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5장.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남자. -03 >
“그치만 저도 남자인 걸요!”
“남자는 무슨. 꼬마아이지.”
“꼬마 아니에요!”
이번에는 배혁문이 발끈했다.
당당한 남자인 자신을 꼬마라고 부르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다.
게다가 요즘에 잘 먹고 잘 자서 키도 쑥쑥 자란 상태였다.
적어도 체격은 심소혜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기에 배혁문은 가슴을 내밀며 소리쳤다.
“꼬마라는 말에 흥분하는 것 자체가 아직 꼬마라는 뜻이야. 자기도 아니까 참지 못하고 흥분하는 거지.”
“제가 꼬마면 사저도 꼬마에요!”
“난 아니지. 난 소녀지. 곧 여인이 될 테고. 헤헤헤!”
심소혜는 흥분하지 않았다.
지금 흥분하면 배혁문과 똑같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이익!”
“너무 흥분하지 마. 큰 사저가 보고 있다는 걸 잊은 거 아냐?”
“흡!”
“하하하하!”
귀여운 아이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제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둘에게야 심각하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귀여운 투닥거림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서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때 세 명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바로 설아린과 무룡대주, 부대주였다.
“안녕하세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정중히 인사해오는 세 사람에게 서예지가 대표로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시작으로 제자들 역시 세 사람에게 인사했다.
“잘 주무셨어요, 언니?”
“언니요?”
“저보다 한 살 많으시다고 들어서요. 전 열일곱이거든요.”
“아, 네.”
서예지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이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그런 기색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역시 불여시.’
서예지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제 처음으로 소개를 받았을 때부터 그녀는 느꼈다.
설아린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언니.”
“저야말로요.”
“말 편히 하세요. 저보다 언니이신데.”
“좀 더 친해지면 그때 놓을게요.”
칼 같이 선을 긋는 서예지의 모습에도 설아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른 제자들과도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무룡대주와 부대주는 부대끼며 지낸 생활이 제법 되었기에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지만 그녀는 아니었기에 설아린은 자신이 먼저 제자들에게 다가갔다.
‘차근차근. 한 단계씩.’
특별하지 않은 벽우진의 모습에 살짝 실망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패선이라 불리는 고수를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인물이었다면 그녀의 사부이자 하오문주인 설향이 그토록 칭찬하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그녀가 본 것은 아주 작은 일면뿐이기도 했고.
그래서 설아린은 하나씩 차근차근 다가갈 생각이었다.
‘일단은 제자들부터. 물론 큰 벽이 하나 있긴 하지만.’
설아린이 무덤덤한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서예지를 힐끔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서 있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서예지가 자신을 유달리 경계하고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고 해서 서예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잘 잤어요?”
“조금 설친 아이들이 있지만 대체로 잘 잤습니다.”
서예지 다음으로 벽우진의 제자가 된 양일우가 제법 의젓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미약하게 흔들렸다.
서예지로 인해 미인에게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아예 동요가 없을 수는 없었다.
결이 살짝 다른 미녀였기에 한창 혈기왕성한 양일우로서는 티를 안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이네요. 제법 먼 길을 가야하는데 말이죠.”
“다들 건강한 아이들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양일우의 시선이 설아린의 뒤에 보필하듯 서 있는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무룡대주와 부대주가 할 수 있다면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다들 저를 너무 경계하시는 것 같아요.”
“아직은 다들 낯설어서요. 좀 더 친해지면 편하게 대하겠습니다.”
“하긴. 시간이 얼마 안 되기는 했죠.”
설아린이 내심 섭섭한 기색을 띠었다.
남자 여럿을 홀렸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런데 다들 도가계열의 무공을 익혀서 그런지 팔딱팔딱 뛰는 반응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해결해줄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죠?”
“예.”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는 설아린과 달리 양일우는 짧게 대답했다.
서예지가 설아린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걸 알았기에 나름 선을 긋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양일우는 도일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인과 말을 자주 섞어보지 못한 그와 달리 도일수는 나이도 가장 많을뿐더러 세상 경험도 누구보다 많았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들이야 사형제간이다보니 함께 생활하는 낯설지가 않지만 설 소저는 아닐 텐데요.”
“여자가 저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숙은 저도 경험이 적지 않아요. 보기와 달리 곱게 자란 편은 아니라서요.”
“알게 모르게 불편한 일들이 많을 겁니다.”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짐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오히려 제가 도움이 되면 되었지.”
설아린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녀는 속이 꽉 찬, 옹골찬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어떤 강행군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막내지만 가장 나이가 많은 제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대답한 설아린이 눈을 빛냈다.
개인적으로 도일수라는 제자는 그녀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를 패선이라 불리며 소림무제보다도 윗줄에 놓는 고수인 벽우진이 왜 받아들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어제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었지.’
삼류 중의 삼류였던, 최연장자 쟁자수였던 도일수가 무려 초일류의 수준에 올라 있었다.
평생을 노력해도 일류지경에 오르지 못한 이들이 부지기수이건만 도일수는 반년이 채 되기도 전에 절정을 목전에 두었던 것이다.
그걸 알았을 때 설아린은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반드시 비밀을 알아야 해.’
곤륜파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별 볼일 없었던 이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아이들이었다.
서예지야 청하상단의 혈족이기에 따로 운기토납법 정도는 익히고 있었겠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니었다.
땅꾼의 자식이거나 객잔의 잡일꾼이나 하던 이들이 바로 앞에 있는 제자들이었다.
그런데 무공이라고는 일자무식이었던 이들이 지금은 무인다운 풍모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비밀을 알아낸다고 해서 우리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설아린이 내심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알아낸다고 해서 바로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그랬다면 이 세상에 고수 아닌 이들은 없었을 터였다.
아니면 고수의 기준 자체가 달라지던가.
“아시겠지만 저희 사부님께서 외부인들에게 그렇게 배려가 깊은 성격이 아니라서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저는 물론이고 함께 가는 둘도 나름 강호 경험이 빠삭하니까요.”
“힘드시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도일수는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리 말했지만 설아린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물론 눈치 빠른 그녀가 도일수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설아린은 내심 오기가 생겼다.
곤륜파의 제자들이 대단한 성취를 이룬 건 알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뒤떨어진다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나 없는 동안 잘 지키고 있어. 혁문이도 잘 가르치고. 율석이도 틈틈이 신경 쓰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약초밭도 소홀히 하지 말고. 차밭도 소규모로 만들어서 시험적으로 심어 본다고 했었지?”
“예. 차밭은 저와 청범이가 맡을 예정입니다. 약초밭은 비 호법님께서 맡아주신다고 했습니다.”
멀리서 벽우진과 청민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걸어오면서 벽우진은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는 중이었다.
“잘 보고 배워둬. 나중에는 우리가 직접 재배해야 하니까.”
“제가 확실하게 배워둘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혁문이한테도 가리킬 생각입니다.”
“혁문이는 율석이한테서도 배울 게 있지 않나? 나는 그 맥을 이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구입하는 것보다는 자체생산이 여러모로 낫잖아? 곤륜산의 정기가 가득 담은 광물로 병장기를 만드는 게.”
“안 그래도 율석이가 그 얘기를 했습니다. 혁문이도 고민하지 않는 눈치고요.”
“길게, 장기적으로 보자고. 우리 한두 해만 해먹고 그만둘 거 아니잖아? 적어도 500년은 봐야지.”
청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벽우진과 같은 생각이어서였다.
아니, 속으로는 500년도 짧다고 생각했다.
“가늘고 길게라도 저는 500년 이상 명맥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초석을 잘 다져야 해. 시작이 중요하단 거지.”
“본산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있고 호법들도 있으니까요. 전 사형이 걱정입니다.”
“내가 왜?”
벽우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대단하다던 북해빙궁주도 때려잡은 이가 바로 자신이었다.
한데 자신이 걱정된다고 하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괜히 일을 더 크게 벌릴까 봐서요. 가뜩이나 애들도 다 같이 가는데.”
“그래서 내가 더 걱정이다?”
“예. 사형이 다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이 되지 않지만 아이들이 뒤처리를 할 걸 생각하니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습니다.”
“이 자식이.”
벽우진이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설아린이 가슴 졸이며 봤다.
아무리 옆집 한량처럼 보이는 벽우진이었지만 그의 별호가 다름 아닌 패선이었다.
두드려 패는 게 특징이어서 패선이라고도 불리는 바로 그 패선 말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결정할 때 꼭 한 번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아이들이 지금 한창 보고 배우는 시기라는 거 아시죠? 사형 같은 성격은 딱 한 명이면 됩니다. 그 이상은 안 돼요.”
“참나.”
쓸데없이 진지한 청민의 모습에 벽우진이 이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우리는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있는데. 갑자기 북해빙궁주나 십존 같은 녀석들이 튀어 나오지 않는 한.”
“총표파자도 조심해야 합니다. 청해성의 산적들을 싹 다 쓸어버린 일로 사형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온갖 야비하고 비열한 방법을 동원해서요. 그럼 아이들이 위험합니다.”
“그건 쟤네들 선에서 어떻게 해결 안 되나?”
벽우진의 시선이 설아린과 무룡대주, 부대주에게로 향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오문의 실세들인데 알아서 정보를 물어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오문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닙니다. 개방이 함께 하면 또 모르겠지만요.”
“개방도 다 아는 건 아니잖아.”
“하오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청민이 슬쩍 설아린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자칫 삐딱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발언이어서였다.
그런데 설아린은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괜찮아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요. 그래서 늘 도전하고 시도하는 것이고요.”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네.”
“알고 있습니다, 장로님.”
설아린이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이들에 비하면 청민의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중하기까지 했기에 설아린은 고개를 저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혁문이는 이리로 오고.”
“저, 저도 가면 안 될까요?”
벽우진의 말에 배혁문이 손을 들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벽우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돼. 혁문이는 좀 더 배워야 하거든.”
“사형 말씀이 옳다.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일러.”
“네에.”
배혁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실전을 몇 번 겪은 심소혜와 달리 배혁문은 모든 것에서 부족했기에 함께 갈 수 없었다.
“그 쪽은?”
“저희도 준비 다 되었습니다.”
“그럼 출발하자고. 황하를 향해서.”
다부진 얼굴로 대답하는 설아린의 모습에 벽우진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가 복수의 시작이었다.
< 제 35장.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남자.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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