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10화 (110/325)

< 제 34장.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 -03 >

법무의 두 눈동자에 자신감이 서렸다.

유경험자라면 모를까 생전 처음 보는 초식인 만큼 제아무리 벽우진이라도 완벽하게 흘려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충돌이 있다면 거기서 틈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법무는 생각했다.

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도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사사사삭!

그런데 벽우진은 그런 법무의 자신감을 산산이 박살냈다.

소림사에 연대구품이 있다면 곤륜파에는 운룡대팔식이 있다는 듯이 한 마리의 운룡이 하늘을 노니는 것처럼 너무나 우아하게 법무의 용왕유권을 피해냈던 것이다.

“허어!”

보고도 믿기지 않은, 오히려 감탄사가 나오는 그 광경에 법무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모습은 잠시뿐이었다.

고고하게 법무의 공격을 피해낸 벽우진은 양손을 활짝 폈다.

그러자 십지(十指)에서 수십, 수백 개의 지풍들이 벼락처럼 쏟아져 나왔다.

씨이잉! 씨잉!

폭우처럼 쏟아지는 지강(指罡)의 세례에 법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장난이 아니라는 듯이 벽우진은 진심으로 공격하고 있어서였다.

하나라도 허용했다가는 전신에 수백 개의 구멍이 뚫릴 게 분명했기에 법무는 평생 동안 고련한 대반야금강공(大般若金剛功)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이윽고 그의 전신에서 찬란한 금광이 솟구쳤다.

퍼퍼퍼펑!

반면에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여덟 명은 폭격과도 같은 벽우진의 지풍 세례에 갈가리 찢겨지며 허공중에 흩어졌다.

오직 본체만이 벽우진의 지풍들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런데 호신강기 안에 있는 법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놈의 지강이 이런 위력을 지니고 있는 거지?’

말 그대로 쉴 새 없이 두들기는 벽우진의 공격에 법무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반야금강공으로 일으킨 호신강기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불안하게 뒤흔들려서였다.

퍼석!

그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결국 호신강기가 뚫렸다.

잔금이 생기기 무섭게 한 줄기 지풍이 끝내 그의 호신강기를 꿰뚫고서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이대로는 진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고통과 함께 법무가 땅을 박찼다.

이대로 가만히 막기만 하다가는 허무하게 질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위험하더라도 지금은 무조건 공격해야 했다.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는 말처럼 지금은 무리하더라도 공세를 펼쳐야 할 때였다.

‘가르침을 청한 마당에 허무하게 맞기만 할 수는 없지!’

애초에 법무는 승산이 적다고 생각했다.

승부에 절대적인 것은 없지만 그래도 천운이 닿지 않는 한 이기기는 힘들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했기에 승리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승부보다는 한 수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비무를 청했기에 법무는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낼 생각이었다.

퍼퍼퍼펑!

적당히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벽우진의 공세는 사정없었다.

진짜로 쓰러뜨리겠다는 듯이 법무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금빛 호신강기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승복이 터져 나갔지만 그럼에도 법무는 벽우진에게 달려들었다.

쓰러지더라도 자신의 모든 걸 쏟아낸 다음에 쓰러질 생각이었다.

‘호오.’

한편 피하는데 힘을 쏟기보다는 막아내며 어떻게든 간격을 좁히려는 법무의 모습에 벽우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법무의 근성에 살짝 놀란 것이었다.

그렇다고 법무가 단순히 두들겨 맞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리를 좁히면서도 법무는 백보신권으로 간간히 반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콰앙! 쾅!

물론 무형의 권강이 날아든다고 해서 맞아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크흥!”

사정없이 지풍을 휘갈기면서 정작 자신은 단 한 방도 맞지 않는 벽우진의 모습에 법무가 콧김을 내뿜었다.

아무리 평정심이 대단한 그라도 이렇게 두들겨 맞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만은 없어서였다.

‘잡았다!’

수련용 목각인형처럼 묵묵히 두드려 맞으며 벽우진에게 접근하던 법무가 눈을 빛냈다.

드디어 그가 원하던 간격이 나와서였다.

파바바밧!

그것을 확인한 순간 법무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현란하고 강맹한 일격을 뿌렸던 것이다.

두 다리로는 항마연환신퇴(降魔連環神腿)를 뿌리고 두 주먹으로는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을 펼쳤다.

그뿐만 아니라 양 손가락 끝에서는 벽우진처럼 날카로운 지강이 뿜어져 나왔다.

파앙! 팡!

말 그대로 전신이 무기라는 듯이 휘몰아치는 법무의 공격에는 뒤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 공세로 모든 걸 결판내겠다는 듯이 전심전력을 다해 벽우진을 공격했던 것이다.

“흠!”

그 순수한 투지에 벽우진도 감히 경시할 수 없었다.

지금 펼치는 혼신의 공격은 과연 소림무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해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다른 관점에서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은 모르지 않았지만 육체를 ‘완벽히’ 다루는 모습에 벽우진은 내심 감탄했다.

‘이 정도로 육체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는 못 만났는데.’

벽우진이 놀란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기에 벽우진은 크게 놀랐다.

시공간의 진에 빠져 있을 때, 또 다른 자신과 매일 같이 비무를 하면서 벽우진이 궁리한 것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거울처럼 모든 것이 똑같았기에 승패는 늘 쉽지 않았다.

운 좋게 이기더라도 다음 날에는 패배하는 게 일상이었고.

더구나 매일 같이 이어지는 비무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그와 달리 또 다른 벽우진의 상태는 늘 최상이었다.

때문에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았고, 그게 이어질수록 벽우진의 고민 역시 길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찾은 방법이 바로 자신의 육신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금세 따라잡혔지만.’

자신의 몸이 달라지는 것만큼 그림자라 불렀던 또 다른 그 역시 강해졌다.

하지만 비무 당시에도 강해질 수 있는 벽우진과 달리 그림자는 딱 어제 수준이었기에 방법을 찾은 순간 패배보다 승리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몸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고.

한데 지금 법무가 바로 그처럼 스스로의 몸을 완벽히 다루고 있었다.

파팡! 파파팡!

극한으로 단련한 육체를 이용해 법무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공격하고 압박했다.

치명적인 사혈만을 노리고서 벽우진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법무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런 움직임에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체력을 철저하게 단련했다는 뜻이었다.

‘북해빙궁주와 비슷한 경지였다면 그냥 압살했겠는데?’

분명 북해빙궁주는 강했다.

막대한 공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방식의 공격은 누구라도 제대로 막아내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하수에게나 통하는 방식이었다.

비슷한 수준이라면 누가 더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정기신(精氣神)을 다루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

그리고 균형적인 면에서 봤을 때 북해빙궁주는 법무와 비교할 수 없었다.

‘대호법님보다도 위야.’

벽우진의 두 눈에 은은한 감탄이 서렸다.

직접 겨뤄보니 설백보다 위의 실력임을 알 수 있어서였다.

물론 연륜이 있기에 설백도 쉽게 지지는 않겠지만 결국 체력적인 부분으로 인해 나중에는 무너질 터였다.

“혹시 딴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서 말이지.”

칼날처럼 상단을 후려치는 항마연환신퇴(降魔連環神腿)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내며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벽우진의 반격이 시작됐다.

지금껏 흘려 내거나 피하던 것과 달리 두 주먹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꽈앙!

그로 인해 연무장의 담벼락이 순간 꿀렁거렸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니 막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콰콰콰쾅!

창졸간에 이어지는 연타에 굉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동시에 법무의 안면이 서서히 굳어졌다.

난타전에 들어가자 미세하게 그가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퍽!

“큭!”

한데 그때 법무의 신형이 활처럼 휘었다.

느닷없이 쇄도한 벽우진의 슬격이 법무의 복부를 정확히 가격했던 것이다.

퍼퍼퍽!

그리고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벽우진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정말 집요할 정도로 지독하게 법무를 밀어붙였다.

반격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게 바로 이런 식이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속절없이 두들겨 맞음에도 법무는 포기하지 않았다.

“후아압!”

제가 졌다고, 이쯤 하자고 해도 될 법한데도 법무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처절하게 진기를 끌어 올렸다.

이왕이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낸 후 비무를 끝내고 싶어서였다.

퍼억!

하지만 그 마음가짐은 일 각을 채 넘기지 못했다.

복부며, 어깨며, 머리 등 전신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공격에 법무도 끝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악독하게도 때린 곳을 연거푸 타격하는 공세에 법무는 결국 얼굴과 전신이 퉁퉁 분 상태로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고생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야, 뭐. 내가 한 일이라고는 흠씬 팬 것 밖에 없는데.”

“허허허.”

본래의 얼굴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퉁퉁 분 얼굴로 법무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눈빛 어디에서도 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엄청나게 개운한 기색이었다.

외상은 좀 있을지 모르나 내상은 전혀 없는 상태였고.

게다가 이런 외상은 그의 자연치유력을 생각하면 하룻밤 정도면 다 가라앉았다.

“얻은 게 있었으면 좋겠군.”

“많은 걸 배웠습니다. 특히 몸을 어떻게 쓰고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그럼 다 훔쳐간 건데.”

“많이 배웠습니다, 장문인.”

“빚 잊지 말고.”

벽우진이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렸다.

법무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느낀 바가 많아서였다.

특히 소림사 무공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기에 벽우진은 생각이 많아졌다.

곤륜파의 무공도 뒤떨어지지는 않지만 여러 부분에서 부족함을 느낄 수 있었기에 벽우진은 이 깨달음을 문서로 고스란히 남길 생각이었다.

‘내가 익혔기에 오늘은 이겼지만, 무공 대 무공으로는 아직 부족해.’

만약 벽우진처럼 특이한 경우를 법무가 겪었으면 오늘의 승패는 반대로 나왔을 터였다.

아니, 똑같이 시공간의 진에 갇힌 후에 탈출했다면 벽우진이 졌을 터였다.

그 정도로 소림사의 무공은 깊고 넓었으며 거대했다.

“할 일이 또 늘었네.”

경건한 자세로 포권지례를 올리고 있는 법무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로 벽우진이 몸을 날렸다.

집무실에 가서 지금 느낀 것을 고스란히 남기기 위해서였다.

겸사겸사 무공들도 개선시키고.

맹렬하게 충돌했던 기파가 잠잠해지자 남궁진은 눈을 떴다.

비무가 끝났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그는 진심으로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수를 빼앗겼군.”

남궁진 역시 법무와 마찬가지로 벽우진을 마주한 순간 격렬한 호승심을 느꼈다.

법무야 불가에 귀의한 승려였지만 그는 속세에서 살아가는 무인이었다.

또한 남궁세가의 수장이었고.

그런 만큼 남궁진은 진심으로 벽우진과 한 번 붙어보고 싶었다.

“내가 먼저 움직였어야 했는데.”

남궁진이 입맛을 다셨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미 법무와 비무를 했기에 벽우진이 그의 부탁을 들어줄리 만무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예의에 어긋나기도 했고.

그러나 비무를 하자고 하루를 더 이곳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아쉽군. 팔만 멀쩡했으면 곧바로 비무를 부탁했을 텐데.”

남궁진은 오늘따라 헐렁한 자신의 왼팔이 원망스러웠다.

팔만 멀쩡했어도 지금까지 고민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다만 아직은 적응기였기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그렇게 머뭇거리는 사이에 법무가 냉큼 기회를 가져가버렸다.

“곤륜파라.”

왠지 모르게 빼앗긴 듯한 느낌을 털어내며 남궁진이 벽우진을 곱씹었다.

앞으로의 무림에서 곤륜파의 영향력이 상당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니 남궁세가도 그 부분에 대해서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제갈세가가 이미 그러고 있었고.

“뒤쳐질 수는 없지.”

떠오르는 신성이라고 말하기에는 벽우진의 나이가 너무나 많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생각한다면 3, 40년은 족히 건재할 것 같았다.

그러니 그 부분도 감안해야 했다.

더 이상 삼제오왕칠성의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 제 34장.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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