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11화 (111/325)

< 제 35장.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남자. -01 >

떠들썩했던 경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예기치 못한 손님들이었던 이들이 다시 하산하자 평소의 고적한 분위기로 돌아왔던 것이다.

저벅저벅.

구름이 가득 낀 하늘에서 반달이 겨우겨우 모습을 드러낼 때 벽우진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늘 그렇듯이 뒷짐을 지고서 한적한 경내를 가로질렀던 것이다.

그런 그가 향한 곳에는 하루 종일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대장간이 있었다.

“여어.”

늦은 시각임에도 여전히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대장간의 문을 열고 벽우진이 들어갔다.

열심히 일한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게 좀 과한 것 같아서였다.

무공을 익힌 이도 아니고 나이도 적지 않은데 말이다.

“장문인.”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나이를 생각해야지.”

“아직은 괜찮습니다. 허허허. 오히려 너무 쉬면 몸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혁문이 자는 건 봐줘야지. 이제 열 살인데.”

배율석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는 황급히 창밖을 쳐다봤다.

어째 모양새를 보아하니 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작업한 듯했다.

“벌써 시간이···.”

“장문령부를 만드는 것도 좋지만, 일단 자기 건강부터 챙겨. 너마저 가면 혁문이 혼자 남는다고. 적어도 성년이 되는 걸 보고 가야 하지 않겠어?”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까지는 없고. 정리하는데 시간 오래 걸려?”

벽우진의 시선이 안쪽으로 향했다.

대충 봐도 어질러져 있는 게 상당해서였다.

“금방 됩니다. 어차피 저만 사용하는 대장간이라서. 혁문이도 도구들의 위치는 다 알고 있고요.”

“원래 대장간이 이런 거야?”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게 다 정리가 된 것입니다. 다만 크기에 비해 물건이 이것저것 많은 것뿐입니다. 어지럽혀져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

벽우진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그의 눈에는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벽우진은 성격답지 않게 검소하고 깔끔한 걸 좋아했다.

“예.”

“그럼 얼른 정리하고 나와. 나랑 오랜만에 한잔 하자. 날씨도 좋은데.”

“알겠습니다.”

예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배율석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땅땅한 몸으로 황급히 실내를 정리했다.

“좋구만.”

서둘러서 정리하는 배율석을 일별하며 벽우진이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휘영청 떠 있는 반달이 두 눈에 들어왔다.

“다 끝냈습니다.”

“그럼 갈까.”

“예.”

뒷짐을 지고서 휘적휘적 걸어가는 벽우진을 따라 배율석이 조용히 뒤따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생긴 공자님과 노종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없었고.

“날씨가 선선하니 참 좋아. 나들이하기 좋은 날씨지.”

“벌서 가을이 오는 것 같습니다.”

“무더위가 꺾였으니 여름 역시 절정을 지났다고 봐야지.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게 자연의 이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겨울이더라고요.”

배율석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자인 배혁문이 자라는 것만큼이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말은 곧 그가 늙어간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걱정이 되지?”

터 좋은 곳에 손수 만든 작은 정자에 앉으며 벽우진이 소매에서 호리병 하나와 투박한 모양새의 돌 잔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에 한잔, 배율석의 돌 잔에 술을 따랐다.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 비슷하니까. 게다가 천명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부름을 받는 게 또 인생이니까.”

“그래도 장문인과 형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마저 없었다면···.”

배율석이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만약 곤륜파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면, 그리고 자신이 갑자기 비명횡사라도 한다면 배혁문의 미래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어린아이가 살아갈 곳은 이 세상에서 너무나 뻔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가 없어도 사부가 있었으며 누나, 형들이 있었다.

“안 좋은 생각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게 좋아. 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지. 좋은 생각만 하고 살기에도 인생은 짧단다, 율석아.”

“저도 알고는 있는데,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배율석이 머쓱하게 웃었다.

생각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털어내야지, 그만 생각해야지 하면서도 결국에는 고민거리를 털어내지 못했다.

인간이 참으로 오묘한 게 생각하기 싫다고 해서 딱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인간인 게지. 그래서 곡차를 찾는 것이고.”

“장문인께서는 그냥 술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어허. 이건 곡차야, 곡차. 도인들이 나름의 풍류를 즐기기 위함이랄까.”

“허허허.”

배율석은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벽우진을 따라 그윽한 향을 은은히 내뿜는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괜찮지?”

“예. 달짝지근한 것이, 꽤나 비싼 술 같은데요?”

쩝쩝거리며 맛을 보던 배율석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한 맛이어서였다.

“청범이가 몰래 챙겨줬어. 얼마 없어서 아껴먹는 걸 지금 너에게 따라준 거야. 원래는 나 혼자 몰래 조금씩 아껴먹던 술인데.”

“청하상단의 전대 상단주께서 챙겨주실 정도의 술이라면 진짜 귀한 술이겠는데요.”

“마시는 순간 딱 느낌이 오잖아? 얘는 비싼 술이라고.”

“병도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물만 넣어서 팔아도 제법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벽우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호리병을 작게 흔들었다.

과도한 업무를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이 곡차였기에 벽우진은 마치 신줏단지 만지듯이 술병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건 사기이지 않습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진짜로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왠지 모르게 장문인께서는 진짜 그렇게 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야, 그건.”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배율석의 말을 농담으로 들은 것이었다.

하지만 배율석은 진심이었다.

평소 벽우진의 행실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그래. 율석이가 따라주는 술 좀 마셔보자.”

졸졸졸.

두 손으로 공손히 호리병을 잡은 배율석이 천천히 술잔에 술을 채웠다.

탁하면서도 묘하게 맑은 것 같은 술이 느릿하게 술잔을 채워갔다.

“저야말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나야말로 남아줘서 고맙지. 사실 썩 좋은 환경은 아니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전 이곳이 좋습니다.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도 들고요. 시끌벅적한 곳에서 반평생 이상을 살았으니 이제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다만 마음에 드는 녀석이 좀처럼 나오지 않아서 문제지요. 곤륜산의 정기가 담긴, 곤륜파스러운 검을 만들고 싶은데 역시 예상했던 대로 쉽지가 않네요. 아무래도 제 실력이 턱없이 모자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배율석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벽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자기 실력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더 높은 곳을 보려는 것이고. 무인도 마찬가지야. 가장 중요한 건 현재의 나 자신을 냉정하게 볼 줄 알아야 해. 그래야 미흡한 점을 채우고 앞으로 도 나아갈 수 있지.”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도 너에게 독촉하지 않아. 그러니까 넌 네가 생각한대로 하면 돼.”

“기대가 크게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배율석이 농을 했다.

그 모습에 벽우진도 옅게 웃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는데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지 않아? 부담감에 짓눌리는 것보다는.”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공손히 대답하는 배율석을 쳐다보며 벽우진이 운을 뗐다.

그런데 배율석을 바라보는 눈빛이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말씀하시지요.”

“너 본파의 기본공을 익히는 건 어때?”

“기···본공이요?”

배율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자 벽우진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내 말은 건강을 위해서 익혀볼 생각이 없느냐는 거니까. 내 제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솔직히 네 나이에 무공에 정식으로 입문하는 건 너무 늦었다는 거 알잖아? 그렇다고 네가 대장장이 일을 때려 칠 것도 아니고. 내 말은 순수하게 건강용으로 익혀보는 게 어떠냐는 거다.”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건 뭐야? 장문인인 내가 그러겠다는데. 누가 나한테 뭐라 할 건데? 그렇다고 너에게 본산제자에게 주어지는 운기토납법을 주려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기본공인데.”

“으음.”

배율석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름, 아니 상당히 솔깃한 제안이어서였다.

제 딴에는 관리를 잘해왔지만 안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경험과 숙련도로 버티고 있었지만 이것도 얼마 가지 않을 것이기에 배율석은 벽우진의 말이 너무나 솔깃했다.

“괜찮으니까 받아도 돼.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검공이나 장법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건강을 위한 기본공이니까 부담 안 가져도 돼.”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더 좋은 장문령부를 만들면 돼. 곤륜파의 무공을 익힌 상태에서 만들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겠어?”

배율석의 두 눈이 번쩍거렸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소리였기에 배율석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벽우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성취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지.”

“당장 배우겠습니다.”

“술 마셨는데? 내일 아침부터 시작해. 오늘은 이 흥취를 만끽하고.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기 전까지는 무조건 금주해야 하니까.”

“···정말요?”

배율석이 의심 섞인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비밀리에 벽우진이 곡차라고 부르는 술을 자주 마시는 걸 그는 알고 있어서였다.

다른 이들 역시 알고 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는 것뿐이었고.

“나를 같은 선상에 두면 섭섭하지. 곤륜파 역사에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은 시조 밖에 없는데. 역대 두 번째로 성취가 높은 이가 바로 이 몸이야. 이깟 곡차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말씀이지.”

벽우진이 콧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곡차를 항아리 째로 마셔도 주정을 한순간에 배출할 수 있는 고수가 벽우진이었다.

이런 작은 호리병 정도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당분간 술을 끊어야 한다는 거군요.”

“그래서 내가 큰 그림을 보고 이 자리를 마련한 거지. 당분간은 마시지 못하니까 오늘 맛 좀 보라고 말이야.”

“그런 것 치고는 양이 너무 적은 것 같은데요.”

“자고로 과한 건 모자란 것보다 좋지 않은 법이야. 이걸로 만족해.”

벽우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 말을 배율석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는 주억거려주었다.

“알겠습니다.”

“기본공을 익힌다고 해서 네 일과에 크게 무리가 가지는 않을 거야. 아침저녁으로만 운기행공을 하면 되니까. 기초는 내가 직접 다져줄 것이고. 나이가 있기에 진기도인 때 고통을 좀 느끼기는 하겠지만, 그게 다 건강해지는 거니까 참도록 해.”

“예.”

배율석이 순순히 대답했다.

벽우진 정도나 되는 고수가 직접 기초를 다져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더불어 까칠하기는 하지만 벽우진도 참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에게는 한없이 냉정하기도 하지만.

“자, 그럼 어려운 얘기는 끝났으니까 이제 편하게 마시자.”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배율석은 이 은혜를 꼭 보답하겠다고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술을 따랐다.

그리고 밤도 깊어갔다.

< 제 35장.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남자.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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