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7장. 보고 싶었다. -02 >
그와 동시에 도룡채주가 무릎을 꿇었다.
패선인 것을 알아차리기 무섭게 무릎을 꿇고서 머리를 조아렸다.
적어도 황하에서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이지만 상대가 다름 아닌 패선이었다.
그 엄청난 위압감을 뿌리던 십존들을 모조리 때려잡고 북해빙궁주마저 처단한.
‘나, 나 따위 상대가 될 리가 없지.’
도룡채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반항은 애초에 생각지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할 만한 느낌이 들어야 반항을 하던 저항을 하던 할 텐데 패선이라는 걸 아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패선씩이나 되는 초인에게 자신은 그야말로 송사리만도 못한 무인일 테니까.
털썩! 털썩!
그런 도룡채주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부채주와 막삼 역시 무릎을 꿇었다.
혹시라도 이러면 조금이라도 아량을 베풀어줄까 싶어서였다.
일단 아직까지는 자신들을 살려두고 있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북해빙궁이 시켜서 한 것뿐입니다!”
“협박하는데 저희 같은 놈들이 어떻게 반항을 하겠습니까요!”
막삼을 위시로 도룡채주와 부채주가 소리쳤다.
어떻게든 책임을 북해빙궁으로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셋 다 지금으로서는 이 수 밖에는 떠오르지 않기도 했고.
“배 출발 시켜.”
“예, 사부님.”
하지만 셋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벽우진은 싸늘한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은 북풍한설이 불 정도로 서늘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새 뒤에 다가와 시립해 있는 서예지에게 지시를 내렸다.
세 사람에게는 섬뜩하기 그지없는 지시를.
‘어, 어째서?’
‘왜 갑자기 배를?’
무릎을 꿇은 채로 도룡채주와 부채주가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둘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벽우진의 의중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휘리리릭!
그러는 사이 서예지는 우아한 운룡대팔식을 펼치며 단숨에 타고 왔던 선박으로 되돌아갔고 벽우진은 천천히 도룡채주에게 다가가 몸을 낮췄다.
“그러니까 모든 건 북해빙궁 탓이다? 강압적으로 명령을 내렸기에 너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 예! 맞습니다! 저로서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되게 신나게 청해성으로 넘어왔다고 하던데. 온갖 약탈과 만행을 일삼으면서.”
“어···!”
도룡채주가 두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한 마디로 인해 생사가 갈릴 수 있었기에 도룡채주는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툭.
다만 벽우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고통도 없이 잘려나간 오른팔의 모습에 도룡채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보이는 게 현실인지 허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였다.
“내가 너무 깔끔하게 잘랐지? 좀 거칠게 잘라야 고통도 있고 머리도 빠릿빠릿하게 돌 텐데.”
“으아악!”
절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너무 깔끔하게 잘렸기에 뒤늦게 피가 솟구친 것이다.
동시에 머리를 새하얗게 태워버리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어디서 이빨을 까. 다 알고 왔는데.”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오른팔이 잘려나간 고통에 도룡채주가 울부짖자 부채주와 막삼이 간절한 어조로 소리쳤다.
지금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비는 것밖에는 없어서였다.
점혈을 당한 것도 아니기에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지만 둘은 그 선택지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그래 봤자 개죽음만 당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있고, 무릇 어른이라면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지. 뭐, 너희 같은 놈들이 그런 걸 신경이나 쓰고 살겠느냐만은 그래도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제발, 제발···!”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장난기 가득한 음성이었지만 벽우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둘은 몸이 떨려왔다.
이 대화의 끝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아서였다.
“참 인간이라는 건 신기해. 어디로 튈지,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거든. 그렇기에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신이라고 한들 인간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까?”
“모두 정리했습니다, 장문인.”
벽우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설아린도 무룡대주와 부대주를 데리고 도룡선으로 넘어왔다.
그리고는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세 사람을 쳐다봤다.
어떻게 보면 한순간의 잘못된 결정으로 저 꼴이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곤륜파가 멸문했을 수도 있었지만.’
사실 곤륜파의 승산은 희박했다.
벽우진이라는 고수가 있긴 했지만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었다.
아니, 아예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 맞았다.
반면에 북해빙궁은 비록 불의의 일격으로 남궁세가에서 밀리기는 했지만 한때나마 중원의 반 가까이를 점령했던 세력이었다.
그런 만큼 누구라도 북해빙궁의 승리를 점쳤을 것이다.
도룡채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고.
단지 결과가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왔다는 게 문제일 뿐.
‘하지만 그마저도 장문인의 말대로 오롯이 감당해야 하지.’
인과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벽우진은 스스로가 누누이 말했던 대로 뒤끝이 상당한 남자였다.
그 말인즉슨 아직 살아 있는 세 사람의 미래는 뻔하다고 봐도 좋았다.
“배 몰 녀석들은 남겨 뒀지?”
“예.”
“좋아. 가자. 안내는 이 놈들이 할 테니.”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세 사람을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과다출혈로 서서히 죽어가는 도룡채주와 오한이라도 걸린 듯 몸을 떨고 있는 부채주와 막삼을.
호언장담했던 대로 도룡채를 깔끔하게 털어먹은 벽우진은 곧장 흑구채의 소굴로 향했다.
함께 북해빙궁의 전력을 이송했던 이력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부터 친분이 있어서 그런지 흑구채가 있는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통과 희망 앞에 굴복하지 않은 인간은 없는 법이었으니까.
“흐아암!”
물론 희망은 주되 삶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지은 죄를 일일이 다 읊어주며 도룡채의 수적들을 모조리 소탕하던 벽우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무룡대주가 얼굴 가득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벽우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대단한지 그는 이번 여정을 함께 하면서 느낄 수 있어서였다.
지금은 비록 저렇게 동네 한량처럼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지만 무룡대주는 그마저도 멋있게 보였다.
‘본문에도 장문인 같은 고수가 있었다면···.’
무룡대주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했다.
그러면서 곤륜파의 제자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패선이라고 불리는, 어찌 보면 소림무제와 무당권제보다도 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벽우진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말이다.
비록 언행이 상스럽고 경박하다고 하나 그의 무경만큼은 진짜배기였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닙니다.”
“부러워서 그렇지?”
“···예.”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 무룡대주의 모습에 설아린이 미소 지었다.
그 마음은 그녀도 똑같아서였다.
무룡대주처럼 설아린 역시 서예지를 비롯해서 곤륜파의 제자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여기저기 찔러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그들과 달리 제자들에게는 확실한 지침서가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부러워만 해서는 안 돼. 부러워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그리고 알게 모르게 우리들도 얻는 게 많다는 거 알지? 이번 일정만 하더라도 특별히 무룡대 전원을 데리고 갈 수 있게 해주셨으니까.”
“사실 혼자만으로도 흑구채 몇 개는 날려버릴 수 있으시겠죠.”
무룡대주의 시선이 선수 쪽 뱃전에 누워 있는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조금만 잘못해도 바다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위치였지만 역시나 패선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벽우진은 거칠게 치는 파도에도 조금의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말이다.
“우리를 많이 배려해 주신 거야. 그만큼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많지만.”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문주님께서도 별 말이 없으신 거지. 나름 예의도 지켜주시니까.”
다른 백도문파들의 수장과 달리 벽우진은 그녀나 설향이나 있는 그대로 바라봤다.
하오문도라고 천시하거나 경멸하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람으로서 바라봐주었다.
설아린은 그게 아직도 너무나 인상 깊었고, 고마웠다.
“확실히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 다른 백도인들과 똑같았다면 우리는 또 다시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을 테니.”
“가끔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막 대하지는 않잖아? 사람대우 해주는 게 어디야? 저 분 신분에.”
“그렇지요.”
무룡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벽우진의 신분과 위상을 생각하면 이렇게 함께 있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명문대파와 하오문은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개방이라면 모를까.
“야.”
“예, 예!”
“얼마나 더 가야 해?”
한편 망망대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심심한 풍광에 뱃전에 누워서 시간을 때우던 벽우진이 도룡채 소속으로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삼을 쳐다봤다.
팔다리가 꽁꽁 묶이고 마혈까지 점혈당한 그를 말이다.
“이 방향으로 반 시진 정도만 더 가면 됩니다!”
“반 시진? 더 빠르게는 힘드나?”
“황하의 유속과 지금 부는 바람의 세기를 감안하면 그 정도가 최선입니다. 노질을 하면 더 빨리 갈 수도 있습니다만···.”
빠른 눈치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막삼이 더 묻지도 않은 것들을 쉴 새 없이 토해냈다.
쓸모가 없어지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날 살려줄 생각은 없겠지만 그래도 전투가 벌어지면 또 모르니까.’
막삼이라고 해서 벽우진의 말을 순순히 다 믿지는 않았다.
그가 벽우진이었어도 후환거리가 될 여지가 다분한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때문에 기회를 노려야 했다.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때야말로 틈이 생기는 순간이니까.
‘그 전까지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는 최대한 비위를 맞춰서 살아 있어야 한다.’
막삼이 헤벌쭉 웃었다.
기회도 살아 있어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막삼은 그 어떤 짓을 당하더라도 최대한 살아남을 작정이었다.
“우리 배에는 노가 없잖아.”
“그래도 바람이 잘 불어서 평저선 치고는 속도가 빠른 편입니다. 침저선이었다면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겠지만요.”
“어쨌든 이게 최고 속도다?”
“예!”
막삼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러나 벽우진의 시선은 막삼에 향해 있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하겠지?”
“어두웠을 때가 침입하기에는 용이하지 않겠습니까? 밝으면 보초들에게 들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리 수적들이라고 하지만 경계를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적들이 신경 쓰는 건 수군이 아니라 같은 수적들이라서요. 큰 울타리에서 보면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이가 견원지간인 곳들도 상당합니다.”
“그래서 너희 깃발 달았잖아.”
벽우진의 시선이 가장 높은 돛대에 달려 있는 깃발로 향했다.
깃발뿐만 아니라 이 배 역시 도룡채의 배였다.
흑구채와 사이가 좋다는 것을 이용하기 위해 대장선인 도룡선을 비롯해서 총 세 척의 배를 타고 일행은 이동 중이었다.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해지면 금세 알아볼 것입니다.”
“그렇겠지. 애초에 쉽게 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
“혼자서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막삼의 두 눈이 일순 번뜩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심드렁한 어조로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막삼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흑구채의 본거지인 흑목도(黑木島)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아무리 장문인이시라도 아무런 계획 없이 접근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장문인께서는 괜찮을지 모르나 다른 사람들은 위험합니다. 인원 역시 200명에서 300명 사이이고요.”
“그쯤 된다고 하더군.”
“헤헤! 역시 계획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 부분에 대해서 너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잊은 모양인데, 너는 대답만 할 수 있다. 묻는 건 나만 가능해.”
막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경고가 마지막 경고임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흑목도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쓸모 역시 다하고 있었기에 최대한 몸을 사려야 했다.
“장문인.”
< 제 37장. 보고 싶었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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