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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114화 (114/325)

< 제 36장. 숨바꼭질. -01 >

벽우진은 황하를 가로지르는 중형선박의 갑판에 올라와 있었다.

나름 크기가 큰 배라서 그런지 갑판 곳곳에는 도도히 흐르는 황하를 내려다보는 선객들이 제법 있었다.

장돌뱅이들로 보이는 장사꾼들도 제법 많았고.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신난 이들은 누가 뭐래도 제자들이었다.

“우와!”

“나 배는 처음 타 봐!”

“배 타면 멀미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누구 멀미 해?”

“소혜는 멀쩡해!”

생전 처음 타보는 배에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떠들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런 아이들을 보고 뭐라 하지 않았다.

처음 배에 타본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다들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저 반응이 하루를 채 못 간다는 사실도 다들 알고 있었다.

“형은 신기하지 않아? 이렇게 큰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게?”

“낚싯배랑 같은 이치인데 뭐.”

“그래서 형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조금 신기하네.”

들떠서 방방 뛰는 아이들과 달리 양일우는 홀로 고상하게 서 있었다.

양일우도 배는 처음이었지만 나이가 있기에 나름 점잖게 반응했던 것이다.

서예지나 도일수는 자주는 아니지만 몇 번 타 본 적이 있기에 무덤덤한 모습이었고.

“사부님! 사부님!”

“그래, 소혜야.”

언니오빠들이랑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심소혜가 벽우진에게 날 듯이 다가왔다.

그러자 벽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귀엽고 깜찍한 심소혜는 늘 미소를 유발하는 아이였다.

“이렇게 다 같이 나오니까 마치 나들이 나온 거 같아요!”

“나들이나 마찬가지지. 일은 겸사겸사 하는 거니까.”

“그 일도 숨바꼭질 하는 거 같아요. 헤헤헤!”

“오, 괜찮은 표현이네. 우리가 악당들을 잡으러 다니는 거니까.”

“그쵸?”

심소혜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

악당을 때려잡는 것도 좋지만 사실 심소혜는 이렇게 다 같이 나온 게 너무나 좋았다.

곤륜산에서 언니오빠들과 수련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가끔은 이렇게 세상을 구경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숨바꼭질이라. 이번 여정의 이름은 숨바꼭질이라고 정해야겠다.”

“정말요?”

“응. 이번에는 우리가 찾으러 다니는 거니까. 우리라고 늘 앉아서 당하기만 해선 안 되지.”

“맞아요!”

심소혜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곤륜파는 늘 당하는 입장이었다.

가만히 있는데 나쁜 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왔었다.

그렇기에 이참에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

곤륜파도 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무섭지는 않아?”

“괜찮아요. 곤륜파의 제자로서 이건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심소혜가 앙증맞은 두 손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어리지만 심소혜도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피를 안 묻힐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막내가 아니었다.

‘혁문이도 있으니 내가 모범을 보여야 해!’

지금까지는 막내로서 온갖 귀여움과 사랑을 받았다면 앞으로는 혁문이를 자신이 돌봐주어야 했다.

그렇기에 심소혜는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히려 곤륜파의 제자로서 당당히 맞서 싸울 작정이었다.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아니에요. 저도 곤륜파의 제자인 걸요. 이제는 동생도 생겼고요. 아차! 사제지. 헤헤!”

“혁문이는 어때?”

“우웅. 말썽쟁이에요. 의젓한 척 하는 꼬맹이?”

자기 신장에 맞는 검을 달랑거리며 심소혜가 나름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함께 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배혁문에 대해서 파악하기에는 모자라지 않은 시간이어서였다.

“말썽쟁이라고?”

“네. 사고뭉치예요. 말도 진짜 안 들어요. 그것도 제 말만요. 무려 세 살이나 어린 녀석이!”

심소혜가 콧김을 쑥쑥 내뿜었다.

생각만 해도 열불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조차도 벽우진에게는 너무나 귀엽게 보였다.

“그러니까 더더욱 소혜가 챙겨줘야지. 아직 어린애니까.”

“그렇긴 한데, 그래도 가끔은 얄미워요.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것도 그렇고요.”

심소혜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자신이 더욱더 챙기고 보살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또 같이 있으면 투닥거리게 되어서였다.

“누나이자 사저이니까 소혜가 아주 조금만 참아줘. 아니다 싶으면 꿀밤도 먹이고. 너무 오냐오냐 돌봐주는 것도 좋지 않아.”

“세개 때려도 되요?”

“물론이지. 꿀밤 좀 먹는다고 안 죽어. 혹이 좀 나올 뿐이지.”

“헤헤헤!”

배혁문에게 꿀밤 먹이는 상상을 하는 모양인지 심소혜가 실실 웃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다시 한 번 심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식을 낳아본 적은 없지만 만약 딸을 낳는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사부님.”

심소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데 서예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그녀는 벽우진과 적당한 거리를 벌린 채 서 있는 설아린을 힐끔거렸다.

“좀 심심하지?”

“아니요. 저도 좋아요. 오랜만의 외출이니까요. 게다가 면사도 쓰지 않고 있으니까요.”

“경쟁심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벽우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서예지와 설아린이 묘한 기류를 뿌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서였다.

아니, 사실 모르는 게 더 이상할 터였다.

누가 봐도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데.

“미모로 승부를 가리고 싶어할 정도로 저는 어리지 않아요, 사부님.”

“알지. 농담한 거야. 그런데 그거 가지고 정색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해야겠니.”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요.”

서예지가 퍼뜩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결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어서였다.

“근데 의외이기는 하네. 나는 미녀들의 기싸움을 좀 기대했는데.”

“싸움은 안 좋은 거라고 하셨잖아요. 가장 좋은 게 싸우기 전에 승부를 내는 것이라고도 하셨고요.”

“정확하게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요즘 들어 책도 읽는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과도한 업무에 치이는 게 현실이었지만 벽우진은 곤륜파의 무공에 주석을 달면서도 틈틈이 책도 읽고 있었다.

“잠은 주무시는 거죠?”

“한 시진 정도? 아예 안 자는 건 좋지 않으니까. 진짜 바쁠 때는 잠 한 숨 못자고 일을 봤었지.”

곤륜파 장문인이 되기로 결단을 내렸을 때를 떠올리며 벽우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공간의 진에 있을 때보다 그때가 훨씬 더 힘들어서였다.

육체적으로는 시공간의 진이 더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때가 더 고통스러웠다.

몇 번이나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건 몰랐어요.”

“나야 늘 완벽에 가까운 몸 상태를 유지하니까. 웬만해서는 이 균형이 틀어지지 않지.”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책임감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지. 닥치면 결국에는 하게 되어 있어. 물론 다시 하고 싶지는 않지만.”

떠올리는 것도 싫다는 듯이 벽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가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올까요?”

“이건 일종의 낚시야. 그리고 안 걸리면 어때? 오랜만에 바람 좀 쐬고 겸사겸사 유람도 하는 거지. 다들 좋아하잖아?”

“저도 좋기는 해요.”

서예지가 살포시 웃었다.

진짜 강호유람을 나온 기분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이번 일정은 청해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에 서예지는 더더욱 기대가 되었다.

청하상단 소속이지만 의외로 그녀는 청해성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마음 편히 먹어. 여유롭게 말이지. 언젠가는 걸릴 거라는 생각으로. 물론 안 나타나면 내가 직접 찾아갈 생각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정보를 모으고 있습니다.”

“거 봐. 우리에게는 믿음직한 조력자도 있잖아.”

“믿음직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시선이 오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설아린의 모습에 서예지가 두 눈을 좁혔다.

설향이나 양선이면 모를까 설아린은 사실 신뢰가 그리 가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따로 꿍꿍이속이 있는 것도 같았고 말이다.

“말보다는 결과로 보여드릴게요.”

“그건 차차 두고 보면 알겠지. 근데 둘 중 하나는 면사를 써야 하지 않겠어?”

벽우진이 서예지와 설아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배를 타기 위해 대기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수많은 남정네들이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었다.

서예지야 청해일미라고 불렸을 정도로 미색으로 유명했었고, 설아린 역시 매력이 다를 뿐이지 보기 드문 미녀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어디를 가든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는 괜찮아요. 불편하기도 하고요.”

“저도 괜찮습니다, 장문인.”

나이를 막론하고 한 번 보면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들의 시선에도 둘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벽우진과 함께 있는데 굳이 불편한 면사를 써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설아린의 경우 그녀가 소문주인 것을 아는 사람은 하오문 내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고.

“저는 둘 다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선을 너무 끌어요.”

“지금 나한테 강요하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 사저에게 시선이 집중되니까···.”

“나만 보는 건 아닌데?”

동갑이지만 입문 순서대로 따지면 서예지가 먼저였다.

그렇기에 윗서열이 된 서예지가 따지듯이 양일우에게 물었다.

“둘이 같이 있어서 더 끄는 것도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말도 놓고?”

“사저라고는 하잖습니까.”

양일우가 소심하게 반항하듯 대답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벽우진은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했다.

심소혜와 배혁문만큼은 아니지만 이 둘의 만담도 나름 흥미진진했다.

“흐음.”

“전 사부님께 제 의견을 말씀드린 겁니다.”

“나는 둘의 의견을 존중한다. 강요할 문제가 아니지. 물론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고, 생기면 그때 해결하면 되지.”

“맞아.”

벽우진의 말에 서예지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자신의 애검을 툭툭 건드렸다.

사부가 패선이라는 걸 증명하겠다는 듯이 서예지는 무력을 쓰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생각인 듯싶었다.

“너무 과격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어. 말해주기가 좀 그렇지만.”

“이유?”

“또 은근슬쩍 말을 놓는다?”

“끄응!”

양일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마지막에 벽우진의 제자가 된 도일수에게는 꼬박꼬박 존대를 하면서 자신에게만 이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수, 수적이다!”

뎅뎅뎅뎅!

서예지와 양일우가 티격태격할 때 선미에 있던 선원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가장 먼저 수적의 깃발을 발견하고는 사람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그러자 다른 선원이 다급하게 종을 쳤다.

“시작이 좋은데요. 첫날에 이렇게 마주치다니.”

“어디 보자. 어떤 녀석들이려나.”

선원의 외침에 갑판에 있던 사람들이 대경실색하며 선실로 들어가는 것과 달리 벽우진은 눈을 빛냈다.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실행에 옮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첫날부터 수적들과 대면하게 되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만약에 도룡채(屠龍蔡)가 아니면 어떡하실 생각이세요?”

“지들끼리 아는 사이일 테니 두드려 패다 보면 나오지 않겠느냐?”

“아···.”

지극히 단순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이상하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녹림십팔채야 각 산채가 워낙에 지방 곳곳에 퍼져 있어 교류가 거의 없다지만 황하수로채는 달랐다.

황하를 오고 가며 마주칠 수밖에 없기에 하나씩 처리하면서 역추적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도룡채가 나올 터였다.

사이가 나빠도 수채가 어디쯤에 있는지는 대략 알고 있을 테니까.

“어차피 나쁜 놈들이니 좀 두들겨 팬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도 없고.”

“우문현답이네요.”

“물론 너희들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아린의 시야에 웃통을 시원스럽게 벗어재낀 수적들이 들어왔다.

상반신 전체가 흉터로 뒤덮인 수적들이 대감도나 작살, 혹은 거치도를 꼬나 쥐고서 이쪽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배를 멈춰라!”

“우리 뱃길을 이용하려면 통행료를 내야지!”

“물론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좋고!”

“음? 어어어?!”

총 세 척의 배가 벽우진이 타고 있는 선박으로 접근했다.

일관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각기 다른 모습의 배들이었는데 깃발의 문양은 똑같았다.

그런데 세 척 중 선두에 있는 배의 선미에 위풍당당하게 올라와 있던 수적 하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판 위에 기가 막힌 미녀가 무려 두 명이나 있어서였다.

< 제 36장. 숨바꼭질.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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