노력이 되고 말았다.
벽우진과 달리 흑구채주는 너무나 쉽게 멱살을 내어주었던 것이다.
“원 없이 무공을 펼쳤으니 여한은 없겠지.”
“개새끼! 시발새끼! 남자새끼가 쪼잔하게···!”
흑구채주가 온갖 욕설을 토해냈다.
마치 삶을 포기한 것처럼 아는 욕을 모조리 쏟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혹시라도 벽우진이 흥분하면 조그마한 틈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욕을 지껄인 것이다.
“시끄럽네.”
짜아악!
심드렁한 얼굴로 벽우진이 멱살을 잡지 않은 반대 손을 휘둘러 따귀를 때렸다.
그러자 흑구채주의 입에서 피를 머금은 이빨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력 하나 실리지 않은 일격이었지만 그 한 방에 입속에 있던 이빨들이 모조리 밖으로 배출되었다.
“으어어어···!”
동시에 흑구채주가 울부짖었다.
왼쪽에 한 방 맞은 것뿐인데 오른쪽 이빨까지 모조리 털리자 고통이 장난 아니었던 것이다.
“넌 아직 볼일이 남아 있으니.”
단 일격으로 흑구채주를 무력화시킨 벽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잘 싸우고 있나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해빙궁과의 전투도 있고, 간간히 수적들과의 싸움을 겪어서 그런지 제자들이 제법 무인답게 잘 싸우고 있었다.
중간중간 고수급이라고 할 수 있는 수적들이 있었지만 서예지와 도일수, 양일우의 활약으로 전세는 서서히 이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무룡대도 많이 늘었죠?”
“안 늘면 이상하지. 노력한 시간이 얼만데.”
“모두 장문인 덕분입니다.”
“각자가 노력한 결과지.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펑! 퍼펑! 펑!
벽우진이 대답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망루에 남아있던 궁수들이 저격하듯 화살을 쏘자 지풍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보이는 칼보다 보이지 않는 화살이 훨씬 더 위험했으니까.
“사람들을 부를까요?”
“응. 당장 불러. 여기도 확실하게 털어가야지.”
“길잡이는 어떻게 할까요?”
“이미 죽었어.”
“예?”
설아린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타고 온 도룡선을 쳐다봤다.
“망루에 있던 녀석들 중 한 명이 저격한 모양이야.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길 안내를 해준 이가 있다는 뜻이니까.”
“힘을 덜었네요. 장문인께서 손을 쓰지 않아도 되니.”
“뭐, 죽어야 할 놈이었으니 잘 죽었지. 죽은 놈이야 억울하겠지만.”
벽우진이 직접 들 가치도 없다는 듯이 흑구채주를 허공에 둥둥 띄운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가 걸어가자 앞쪽에 있던 수적들이 일제히 무기들을 던지며 몸을 돌렸다.
아직도 벽우진이 화살들을 역으로 돌린 광경이 생생하기에 감히 대적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철썩! 철썩!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벽우진이 흑구채주를 허공섭물로 띄우고서 걸음을 옮기자 사방에서 도망자들이 속출했다.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여긴 것인지 다들 도피를 선택했던 것이다.
“우아아아!”
“이겼다!”
“승리했다!”
그 광경에 무룡대가 포효했다.
수적으로 불리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승리해서였다.
게다가 부상자도 별로 없었기에 무룡대의 기세는 끝없이 올라갔다.
반면에 제자들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쫓아갈까요?”
“그건 저 녀석들에게 맡기고. 힘이 남은 모양인데 제대로 쓰게 해줘야지.”
조용히 다가와서 묻는 서예지에게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예지가 무룡대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떻게 보면 뒤처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무룡대에게는 이 역시도 경험이었다.
“뒷정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지금 하는 노동에 대한 것도 확실하게 분배해주마.”
“감사합니다.”
“들어가자.”
벽우진이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시체들이 가득한 거리를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흑구채주의 처소였다.
경험 상 그곳에 많은 것들이 쌓여 있었기에 벽우진은 가장 화려하고 높은 건물로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런 벽우진의 뒤로 아이들이 마치 보필하듯 뒤따랐다.
< 제 37장. 보고 싶었다.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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