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20화 (120/325)

< 제 37장. 보고 싶었다. -03 >

막삼이 바짝 쪼그라들 때 설아린이 조용히 다가왔다.

거친 파도에도 이제는 익숙해진 듯 단아한 걸음걸이로 벽우진을 향해 걸어왔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강남 쪽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줘 봐.”

“여기 있습니다.”

설아린이 방금 전 전서응이 가져온 따끈따끈한 서신을 벽우진에게 공손히 건넸다.

심지어 그녀도 아직 열어보지 않은 서신이었다.

그래서 설아린도 궁금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벽우진이 읽고 있는 작은 서신을 쳐다봤다.

“호오.”

여전히 누워 있는 자세로 서신을 읽던 벽우진의 눈빛이 동그래졌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놀란 것이었다.

그 모습에 설아린이 더욱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무슨 소식인가요?”

“남쪽도 전쟁이 끝났다는군.”

“승전보인가 보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확신이 서린 설아린의 표정에 벽우진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서신을 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너무 확신하는 듯해서였다.

“패전보였다면 장문인께서 웃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너무 보편적인 생각인데. 내가 꼴좋다는 식으로 웃을 수도 있잖아?”

“당가가 껴 있기에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허어. 이거 너무 까발려진 것 같은데. 좋지 않아.”

벽우진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한참이나 어린 설아린에게 수를 읽힌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기분 나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건 아니고. 본파와 사천당가의 관계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나쁜 소식보다는 좋은 소식이 낫지. 물론 피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제가 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벽우진이 허공섭물을 이용해 설아린에게 서신을 건넸다.

그리고는 갑판 위에서 활쏘기를 연습하는 제자들을 쳐다봤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요즘 들어 다들 활쏘기에 심취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렵네.”

“재능이 없어서 그런 걸까?”

“재능보다는 연습량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닐까? 어떻게 보면 이제 막 입문한 거니까.”

“근데 이렇게 낭비해도 되나? 화살도 비싸지 않아?”

누가 벽우진의 제자 아니랄까봐 다들 강물 위를 가르는 화살을 보며 돈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은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팔면 돈이 되는 것들이다 보니 일곱 명 모두 막 화살을 쏘지는 못했다.

“차라리 만들어서 쏠까? 화살촉 대신에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서 쏴도 충분하잖아? 연습하는 것으로는.”

“그래도 되긴 하지.”

“혁문이가 잘 만들 것 같은데.”

“형이 혁문이 얘기하니까 보고 싶다.”

“나두나두!”

오빠들의 대화에 심소혜가 끼어들며 소리쳤다.

배혁문과 헤어진 지 어느새 3주 가까이 되어서였다.

지금 같이 있는 언니오빠들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족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심소혜가 울상을 지었다.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하셨으니까 곧 볼 수 있을 거야. 배 타고 가면 청해성까지는 금방이니까.”

“그러니까 다들 다치면 안 돼. 무사히 복수를 끝내고 곤륜산으로 돌아가자.”

서예지에 이어 양일우가 의젓하게 말을 이었다.

곤륜산과 배혁문이 그리운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복귀를 하면 아주 큰 경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다들 다치지 마요.”

“아마 다치면 사부님께 엄청 혼날 걸.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무룡대도 있는데.”

한 명 한 명 손을 잡으며 말하는 심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양일우가 무룡대를 힐끔거렸다.

보는 눈이 많기에 못난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은 평범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곤륜파의 명예와 직결되는 일대제자들이었기에 더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야 했다.

“형 말이 맞아. 우리가 잘해야 빼앗긴 구대문파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으니까.”

“사부님은 딱히 관심 없어 보이시지만.”

“구대문파의 일좌는 시작에 불과해. 마지막은 천하제일문이야.”

양이추가 두 눈을 빛냈다.

그 역시 고작 구대문파의 한 자리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웅심과 야망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자라면 하나 정도의 꿈은 있어야 했다.

“천하제일문. 좋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크고 강한 문파라는 뜻이야. 최고 문파라고나 할까.”

“오오오!”

심소혜가 박수를 치며 눈을 빛냈다.

최고라는 말에 심장이 뛰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자신들이 만든다고 하자 더더욱 신이 났다.

“소혜도 한 손 거들거지?”

“물론이죠! 제가 꼭 그렇게 만들 거예요!”

“그래그래. 우리 다 같이 만들자. 모두 다 함께.”

양일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록 지금은 허황된 꿈이라고 하나 꿈은 꿈이기에 가치가 있었다.

“다, 다 왔습니다! 저기가 흑목도입니다!”

“어디가? 죄다 검은 나무들이 가득한데?”

“군도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섬이 흑목도입니다. 자그마한 다른 섬들에서도 생활은 합니다. 별채처럼 사용해서 평상시에는 무인도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단은 중앙까지 가야 한다고?”

“예. 그런데 아마 중앙까지 들어가기 전에 들킬 겁니다.”

막삼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룡채도 악명으로 유명한 수채지만 흑구채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규모를 생각하면 흑구채가 한 수 위였다.

때문에 막삼은 조마조마했다.

‘제자들이야 당연히 지켜주겠지만 나는 아니니까.’

수상전에서 가장 효율적이며 위협적인 무기는 다름 아닌 활이었다.

또한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위력이 배가 되기도 했고.

그런데 현재 막삼은 마혈이 점혈당한 것은 물론이고 전신이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다.

즉 눈 먼 화살에 맞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뎅뎅뎅뎅!

그때 사방에서 격렬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벽우진 일행이 타고 있는 배를 발견하기 무섭게 안쪽에 알렸던 것이다.

동시에 사방에서 살벌한 살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적의가 가득한 살기에 막삼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쪽을 발견한 이들 중에 결박되어 있는 자신을 알아본 이가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니 별다른 말도 없이 습격이라 단정 짓고 이렇게 종을 쳐대는 것일 터였다.

쒜애애액!

그 사실을 증명하듯 좌우에서 맹렬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양쪽 섬에서 거대한 쇠뇌를 이용해 대형 화살을 쏜 것이었다.

거의 창이라고 해도 될 법한 크기의 화살이 매서운 기세로 배를 쪼갤 듯이 날아왔다.

“흥.”

하지만 맹렬하게 날아오던 거대한 화살은 이내 방향을 틀었다.

벽우진이 공력을 이용해 날아오는 화살의 방향을 비틀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비튼 각도가 이상했다.

두 개의 화살이 엇갈리며 쇠뇌가 발사된 곳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콰앙!

이내 맹렬한 기세로 날아간 화살이 쇠뇌를 박살냈다.

놀랍게도 방향을 튼 거대한 화살이 쇠뇌를 정확하게 파괴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쇠뇌를 조준하던 수적들 역시 산산조각 난 쇠뇌로 인해 한순간에 절명했다.

꿀꺽!

단말마를 남기고 죽어버린 수적들의 모습에 막삼이 침을 삼켰다.

다시 봐도 정말 경이적인 무력이어서였다.

“모두 방패 들어!”

“예!”

“화살에 대비해!”

“걱정할 거 없다. 공성전이지만 일반적인 공성전과는 다를 테니.”

미리 준비한 나무 방패를 들게 했던 설아린이 벽우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녀의 시선에도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선수를 향해 드러누운 채로 전방을 가득 채우는 화살을 주시했다.

“모두 조심해! 가급적이면 피하는데 주력하고! 막거나 튕겨냈다가 주위 사람들이 맞을 수도 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서예지의 지시에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막거나 튕겨내는 것보다 피하는 게 훨씬 어려웠지만 지금은 해내야만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다른 이에게 화살이 날아갈 수도 있어서였다.

“정보가 샌 것 같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걸. 저 녀석들도 머리가 있으니 대비를 하고 있었겠지. 내가 그렇게 깨부수고 다녔는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예상했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대응이 빠를 리가 없지.”

너무나 빠른 대처에 설아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어느새 허공을 가득 채우는 화살들이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첫 번째 화살 공격에 이어 두 번째 공격이 연달아 날아오고 있었다.

‘너무 일찍 들켰어···!’

설아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미리 방패도 준비했고, 무룡대도 곤륜산에서 내려오며 다양한 경험을 쌓기는 했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특히 갑판 위였기에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한정적이라는 점도 그녀와 무룡대에게 불리한 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화살꼬치 신세가 될 것 같은 상황에 설아린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스르륵.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매서운 파공음을 터트리며 날아오던 수백 개의 화살이 마치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멈췄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두 번째, 세 번째로 날아오던 화살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게 무슨 일이야!”

“어째서 화살이···!”

“내가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건가?”

화살을 쏜 흑구채의 수적들이 일제히 두 눈을 비볐다.

자신들이 헛것을 보고 있나 나름의 방법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눈을 아무리 비벼도, 두 눈을 끔뻑거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화살들은 여전히 허공에 가만히 떠 있었다.

스슥!

반면에 설아린을 비롯한 무룡대는 하나같이 벽우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은 벽우진이 유일해서였다.

그런데 정작 이 엄청난 상황을 만든 벽우진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너무 나빠.”

여전히 뱃전에 드러누운 채로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만약 그가 평범한 무인이고 고수였다면 지금의 화살 공격은 상당히 위협적이었을 터였다.

벽우진에게야 소용없는 공격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아닐 테니까.

다만 문제는 벽우진이 평범한 고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스윽.

말도 안 되는 공력으로 흑구채의 화살 공격을 일시에 무력화시킨 벽우진이 베개처럼 사용하고 있던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에 떠 있던 화살들이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날아왔던 방향으로 백팔십도 돌아갔던 것이다.

“히이익!”

“뭐, 뭐야, 저거! 대체 뭐냐고!”

서서히 자신들에게로 향하는 화살촉에 수적들이 공황상태에 빠졌다.

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했기에,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기에 다들 대경실색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들에게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이들조차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으니까.

슈슈슈슉!

그러는 사이 허공을 가득 채웠던 화살비가 수적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자신들이 발사했던 화살이 어처구니없게도 자신들에게 날아왔던 것이다.

“크아악!”

“끅!”

별다른 힘 하나 실리지 않은, 그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뿐이었지만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완벽히 피하거나 튕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미, 미친!”

“이게 인간의 힘이라고? 한 명이 지닌 무력이라고?”

단 한 번의 화살 공격으로 반 이상이 전투불능이 되어버리는 광경에, 고통에 울부짖는 수하들의 모습에 흑구채주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겨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가 겪어야 할 절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돌격!”

< 제 37장. 보고 싶었다.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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