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17화 (117/325)

< 제 36장. 숨바꼭질. -04 >

설아린이 눈을 빛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생각지도 못해서였다.

게다가 배는 쓸모도 많지만 팔기도 쉬웠다.

아무래도 제조하는데 시간이 걸리다 보니 중고라고 하더라도 급하게 구하려고 하는 이들이 많아서였다.

“흠흠. 가격이 제법 나오겠지?”

“제법이 아니라 꽤 나옵니다. 배는 비싼 물건이니까요.”

“허허허. 경비로 충분하겠군.”

벽우진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부수입에 기뻐하는 것이었다.

“저기···.”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듯한 느낌에 벽우진이 웃고 있을 때 그의 곁으로 한 명의 사내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바로 부선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남자였다.

“무슨 일이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사과는 당신이 할 부분이 아니오. 게다가 이미 죗값을 치르기도 했고.”

선장과 삼룡채주의 대화를 들은 이는 벽우진만이 아니었다.

사내 역시 들었었기에 벽우진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괜찮소. 선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대신 책임도 스스로가 져야 하고.”

벽우진의 시선이 선장이었던 시체로 향했다.

이제는 싸늘한 주검이 된.

그런데 그 시선에 사내가 몸을 떨었다.

지극히 냉정한 눈빛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아서였다.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선장의 결정은 그 혼자만의 생각이었습니다. 저희들과는 조금도 상의된 바가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알겠소. 그런데 다시 운항은 가능한 것이오?”

“물론입니다. 조타수가 죽은 건 아니니까요. 저 역시 물길에 대해서는 빠삭하고요. 그런데 저 배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도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세 척의 수적선을 가리키며 사내가 물었다.

일단 운항을 하려면 저 배들부터 조치를 취해야 했다.

“저 배들을 가져가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배를 몰 수 있는 사람이 있소? 내 품삯은 확실하게 주겠소이다.”

벽우진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두둑해질 경비만 생각했지 이 배들을 어떻게 가지고 갈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사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순히 몰기만 하는 거면 가능합니다. 다만 아무래도 숙련도가 부족한 이들이라 속도가 좀 느려질 것 같습니다만.”

“그 정도는 괜찮소. 아, 물론 다른 승객들에게도 물어봐주시오. 우리 때문에 피해를 봐서는 안 되니까.”

벽우진의 말에 사내가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구명지은을 입은 마당에 서둘러 달라고 독촉할 승객들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그 부분에 대해서 딴죽을 걸지는 못할 테니까요.”

“다행이구려.”

확신하듯 말하는 사내의 모습에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는 두 사람을 허공섭물로 띄워 올렸다.

“뒤를 부탁하마.”

“예. 걱정 마세요.”

설아린의 대답에 벽우진이 몸을 띄웠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보기 껄끄러운 광경이 나올 것이기에 수적들의 배로 옮겨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제자들이 몸을 날렸다.

“저희는 정리하는 걸 돕겠습니다.”

“부탁해.”

“예.”

마주보고 있는 배들의 연결을 끊고 새로이 방향을 바꾸어야 했기에 무룡대주와 부대주도 몸을 날렸다.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두 사람과 함께 배를 몰 수 있는 선원들 역시 수적드르이 배로 건너갔다.

투둑. 툭!

한편 시체들로 가득한 수적들이 배로 옮겨온 벽우진이 거칠게 삼룡채주와 부채주를 갑판 위에 던졌다.

그러자 제자들이 시체들을 강물 위로 던지기 시작했다.

굳이 시체들까지 이송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그리고 제 값을 받고 팔려면 청소도 해야 했고.

“자자, 우리는 청소를 시작하자고.”

“예!”

“세 척 다 해야 하니까 부지런히 하자!”

양일우의 주도 하에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서예지는 물론이고 심대혜와 심소혜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을 보탰다.

“어, 어르신. 사, 살려 주십시오.”

“내가 왜 네 어르신이야? 우리는 오늘 처음 본 사인데.”

사지에 핏자국이 흥건한 삼룡채주가 엉금엉금 기어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그의 옆으로 부채주도 산만한 덩치를 둥글게 말아 오체투지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납작 엎드린 것이다.

하지만 둘을 내려다보는 벽우진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저, 저희가 고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한 번만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개과천선해서 살겠습니다.”

“그 말은 너무 진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 다들 개과천선해서 살겠데. 새 인생을 살겠다고. 그런데 진짜 그렇게 사는 이들을 난 못 봤어.”

“저희가 처음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지. 애초에 착하게 살았어야지. 그리고 본성은 어디 가지 않아. 이미 뿌리 깊이 내려 있거든.”

“아닙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아직 단전은 멀쩡했기에 자연스레 공력이 담겼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말에도 벽우진은 귀를 팠다.

“뭐, 바뀔 수도 있겠지. 사람은 계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으니까.”

“마, 맞습니다!”

“살려 주신다면 앞으로는 착하게 남을 돕고 배려하며 살겠습니다!”

엎드려 있던 두 사람이 눈을 희번덕였다.

아주 조금은 희망이 생긴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둘은 보지 못했다.

벽우진의 눈빛은 시종일관 변화가 없다는 것을.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너희들이 지금 할 일은 내가 묻는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야 한다는 거지. 한치의 거짓 없이.”

“모든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고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다 말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더욱더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둘은 마치 간이라도 뽑아줄 것처럼 곧바로 대답했다.

“도룡채와 흑구채의 위치를 말해.”

“······!”

“그게···.”

“머뭇거린다?”

벽우진의 전신에서 묵직한 기파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기파는 사정없이 두 사람을 짓눌렀다.

“자, 잘 몰라서 망설인 것입니다!”

“같은 수적이라고 해서 다 본거지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무지막지한 두 사람이 힘겹게 대답했다.

하지만 벽우진은 존재감을 거두지 않았다.

워낙에 믿을 수 없는 놈들이었기에 말없이 주시하기만 했던 것이다.

“저, 정말입니다!”

“주로 출몰하는 지역을 보면 얼추 예상은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둘 다 두 수채와는 딱히 접점이 없다?”

벽우진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그러자 두 사람의 안색 역시 달라졌다.

쓸모가 없어지는 순간, 벽우진이 짜증을 느끼는 순간 자신들의 운명 역시 결정지어질 가능성이 높아서였다.

그리고 그 끝은 보지 않아도 뻔했기에 둘 다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오다 가며 마주친 적은 있습니다만 친분이나 교분이 있는 사이는 아닙니다!”

“서로 의심이 많아서 상대의 배에 오른 적도 없고요!”

“흐음. 예상 지역에 대해서 읊어 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하는 둘의 모습에 벽우진이 팔짱을 끼었다.

역시 쉽게 풀리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벽우진 역시 뒤끝이 한없이 긴 남자였으니까.

“두, 두 곳 다 말씀이십니까?”

“아는 대로 다 말해 봐. 하나하나 뒤지다보면 결국에는 찾을 수 있겠지.”

기필코 찾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벽우진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창졸간에 눈빛을 교환했다.

엎드린 채로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결정은 빨랐다.

산적들과 마찬가지로 수적들 역시 애초에 동료애나 전우애 같은 것은 없었다.

“다 말하겠습니다.”

“읊어 봐. 마음에 들면 살려줄 지도 모르니까.”

꿀꺽!

마지막까지 당근을 흔드는 벽우진의 모습에 두 사람이 희미한 기억까지 죄다 꺼내서 경쟁하듯 설명했다.

그리고 그 말을 벽우진은 조용히 경청했다.

사소한 것들이라도 지금은 필요하기에 묵묵히 다 들었던 것이다.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도 더 이상은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아직 말해줄 것이 하나 더 남았다. 너희 본거지.”

“아, 안내하겠습니다.”

망설이는 삼룡채주와 달리 부채주가 곧바로 대답했다.

찰나에 무언가가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철퍼덕.

아주 잠깐 머뭇거렸던 삼룡채주가 이마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던 것이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듯한 표정에 부채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삼룡채주와 같은 대답을 했다면, 그리고 늦게 대답했다면 쓰러지는 것은 삼룡채주가 아니라 그였을 터였다.

“안내자는 한 명이면 족하니까. 굳이 둘씩이나 데리고 다닐 이유는 없지.”

“그, 그렇습니다.”

“혼자 밖에 없다고 허튼 짓은 하지 말고. 그럼 내가 좀 과하게 손을 쓸 지도 모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쿠웅!

부채주가 머리를 갑판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 그의 몸은 마치 오한이라도 걸린 것처럼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반항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이후로 벽우진은 황하에 존재하는 수적들을 죄다 때려잡고 다녔다.

보이는 족족 박살내며 도룡채와 흑구채의 정보를 모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부수입도 쏠쏠하게 올렸다.

제자들이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도와주면서 주머니도 두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쪽 근방은 거의 다 정리된 거 같아요.”

“알아보니 저희들에 대한 소문이 싹 다 퍼졌데요. 사부님께서 수적들을 죄다 박살내고 다닌다고요.”

“다들 칭송이 자자해요. 진정한 협객이 나타났다고요.”

“문제는 아직도 도룡채는커녕 흑구채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

제자들의 말에도 벽우진은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명성과 곤륜파의 위상이 높아지는 건 좋았지만 정작 이번 일정의 목표를 제대로 이루지 못해서였다.

청해성을 지나 감숙성까지 넘어온 상태임에도 벽우진은 좀처럼 도룡채와 흑구채를 만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무려 열 채가 넘는 황하수로채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희도 계속 알아보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긴. 수근들도 찾아내지 못한 놈들이니. 누구보다 황하의 수로를 잘 알기도 하고.”

설아린의 말에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수채를 찾는 게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었다.

다만 이렇게까지 마주치지 못할 줄은 몰랐지만.

“좀 더 분발하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고. 너희들도 배 위에서 생활하는 건 그만하고 싶을 거 아냐?”

“저는 괜찮습니다.”

“저희도 괜찮습니다.”

설아린은 물론이고 무룡대주와 부대주도 고개를 저었다.

배에서 생활하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대신에 평소에는 얻기 힘든 값진 경험들을 습득하는 중이었다.

다양한 실전 경험도 실전 경험이지만 벽우진이 지나가듯이 해주는 조언은 그야말로 금과옥조였다.

어째서 설향이 벽우진의 곁에 악착같이 붙어 있으라고 했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말이다.

더불어 스승이라는 존재가, 가르쳐주는 존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도 절감하는 중이었다.

‘고수가 고수를 만든다는 말을 뼈에 사무칠 정도로 느낄 수 있었으니.’

벽우진과의 만남은 세 사람에게 있어 천금과도 같았다.

지금껏 수련했던 것보다 벽우진과 함께 있음으로써 얻은 게 훨씬 많았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들이 함께 있기에 자극 받는 것도 있었고 말이다.

‘반드시 붙어 있는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훔쳐 배워야 해!’

어깨너머로 보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무룡대주와 부대주는 내심 이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했다.

함께 하면 할수록 실력이 쭉쭉 느니 자연스레 더 오래 머무르고 싶었던 것이다.

“사부님!”

세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뱃전에 몸을 기댄 채 두 눈을 감고서 강바람을 만끽하던 벽우진이 한쪽 눈만 살며시 떴다.

그러자 황급히 달려오는 도일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느냐?”

“도룡채의 깃발을 단 배가 오고 있습니다!”

“그래?”

벽우진이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멀리서 다가오는 일곱 척의 배를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가장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깃발을.

“드디어 만났네요.”

“그러게.”

< 제 36장. 숨바꼭질.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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