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5장.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남자. -02 >
우르르 몰려 왔던 손님들이 떠나가기 무섭게 새로운 이들이 다시 곤륜산을 찾았다.
북해빙궁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잠시 하산했던 하오문이 다시 곤륜파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숫자가 확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는 소수로 곤륜산을 올라왔다.
“늦었지만 승리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축하할 것까지야.”
공손히 포권지례를 올리는 설향에게 벽우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남들에게야 위험천만한 순간이었겠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패배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걱정한 것은 누가, 얼마나 다치느냐였을 뿐.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정보를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벽우진이 손을 저었다.
애초에 그의 전력구상에 하오문은 없어서였다.
도와준다고 해도 전력이 크게 상승하는 것도 아니었고.
스윽.
대답한 벽우진이 자리를 권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오늘의 자리에는 새로운 얼굴이 한 명 더 참석해 있었다.
서예지와 비견되는 미모를 지닌 십대 후반의 소녀가 흑단 같은 긴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서 앉아 있었던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설아린이라고 합니다.”
“제 제자이자 수양딸입니다. 얼마 전까지 폐관수련을 하고 있어서 이제야 장문인께 인사시키게 되었습니다.”
“후계인 것이오?”
“그렇습니다. 소문주라 봐도 무방합니다.”
“호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설향의 모습에 벽우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공을 일체 익히지 못한 그녀와 달리 설아린은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어서였다.
십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초일류 끝자락에 있는 모습에 벽우진은 조금 놀랐다.
“아린이가 저와 달리 무재가 좀 있는 편입니다.”
“조금이 아닌 것 같소만.”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뛰어난 수준이지만 앞으로도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꾸준히 정진한다면 훌륭한 무인이 될 것이라 생각하오.”
벽우진이 그답지 않게 덕담을 했다.
그 정도로 설아린의 무재가 상당해서였다.
눈빛도 나쁘지 않았고.
물론 강해지기 위해서는 득시글거릴 남자들을 잘 통제해야 하겠지만.
‘흐음.’
한편 벽우진이 그녀를 살펴보는 것처럼 설아린 역시 그를 관찰했다.
근래 중원 전역을 떨쳐 울리는 고수였기에 자연스레 궁금증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늘 같이 생각하는 설향이 극찬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그녀는 더더욱 궁금했다.
천하를 울리는 고수를 만나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설레고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무난한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첫 대면한 벽우진의 모습은 그냥 동네 한량 같은 느낌이었다.
도복을 입고 있었지만 전혀 도인처럼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랄까.
게다가 일흔다섯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벽우진의 모습은 젊은이 그 자체였다.
‘환골탈태를 이루면 다 저렇게 되나? 정말 회춘이 가능한 걸까? 아니면 저 시기에 환골탈태를 해서 노화가 멈춘 걸까?’
설아린은 벽우진이라는 인물보다 그의 모습에 온갖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회춘이 가능하다면 환골탈태야말로 최고의 주안술인 것 같아서였다.
여자에게 있어 동안이라는 말과 젊어 보인다는 말보다 더한 극찬은 없었으니까.
괜히 양선이 무공수련보다 주안술에 주력하는 게 아니었다.
‘한 번 물어볼까.’
어렵게 대하는 사부와 양선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벽우진은 딱히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극고수다운 풍모를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삼제오왕칠성들은 마주하면 상당한 위압감을 뿌린다는데 벽우진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앙큼한 생각이 떠올랐다.
“앞으로의 연락은 아린이를 향해 할 생각입니다.”
“이곳에 파견시키겠단 말이오?”
“장문인께서 허락해 주시면요.”
“혼자서?”
“보조할 인원으로 두 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아린이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벽우진은 설향과 대화 중이었다.
그런데 말을 하는 설향의 태도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총 세 명을 본파에 상주시키겠다는 말이구려?”
“그게 더 빠르고 확실하게 장문인께서 필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력낭비 같소만.”
벽우진이 에둘러 말했다.
곤륜산에 상주시키기에는 설아린의 재능이 아까워서였다.
더구나 하오문의 사정을 생각하면 이만한 재능을 가진 이가 없을 터였고.
“제 생각에는 오히려 이곳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비슷한 또래도 많거니와 아린이를 귀찮게 하는 이들이 없을 테니까요.”
“본인은 지루해할 거라 생각하오만.”
“그럼 당사자에게 물어볼까요?”
설향의 시선이 설아린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설아린이 퍼뜩 놀랐다.
지금까지 딴 생각에 빠져 있었기에 서둘러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아니라고 대답을 못할 것 같소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아이라서요. 자기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거든요.”
“흐음.”
벽우진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암만 생각해도 설아린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서였다.
제자들과의 교분을 생각하면 얻는 게 아예 없지만은 않을 테지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수련을 하는 게 더 이득이었다.
‘비무를 노리는 건가? 비슷한 또래이니 얻는 게 많기는 하겠지만 굳이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있나?’
벽우진이 미간을 좁혔다.
좀처럼 설향의 속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저는 좋아요. 원래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시내에서는 워낙에 귀찮은 일들이 많아서요.”
“평상시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수련에 쏟고 있으니 머물 처소만 배정해 주시면 조용히 지낼 겁니다.”
화려한 외모와 달리 설아린은 북적거리는 것을 싫어했다.
어린 나이에 이미 많은 일들 겪어보기도 했고.
그래서 겉보기와 달리 설아린은 사람들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렇다면야.”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어려운 건 아니니. 다만 정해진 장소로만 이동이 가능하오.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건 허락할 수 없소이다.”
“그 정도는 당연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설향이 옅게 웃었다.
곤륜파에 상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와 하오문이 얻을 수 있는 게 적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벽우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노리는 건 하나가 더 있었다.
‘제자와는 연결될 수 없지만, 외인은 다르지.’
설향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육체가 젊어진 만큼 아무래도 다른 것들 역시 왕성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그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문인.”
“감사까지야.”
벽우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오문의 사람이 상주함으로써 그가 얻게 되는 것 역시 적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일단 관리하기도 편했고.
“아, 이건 현재 강남 무림의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입니다. 어제 날아온 뜨끈뜨끈한 소식입니다.”
“흠.”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가 이어질 때 설향이 깜빡 했다는 듯이 양선에게서 두루마리를 받아 벽우진에게 건넸다.
북해빙궁의 몰살로 깔끔하게 정리된 강북과는 달리 강남은 여전히 오독문과 전쟁 중이었다.
또한 곤륜파와 깊은 관계가 있는 사천당가가 합류한 상태였기에 설향은 그 부분을 더욱더 신경 써서 조사했다.
스륵. 스르륵.
보기 편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벽우진은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안 그래도 강남 무림의 상황이 궁금했던 차였다.
비천단이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독문 역시 만만치 않았기에 현재 상황이 어떨지 궁금했다.
“소림무제와 금강신니의 합류로 전세가 바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천당가로 균형이 맞춰진 상태에서 두 고수가 합류하는 것이니까요. 거기다 기성까지 함께 가고 있으니 오독문이 더 이상 힘을 쓰기는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겠구려.”
특히 사천당가의 활약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 있는 보고서를 보며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북 무림이 정리된 이상 오독문도 더는 힘을 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독강시가 있다고 하지만 그 마물이 만능한 것도 아니었고 무한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예전처럼 매일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린이를 통해서요.”
“보고서만 보내도 충분하오.”
미모라면 서예지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설아린이 아무리 예뻐도 벽우진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겉모습이 젊어 보인다고 하지만 그의 정신연령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때문에 벽우진은 보고서만 볼 수 있으면 된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 일정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오문에게도 떨어지는 것이 많을 것이오.”
“꼭 그런 이유 때문에 도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상당한 인력이 필요한 일인데 무료봉사를 시킬 수는 없소.”
벽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하오문과는 딱 이 정도 관계가 좋다고 생각해서였다.
너무 하오문의 정보력에 의존하는 것도 좋지 않았다.
적당히 주고받는 관계가 지금은 딱 좋았다.
‘본파가 좀 더 클 때까지만 말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곤륜파의 명성은 떨어질 줄 모르고 상승하는 중이었다.
북해빙궁을 정면으로 쓰러뜨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곤륜파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입문을 문의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곤륜파의 산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그게 편하시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온데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신지요? 저희 쪽에서도 준비를 해야 해서요.”
“소문주도 같이 가는 것이오?”
“예. 저 대신에 장문인을 보좌해야 하니까요.”
설향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강호 경험이 적은 설아린이었기에 벽우진과 함께 하는 이번 일정으로 보고 느끼는 게 많을 터였다.
그 모든 게 그녀에게 자양분이 될 터였고.
때문에 설향은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벽 장문인과 친해져서 나쁠 것도 없고.’
설향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 미소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관심이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만.”
“절대 짐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 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오. 알겠지만 나들이를 가려는 게 아니니.”
“그렇기에 더더욱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이번 강호행으로 아린이도 많은 걸 배울 테니까요.”
벽우진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말은 겁을 주는 것처럼 했지만 확실히 설아린이 함께 한다면 이번 일정이 편해질 것은 사실이었다.
일단 숙소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출발은 모레 아침에 할 예정이오.”
“알겠습니다. 그에 맞춰 준비하겠습니다.”
설향이 공손히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껏 알아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잠시 후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벽우진이 의자에 눕듯이 널브러졌다.
혼자 남게 되자 사정없이 늘어진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경내가 소란스러웠다.
오랜만의 외출에 제자들이 들뜬 기색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이번에 새로이 합류한 배혁문이 있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아직은 안 돼. 이제 막 입문했잖아. 기본기도 제대로 다지지 못했고. 다음에 같이 가자, 혁문아.”
“히잉.”
서예지가 차분한 기색으로 막내를 달랬다.
하지만 그럴수록 배혁문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서렸다.
다 떠나는데 자신만 남게 되자 왠지 모르게 버려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모두 다시 돌아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어쩔 수 없어. 사부님이 결정하신 거니까. 그리고 혁문이는 아직 어려.”
“사저도 어리잖아요.”
“어리긴! 난 너보다 세 살이나 많다고!”
얼마 전까지 막내였던 심소혜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한두 살도 아니고 무려 세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어리다고 하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다른 사형제들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봤다.
티격태격 하는 둘의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깜찍해서였다.
< 제 35장.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남자.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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