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09화 (109/325)

< 제 34장.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 -02 >

“십 년 안에는 진짜 복귀할 지도 모르겠군.”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침공하기 전에는 형산파가 곤륜파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몰락한 곤륜파 대신에 형산파가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북해빙궁과 오독문으로 인해 공동파, 점창파, 화산파, 종남파가 무너진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곤륜파에게도 충분히 기회가 있었다.

“아니. 당장 지금만 보더라도 가장 앞서 있기는 하지.”

법무는 새벽에 보았던 이들을 떠올렸다.

장문인인 벽우진도 벽우진이었지만 남아 있던 네 명의 호법들 역시 만만한 인물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한 명 한 명이 구파일방의 수장급 무경에 올라 있던 걸 떠올리며 법무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면으로 봐도 곤륜파가 득세할 게 자명해서였다.

“불과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러니 나도 할 수 있다.”

방장인 사제가 죽었기에 앞으로의 소림은 이제 그가 책임져야 했다.

가장 연배가 높기도 했지만 그 말고 소림사를 맡을 사람이 없기도 했다.

공동파나 점창파, 화산파, 종남파보다는 상황이 낫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황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북해빙궁의 습격으로 입은 피해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여서였다.

“후우.”

당장 건물부터 새로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법무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문제는 당장 시작하기도 힘들다는 점이었다.

태산북두라는 칭호를 가진 만큼 법무는 오후에 강남으로 길을 떠나야 했다.

스윽.

사천당가의 합류로 반등을 이뤄냈다고 하나 오독문의 저력은 대단했다.

사군(四君)이라 불리는 절대고수들도 문제지만 독강시로 인해 입은 피해가 상당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법무는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에 피어난 호승심이 자꾸 그가 옥청궁을 바라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과는 어쩌면 뻔하겠지만···.’

법무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세인들이 소림무제라 불러주며 천하제일인에 가장 근접한 무인이라고 떠받들어주었지만 사실 그는 그 말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애초에 무승이 된 게 천하제일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건강히, 소림의 무를 잇는다는 생각으로 입문한 게 시작이었다.

“근데 나도 사람이었던 게지. 승려이기 전에 사람이자 무인인.”

오랜 세월 동안 천재라 불리며 수많은 이들에게서 승리를 따냈다.

때론 살계를 열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벽이라는 걸 느끼지 못했는데 근래 들어 그는 무려 두 번이나 벽을 마주했다.

북해빙궁주와 벽우진이라는 벽을 말이다.

“찾아가볼까.”

법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벽우진에게 찾아가 대련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현재 처한 상황이 그를 말리고 있었다.

당장 한 시진 후에는 곤륜산을 내려가야 했고, 전투가 끝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섣불리 벽우진을 찾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벽우진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기에 법무는 고민이 되었다.

“후우.”

“배짱이 두둑한데. 남의 제자들이 수련하는 걸 당당히 지켜보다니.”

“장문인?”

“벌써 내 목소리를 잊었나? 그 정도로 늙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나도 창창한데 네가 벌써 그러면 안 되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법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뒷짐을 진 채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벽우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하루 웬 종일 사과만 하네.”

“저도 모르게 그만.”

법무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찌됐든 타파의 무공수련을 훔쳐본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사과한 것이다.

“뭐, 소림무제라고 불리는 이가 곤륜파의 무공을 훔쳐갈 리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다음번부터는 조심해 주었으면 좋겠군.”

“두 번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법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보든 자신의 실수가 맞았으니까.

그러니 인정할 것은 깔끔하게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좋았다.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심심한 모양이군. 홀로 나와 있는 걸 보면. 다들 퍼져 있던데.”

“다들 죽어라 달려왔으니까요. 싸울 힘이 남아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리해서 달려왔으니 뻗어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흠.”

마치 이 정도로 곤륜파를 생각했다는 듯이, 그걸 알아달라는 듯이 말하는 법무를 벽우진은 지그시 쳐다봤다.

그런데 그 눈빛을 법무는 피하지 않았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앞으로는 좀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누구 하나가 희생하는 일 없이 말이지요.”

“그 정도라면 나 역시 거절할 이유가 없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독불장군처럼 걸어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더구나 벽우진은 장문인인 만큼 후일도 생각해야 했다.

‘언제까지나 내가 살아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지금이야 자신이 있기에 누구도 찍소리 못한다지만 자고로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었기에 벽우진도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장문인.”

“왜?”

“실례가 안 된다면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예.”

벽우진이 재차 물었다.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법무의 일정은 빠듯해서였다.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게 나을 텐데.”

“하루 이틀 정도 피곤한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문인과의 비무는 오늘이 아니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지라.”

완곡한 거절에도 법무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호승심을 숨기지 않고 두 눈에 드러냈다.

말했던 대로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벽우진을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서였다.

어쩌면 오독문과의 전투에서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고.

‘화산검제가 죽고 벽력도왕이 죽었지. 점창파의 장문인 역시 명을 달리했고. 나라고 죽음이 피해갈 리 없다.’

가깝게는 그의 사제이자 소림사의 방장 역시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물론 정당한 싸움은 아니었지만 원래 전쟁이란 게 그랬다.

애초에 정정당당한 싸움은 없었다.

죽거나 살아남거나 둘 중 하나였다.

“결과를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렇기에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소림무제라 불리는 이가 너무 저자세인 것 같은데.”

“장문인이시니까요.”

벽우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은근슬쩍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법무는 흔들리지 않았다.

“원하는 게 있다고 너무 띄워주는데.”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고.”

법무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지금껏 보여준 벽우진의 성격이라면 수십 번을 거절해도 이상하지 않아서였다.

근데 정작 자신은 마음 약한 척을 하자 법무는 실소가 절로 나왔다.

물론 그걸 티내지는 않았다.

“따라와.”

“감사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벽우진이 이내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둘이 대련하기에 적당한 장소로 법무를 데려갔던 것이다.

벽우진을 따라 일다경 정도 걸어간 법무는 담벼락이 제법 높게 세워진 아담한 연무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비무하기에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연무장이었다.

“관리가 잘 되어 있네요.”

“뭐야, 그 말은? 인원이 없다는 걸 돌려 깐 건가?”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곧 제자들로 가득 찰 거다. 근 시일 내에 속가제자들을 모집할 계획이니까.”

“많이 모이겠는데요.”

몰랐던 소식이었기에 법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 거뭇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지금 곤륜파의 위명이라면 상당히 많은 이들이 속가제자가 되기 위해 지원할 것 같아서였다.

“그랬으면 좋겠군.”

“아마 꽤 많은 이들이 지원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은 자질이지. 무재도 무재지만 난 인성을 중요시하거든.”

“어···.”

법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벽우진이 인성을 중요시한다고 하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색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무재가 뛰어나다고 해서 꼭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니까. 다만 가능성이 높은 것뿐이지. 그건 너 역시 알 텐데?”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 도전하느냐 하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포기하면 거기에서 끝이니까요.”

“천재인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신빙성이 좀 떨어지기는 하다만.”

“저 역시 많은 노력 끝에 여기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수도 없이 깨지고 박살나면서 말이지요. 단지 계속 노력하다 보니 소림무제라 불리게 된 것뿐입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소림무제라는 이름보다 패선이라는 이름이 더 중원을 진동시킬 것 같습니다.”

벽우진을 마주한 채로 법무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번 북해빙궁과의 결전이 알려지면 패선이라는 별호가 이제(二帝)보다 앞에 있을 게 분명해서였다.

“그렇게 아부해도 줄 거 없다. 오늘의 가르침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따로 받아낼 테니까.”

“저 역시 거저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패선의 가르침이니까요.”

“흐음.”

벽우진이 미간을 좁히며 법무를 쳐다봤다.

아무리 북해빙궁주를 때려잡았다지만 저자세도 이런 저자세가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법무의 배분이나 명성이 낮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승려라서 그런가.’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명이 무명이다보니 조금은 거만할 줄 알았는데 그런 모습이 전혀 없어서였다.

오히려 나이와 위상에 어울리지 않게 예의 바른 모습에 벽우진은 살짝 당혹스러웠다.

그렇다고 싫은 건 또 아니었지만.

“시간이 얼마 없으니 바로 시작하자고.”

“알겠습니다.”

“선수는 양보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 허례허식이 필요한 단계는 지났잖아?”

“물론입니다.”

법무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규칙에 맞게 하는 대련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경지에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때문에 법무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접근했다.

거리라는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한순간에 코앞까지 다가갔던 것이다.

궁신탄영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마치 축지법을 펼친 듯한 속도였지만 의외로 법무는 당황하지 않았다.

스슥!

마치 이 정도쯤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도리어 그 역시 벽우진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한 줄기 주먹이 유유히 뻗어 나왔다.

소림사가 자랑하는 칠십이종절예 중 하나이자 그가 가장 심도 깊게 익힌 무공 중 하나인 용왕유권(龍王柔拳)을 펼친 것이다.

무당의 면장처럼 극유(極柔)의 묘리가 담긴 일권이 마치 바람처럼 벽우진에게 스며들었다.

투웅.

법무의 두 눈이 흔들렸다.

단순하지만 수많은 변화가 담겨 있는 그의 일권을 벽우진이 너무나 쉽게 흘려내서였다.

겉으로는 아무런 기운이 담겨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집채만 한 바위조차도 일격에 박살낼 거력이 담겨 있었는데 그 일권을 벽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손등으로 튕겨 흘려냈다.

“흡!”

그리고는 흘려낸 자세 그대로 손을 들이미는데 마치 그 모양새가 자신이 일부러 맞으려고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즉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직접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건 몇 수 앞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에 법무는 놀라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아는데 순순히 맞아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파바바밧!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법무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동시에 벽우진을 중심으로 전후좌우에서 아홉 개의 법무가 나타났다.

용왕유권과 마찬가지로 당당히 칠십이종절예에 속해 있는, 경신술 중에서는 단연 손에 꼽히는 절학인 연대구품(蓮臺九品)이 펼쳐진 것이다.

쌔애액!

단순히 잔영이 아니라는 듯이 아홉 명의 법무는 각기 다른 자세를 취했다.

똑같은 용왕유권이지만 각자가 다른 초식을 펼쳤던 것이다.

‘이번 공격은 쉽게 피할 수 없을 게요!’

< 제 34장.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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