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18화 (118/325)

< 제 37장. 보고 싶었다. -01 >

도룡채의 채주가 타고 있는 배이자 대장선이라 할 수 있는 도룡선의 갑판 위에서 한 명의 장한이 안절부절 못하며 왔다갔다 거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장한을 보고서 뭐라 하지 못했다.

황하수로채 중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를 가진 도룡채의 행동대장이 바로 저 장한이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잠자코 있어야 하는데. 죽은 듯이 지내는 게 최고인데. 하아!”

반바지에 양쪽 팔뚝을 뜯어낸 듯한, 언뜻 보면 조끼처럼 보이는 가죽으로 된 상의를 입은 막삼이 손톱을 뜯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은 죽은 듯이 숨어 지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정작 두목이라 할 수 있는 채주는 너무나 태평했다.

“넌 걱정도 태산이다. 간만에 나왔는데 기분 좋게 한탕 땅길 수는 없는 거냐?”

“형님.”

“주위를 봐봐. 얼마나 넓어? 바다 못지않게 넓은 게 여기 황하다. 그리고 꼭 패선이 우리를 찾는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북해빙궁도 처리했겠다, 강호유람을 나온 걸 수도 있지. 듣자하니 완전 노괴물이던데. 칠십이 넘었는데 이십대처럼 보인다고.”

“북해빙궁의 전력을 이송해준 것 때문에 저희를 찾는 것일 수도 있죠.”

“너무 과대망상 하는 거 아냐? 패선이라 불리는 이가 그렇게 쩨쩨할 리가 있나. 더구나 이제는 강호의 거물이 되었는데 할 일 없이 황하나 돌아다닐까.”

도룡채주 만큼이나 태연한 얼굴로 부채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북해빙궁주를 홀로 쓰러뜨릴 정도의 절대고수가 복수하겠다고 황하를 뒤지고 다닐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이 드넓은 황하에 수적이 자신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벌써 열 곳 가까이가 박살났습니다. 이게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재수 없게 걸린 거지. 패선이 배에 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황하에 지나다니는 배가 하루에 몇 개인데. 적어도 수백 척은 될 걸? 우리 업계 쪽 배들까지 합치면.”

땅딸막한 키의 부채주가 키득거렸다.

쓸데없이 걱정을 사서 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시기가 너무 절묘합니다. 북해빙궁을 막아내기 무섭게 첫 행보가 황하에 와서 수적들을 때려잡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네 말대로 우리를 노리는 것일 수도 있지. 그런데 우리를 찾는다고 쉽게 찾아지나? 우리에 대한 소식이 알려졌을 때 우리는 이미 수채로 돌아가 있을 텐데.”

“희박하긴 합니다만···.”

“걱정도 팔자다. 안 마주치면 되잖아, 안 마주치면. 마주쳤다 싶으면 내빼면 되는 거고. 우리만큼 여기 물길 잘 아는 이들이 어디 있어? 장사치들이나 태우는 배가 우리들의 배를 따라올 리도 만무하고.”

부채주가 막삼의 등짝을 두드렸다.

적당히 긴장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두려움에 매몰되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것도 도룡채의 행동대장이 말이다.

막삼이 기가 죽으면 그 영향은 다른 부하들에게도 미쳤다.

“그래도 전 걱정이 됩니다.”

“괜찮다니까. 그리고 이곳은 육지가 아니라 강 위라고. 제아무리 패선이 대단하다고 해도 물 위에서는 별 수 없어.”

“초인이라 불리는 고수인데 영향을 받겠습니까?”

“그 대단하다는 절대고수도 결국에는 사람이야. 그리고 사람은 칼에 찔리고 화살이 박히면 죽게 되어 있어. 초인이라고 해서 머리나 심장에 구멍이 뚫렸는데 죽지 않는 건 아니니까.”

부채주가 자신 있게 말했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결국에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 엄청나다던 북해빙궁주도, 십존도 끝내는 죽지 않았던가.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저 감 좋은 거 알지 않습니까. 오늘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그럼 저 배만 털고 돌아가자. 알지? 너무 가만히 있어서 애들 상태 말이 아닌 거. 오늘 조금이라도 피를 보지 않으면 애들이 들고 일어날지도 몰라. 적당히 풀어줘야지 뒷말이 없어.”

“으음!”

막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래에 있는 놈들이 좀이 쑤셔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피맛을 안 본지 제법 오래되기도 했고.

“딱 저것만 털고 돌아가자. 그래도 출진했는데 뭐라고 쥐고는 돌아가야지. 금이 되었든, 은이 되었든, 아니면 계집이 되었든 말이야.”

“···알겠습니다.”

부채주마저 근질거린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모습에 막삼이 결국 뜻을 굽혔다.

사실 그가 아무리 얘기를 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차피 결정권자는 채주였기에 그로서는 건의하는 게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설마 마주치겠어? 이 넓은 황하에서? 그러니 딱 저것만 털고 가자. 이렇게 만났는데 또 그냥 보내줄 수는 없잖아?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예.”

작은 키의 부채주가 매달리듯이 막삼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러는 사이 일곱 척의 배는 학익진처럼 좌우로 크게 퍼졌다.

혹시라도 도망칠까봐 길게 둘러서 포위하려는 것이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승객들이 다 어디 갔어?”

“선실로 숨었나?”

“그럼 선장이라도 나와야 하는 거 아냐? 한두 번 장사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래?”

텅텅 빈 갑판의 모습에 수적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풍당당하게 접근했건만 예상했던 광경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수하들의 웅성거림에 도룡채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린 모습이었는데 얇고 가는 체격 때문인지 상당히 강퍅해 보였다.

“기척은 느껴지는데 정작 갑판 위로 아무도 안 나옵니다.”

“뭐지?”

“일단 넘어가 볼까요?”

“잠깐만.”

묘한 낌새에 도룡채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왠지 모르게 건너가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저벅저벅.

그때 선실로 들어가는 출입구의 문이 열리며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하는 청년 하나가 천천히 갑판 위로 걸어 나왔던 것이다.

“이야. 드디어 만나네.”

“뭐?”

“개인적으로 정말 만나고 싶었거든. 특히 도룡채주 널 말이야.”

“널?”

도룡채주가 가뜩이나 험상궂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다짜고짜 반말을 찍찍 해대니 노기가 치솟았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수적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 오직 막삼만이 두 눈을 부릅떴다.

싸가지 없는 말투와 도복을 보는 순간 누군가가 떠올라서였다.

“서, 설마?!”

“뭐야? 왜 그래?”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팔을 떨면서 청년을 가리키는 모습에 도룡채주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막삼을 노려봤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날 알아본 거 같은데.”

꿀꺽!

반면에 청년의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기색이 서렸다.

긴가민가하던 얼굴에 어느 순간 확신이 서리자 자신을 알아봤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도, 도망쳐야 합니다!”

“그게 무슨 흰소리야?”

억눌렸던 숨이 터지듯이 다급하게 소리치는 막삼의 모습에 도룡채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어도 너무 뜬금없어서였다.

그것도 도룡채를 대표하는 고수인 막삼이 그러자 도룡채주가 미간을 좁혔다.

“저, 저 사람은···.”

“거기까지. 내 소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린놈의 새끼가 건방짐이 하늘에 닿았구나!”

“어리지는 않지만, 건방짐이 하늘에 닿았다는 말을 부정하기는 힘드네.”

이제 약관 남짓한 청년이 하대를 찍찍 하대는 모습에 수적들 중 하나가 노성을 터트렸다.

납작 엎드려서 목숨을 구걸해도 모자랄 판에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니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펑!

청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청년을 향해 일갈을 내질렀던 수적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작은 동전만한 구멍과 함께 비명도 없이 허물어지는 동료의 모습에 그 주위에 있던 수적들이 웅성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건방진 건 그 놈 같아서 말이지. 내 나이가 있는데. 사회적 지위도 있고. 어디서 감히 반말이야?”

청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없이 가벼웠던 청년이 인상을 쓰자 한순간에 분위기가 일변했던 것이다.

“넌 누구냐?”

무슨 수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조력자의 짓일 수도 있지만 부하의 죽음과 눈앞의 청년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도룡채주가 으르렁거리듯이 물었다.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누런 송곳니를 드러냈던 것이다.

“질문은 내가 한다. 네놈이 하는 게 아니라. 넌 고분고분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돼.”

“이거 실성한 놈 아냐?”

도룡채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년의 양팔이 활짝 펼쳐졌다.

뒷짐을 지고 있던 자세를 풀어 좌우로 길게 양팔을 벌렸던 것이다.

그 모습에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던 수적들이 이내 자세를 바로 했다.

청년의 양손에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아서였다.

퍼퍼퍼펑!

그 흔한 단검이나 비수조차 없는 맨손에 모두가 피식 거릴 때 청년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리고 십지(十指)에서 무시무시한 관통력을 지닌 지풍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한 명당 한방씩의 지풍이 쏘아졌던 것이다.

투두두둑.

그야말로 벼락같은 공격에 수십 명의 수적들이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절명했다.

거리는 상관없다는 듯이 선박을 포위하고 있던 일곱 척에 탄 수적들을 보이는 족족 격살했던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도룡채주는 물론이고 부채주가 입을 쩍 벌렸다.

유일하게 청년을 알아본 막삼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저, 저게 무슨···!”

“넌 알지? 도대체 누구냐? 누구냐고!”

자신도 육안으로 보기 힘든 지풍을 부하들이 막거나 피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도룡채주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반면에 부채주는 막삼을 닦달했다.

자신들과 달리 막삼은 청년을 알아본 듯해서였다.

“그, 그입니다. 바로 그 자요.”

“그 자? 제대로 설명 못해?”

툭.

부채주가 짧은 팔로 막상의 허리춤을 붙잡고 뒤흔들 때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부채주의 고개가 번개같이 돌아갔다.

작은 소리는 바로 갑판의 소리에서 들려와서였다.

스슥!

그와 동시에 도룡채주가 뒷걸음질쳤다.

황하에서 악명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 그였지만 지금은 청년에게 완전히 압도당해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근성으로는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그가 자기도 모르게 물러났던 것이다.

“아까 말했을 텐데. 내 소개는 내가 한다고.”

꿀꺽!

옅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청년을 보고 있으면 몸이 굳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이상하게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너희들은 모를 거야. 내가 네놈들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말이야.”

“서, 설마···!”

부채주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청년의 말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던 것이다.

하지만 도룡채주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예상하는 인물이 맞을 거야. 너희들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이가 나였을 테니까.”

“히끅!”

부채주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갑자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연상되는 게 없나? 역시 무식한 놈들이라서 그런가. 눈치가 너무 없는데. 아, 무식하니까 그렇게 무모한 결정을 내린 거였나?”

부르르르!

도룡채주가 몸을 떨었다.

뒤늦게 청년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왜 막삼의 충언을 듣지 않았는지 후회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오늘 가장 피하고 싶은 이를 만나서였다.

파파파팟!

그리고 그 순간 텅텅 비어 있던 갑판에서 열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설아린과 무룡대주가 화려한 경신술을 펼치며 대장선을 제외한 여섯 척의 배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털썩!

< 제 37장. 보고 싶었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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