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6장. 숨바꼭질. -02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기 봐봐!”
“허어업”
낡은 박도를 들고 있는 남자의 말에 갑판에 있던 수적들이 하나같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야말로 두 눈이 훤해지는 엄청난 미녀가 있는 모습에 다들 격양된 것이었다.
개중 몇몇은 허리를 튕기거나 바지춤을 내리려는 모습도 보였다.
“오늘은 통행료를 받을 수가 없겠는데.”
“채주님도 같은 생각이실 걸.”
“통행료를 왜 안 받아? 저 년들도 받고, 통행료도 받으면 되지.”
“히야. 진짜 우물들이로다.”
갑판 위의 남자들이 하나같이 침을 삼켰다.
보면 볼수록 진짜 감탄 밖에는 나오지 않는 미모여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예지와 설아린의 미모에 넋이 나가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두 사람 다 전혀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
“채주님, 저기 좀 보시죠.”
“응?”
그때 갑판 위로 팔 척은 훌쩍 넘을 것 같은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는데 키가 커서 그런지 위압감이 상당했다.
얼굴도 흉터가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험악했고.
특히 양팔에 길게 그려진 문신이 인상적이었다.
“저기 두 명이요.”
“허어. 어디서 저런 우물들이 나왔을꼬.”
“엄청나죠?”
얼굴이나 비출 겸 해서 갑판으로 나왔던 삼룡채주가 두 눈을 번뜩였다.
보는 순간 하물에 피가 쏠리는 것이 보통 우물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아니, 저 정도 미인이라면 흥분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남자라면 당연히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무래도 조용히 처리해야겠다.”
“싹 다 담가 버리는 게 깔끔하겠죠?”
“당연하지. 괜히 살려둬서 시끄럽게 만들 필요 있나. 우리끼리 잘 가지고 놀다가 매음굴에 팔아버리는 게 가장 깔끔하지.”
“몇 년은 데리고 있을 것 같은데요? 흐흐!”
부채주의 말에 삼룡채주가 히죽 웃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한두 달 가지고 놀 외모가 아니어서였다.
게다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몸매도 훌륭했다.
그야말로 상등품 중의 상등품이었다.
“검을 차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겉멋 든 풋내기일 뿐이지. 강호오화(江湖五花)라면 모를까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것들의 실력이야 뻔하지.”
“강호오화라고 해도 별 수 없을 겁니다. 여기는 육지가 아니라 황하이니까요.”
“그렇지. 선상전투로는 우리를 따라올 자가 없지. 크흐흐흐!”
삼룡채주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바지에 넣었다.
본능적으로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한데 그런 행동을 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배를 걸어라!”
처처척!
연신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삼룡채주를 대신해 서열 2위인 부채주가 단전에서부터 힘을 끌어 올려 소리쳤다.
일단 배가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세 척의 배에서 수십 개의 갈고리가 솟구쳤다.
“아이고, 어르신.”
“네놈이 선장인가 보구나.”
“예에.”
전방과 좌우를 포위하듯 달라붙은 삼룡채의 배를 흘깃거리며 까맣게 탄 피부의 중년인이 넉살 좋게 웃으며 배의 선미로 다가왔다.
그런데 표정과 달리 그의 눈빛이 상당히 불안했다.
수적들의 시선이 전부 다 두 여인에게 꽂혀 있자 머릿속에서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라서였다.
‘젠장! 눈치껏 선실에 들어가 있어야지!’
선장은 수적들만 없다면 두 여인과 그녀들의 일행에서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삼룡채의 거의 모든 수적들이 두 여인을 본 상태였기에 지금 선실로 들어간다고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선장은 머리를 굴렸다.
‘둘을 희생시킨다면···.’
선장의 시선이 두 여인의 일행으로 향했다.
도복을 입고 있는 청년과 제법 무인의 태가 나는 장정 둘이 있었지만 현재 그의 눈에 보이는 수적들만 해도 백 명이 훌쩍 넘었다.
배 안에 있는 이들까지 합치면 150여명은 족히 될 것이기에 선장의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무리 무인이라도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었고, 더구나 이곳은 배 위였다.
‘소년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세를 뒤집기는 힘들어.’
제법 남자 티가 나는 소년들도 함께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이만한 수적 차이를 뒤집기 어려웠다.
그래서 선장은 내심 결정을 내렸다.
두 여인을 삼룡채에 넘기고 편히 지나가기로 말이다.
“표정을 보아하니 결정을 내렸구나?”
“저야 당연히 어르신의 결정에 따라야지요. 다만 조금의 아량을 베풀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요.”
“아량이라.”
“저기 저 여인들이 마음에 드신 것 같습니다만.”
선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두 여인을 힐끔거렸다.
삼룡채주가 말을 꺼내기 전에 그가 먼저 운을 뗀 것이다.
그러자 삼룡채주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마치 내게 건네주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어르신께서 원하신다면 응당 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고 싶은 모양이군.”
“그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장이 간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작게 말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었고, 둘을 희생해서 무사히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다행이라 생각할 것이었다.
물론 두 여인의 삶은 처참하게 망가지겠지만 그 둘을 위해서 모두가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다.
‘살기까지 뿌리는 마당에.’
선장이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황하에서 뱃사람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게 바로 그였다.
그렇기에 수적들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벗어나야 해.’
음욕이 눈이 먼 남자들은 그 어떤 짓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일시적으로 미치광이보다 더한 존재도 될 수 있었기에 선장은 가급적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괜히 튀는 불똥에 맞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데.”
“예에?”
“완전범죄의 시작은 보는 눈을 없애는 것이지. 겸사겸사 입도 아예 열지 못하게 만들고.”
푹!
선장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눈 깜짝할 새에 삼룡채주의 손이 그의 심장을 꿰뚫어서였다.
그것도 잔인하게 아직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을 꺼내서 보여주는 작태에 선장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삼룡채주를 노려봤다.
그러나 노려본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개, 개새끼···.”
“큭큭! 저런 미인을 태운 네 선택을 후회하라고. 뭐, 보아하니 네놈도 지옥으로 갈 것 같다만.”
“먼저 가서, 기다리마.”
“한 오백 년 거릴 거다.”
삼룡채주가 낄낄거렸다.
다 늙은 호호 할아버지가 되기 전까지는 죽을 생각이 전혀 없어서였다.
이윽고 선장이 바닥에 쓰러지며 피가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서, 선장님!”
“으으!”
한편 그 모습을 본 선원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선장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미래도 엿볼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인지 경계만 하던 이들이 칼을 뽑아들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반항이라도 하고 죽으려는 것이었다.
“화살은 쏘지 마라. 우리 예쁜 미녀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
“정확하게 쏘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의 경우가 있으니까. 상등품에 흠집이 생기면 네가 책임질 거냐?”
“피 흘리는 미인도 나름 운치가 있는데 말입죠.”
부채주가 음흉하게 웃었다.
붉은 피와 혈향은 그를 더욱 흥분시키는 것들 중 하나여서였다.
“취향이 독특하다니까.”
“흐흐! 채주님의 취향이 너무 얌전한 겁니다.”
“원래 돌고 도는 거야. 할 거 다하면 다시 기본으로 돌아오는 법이지.”
삼룡채주가 그리 말하며 수하들 중에 활을 다루는 이들을 뒤로 물렸다.
혹시라도 눈 먼 화살에 맞을까 봐 저어한 것이다.
그 정도로 지금 배 위에 있는 두 여인은 그의 인생에서 손꼽히는 미녀들이었다.
“제가 잘 데려오겠습니다.”
“그래. 자결하지 못하게 점혈부터 확실하게 하고.”
“장사 한두 번 합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둘 중 하나는 자신의 몫이기에 부채주가 실실 웃으며 갈고리에 연결된 밧줄을 타고 날아가듯이 이동했다.
그러자 그 뒤로 수적들이 일제히 뒤따랐다.
살인멸구가 결정된 이상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을 노획하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선객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 역시 그들의 것이었다.
“끼야호!”
“그래! 가끔은 이런 맛도 있어야지!”
“돈도 좋지만 힘도 써줘야지!”
“안 그러면 칼에 녹이 슨다고!”
수적들이 신난 기색으로 넘어왔다.
그런 그들의 눈빛에는 살기와 음욕이 강렬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을 마음껏 죽이고 여인들을 취할 생각에 벌써부터 잔뜩 흥분해 있었던 것이다.
“어딜!”
“우리가 쉽게 죽어줄 것 같으냐!”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넘어오는 수적들을 향해 선원들과 갑판에 남아 있던 몇몇 무인들이 몸을 날렸다.
가만히 당해주지는 않겠다는 듯이었다.
파바밧!
그런데 그들보다 먼저 수적들에게 닿은 이들이 있었다.
흰색의 도복과 무복을 휘날리며 두 여인이 수적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갑판 위로 새빨간 피가 솟구쳤다.
“컥!”
“무, 무슨···!”
목과 가슴이 베인 수적 두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당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내 둘의 동공에서는 빛이 사라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저 년들이 감히!”
“얼른 제압해!”
수적 두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지만 누구 하나 그 사실에 긴장하지 않았다.
운 좋게 기습으로 동료를 쓰러뜨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털썩!
서예지와 설아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수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던 것이다.
거기에 무룡대주와 부대주, 아이들까지 합세하자 갑판 위로 넘어온 수적들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저, 저!”
그 광경에 부채주가 역정을 토해냈다.
가볍게 정리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와서였다.
특히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하들의 모습에 크게 분노했다.
“흐음!”
반면에 삼룡채주의 눈동자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꼴같지 않게 무인 행세를 하려고 검을 찼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검을 뽑은 순간 두 여인의 기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최소 일류 이상이다.’
부채주와 달리 그는 냉정하게 서예지와 설아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모와 숫자에 눈이 먼 부채주와 다르게 두 여인을 냉철하게 직시했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두 여인만이 아니었다.
쌔애액!
두 여인과 함께 있던 청년들과 소년들 역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삼룡채의 수적들이 말 그대로 썰려나갔다.
번쩍이는 검기의 파도에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히, 히에엑!”
“이런 젠장!”
서슬 퍼런 검기의 향연에 실력이 떨어지는 수적들이 대경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앞서 죽은 선장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죽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보다 윗줄에 있는 서열들을 힐끔거렸다.
알아서 나서라는 무언의 독촉이었다.
꿀꺽!
그러나 누구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죄다 검기를 뽑아대니 누구도 앞장서려 하지 않은 것이었다.
“저 놈 데려와. 목숨만 붙여서.”
심지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부채주마저 달라진 공기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벽우진의 음성이 갑판을 갈랐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갑판의 분위기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나른한 목소리로 제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자 두 개의 인영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양일우와 도일수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날렸던 것이다.
타다다닷!
연결된 밧줄을 이용할 수 있는 건 수적들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둘은 너무나 가벼운 몸놀림으로 밧줄 위를 내달렸다.
“공격해!”
“떨어뜨려!”
< 제 36장. 숨바꼭질.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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