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4장.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 -01 >
“······.”
사마륭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성격이 고약하지 머리가 비상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던 벽우진이 너무나 정확히 그의 속내를 읽어내서였다.
딱 그때 당시의 생각을 정확히 읊어대는 벽우진의 모습에 사마륭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어쩌나. 본파는 너무나 멀쩡히 있는데.”
“저는 곤륜파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고, 또한 공동파가 자리 잡은 감숙성과 청해성은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그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절대 곤륜파를 이용하려거나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럼 떠넘겼다는 소리네? 무림의 명문세가께서 고난에 빠진 공동파를 좌시하면서 말이지.”
“어···.”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사마륭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지금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서였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제갈현도 앉아 있었다.
“근데 본파의 잠재력을 어찌 알았을까? 나는 사마세가의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데. 설마 몰래 뒷조사를 한 건가?”
“······.”
사마륭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하나의 함정을 빠져 나오니 다른 함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애초에 빠져나올 구석은 없다는 사실을.
“사마우현 형님이 보고 싶군.”
흠칫!
사마륭이 움찔거렸다.
개왕이 말한 사람은 바로 그의 부친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친을 찾는 이유는 명백했다.
돌려서 그를 질책한 것이다.
“지금까지 변명만 한 것 같은데. 대체 언제쯤 날 납득시킬 생각이지?”
“죄송합니다!”
“사과한다는 말은 모든 걸 인정한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전 결코 그런 의미로 서신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장문인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로 그 부분을 사과드리는 것이고요.”
사마륭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방 안의 분위기는 점점 흉험해졌다.
지금 사마륭이 하는 말이 개소리임을 모두가 알고 있어서였다.
특히 소림무제와 남궁진의 표정이 가장 차가웠다.
무인으로서 사마륭의 행동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싫은 짓이어서였다.
“그러니까 잘못한 것은 없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런 식으로 흘러간 거다?”
“그, 그렇습니다.”
“어이, 제갈가주. 이렇다는데? 넌 어찌 생각하나?”
“제 생각도 장문인과 같습니다.”
제갈현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은 표정이었다.
명문세가이자 백도를 대표하는 가문 중 한 곳인 사마세가가 한 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졸렬했기에 제갈현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개왕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갔다.
만약 사마우현이 살아 있었다면 절대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만약 부친이 살아계셨다면 북해빙궁에 이렇게 처참하게 박살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방만하고 안일한 마음가짐의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도 너 역시 기분이 상하지는 않겠군. 내 의도와는 다르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 거니까. 안 그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느껴지는, 두루마리를 봤을 때보다 더욱 위화감이 드는 말에 사마륭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 눈빛에도 벽우진은 오히려 히죽 웃었다.
“이게 의도치 않게 세간에 알려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지금만 하더라도 알게 된 사람이 몇 명이야? 그러니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강호인들이 알게 되지 않겠어? 중원 전역에 알려질 수도 있는 거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니까.”
“자, 잠시만요!”
사마륭이 다시 한 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벽우진에게 날아가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곳의 주인은 나야. 내 허락 없이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허용되지 않아.”
“으읍!”
무지막지한 중압감에 사마륭의 목덜미에 핏줄이 섰다.
몸을 사정없이 짓누르는 압박감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물었더니 자연스레 목은 물론이고 이마에 핏줄이 섰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말은 할 수 없었다.
딱 버티는 게 한계였던 것이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지.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그리고 이렇게 다 함께 온 걸 감사히 여기도록 해. 만약 혼자 왔어 봐. 네깟 놈이 멀쩡히 나갈 수 있었겠어?”
“······.”
소림사와 남궁세가, 제갈세가와 아미파의 무인을 앞에 두고도 벽우진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겁박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누구 하나 그 말에 제재를 가하는 이는 없었다.
은원(恩怨)은 당사자 간의 문제였기에 끼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벽우진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이가 이 자리에 없기도 했고.
스윽.
더구나 남궁진과 개왕을 번갈아 보는 눈빛에서 모든 이들은 벽우진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벽우진의 시선이 남궁진의 텅 빈 왼팔과 개왕의 왼쪽 발에 잠시 동안 머문 것을 모두가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히끅!”
그 모습에 사마륭이 딸꾹질을 했다.
벽우진의 눈빛이 말하는 바를 눈치 빠른 그가 못 알아들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감히 벽우진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의 팔이나 발 한 쪽이 즉시 썰려 나갈 것만 같아서.
“꺼져. 더 이상 네놈 면상 보기 싫으니까.”
“무, 물러나겠습니다!”
사마세가라는 가문의 가주답지 않게 사마륭은 너무나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그러나 누구 하나 측은하게 생각하게 않았다.
벽우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몸 성히 나간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도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성격인데 또 선을 넘거나 악독한 것은 아니니.’
소림무제라 불리는 법무가 묘한 눈으로 벽우진을 바라봤다.
지금껏 알려진 곤륜파의 장문인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바로 벽우진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벽우진은 세인들에게 신선들의 문파라 불리던 곤륜파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장문인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까지의 도인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라는 거지.’
괴팍하고 고약하며 종 잡을 수 없는 성격이지만 이상하게 밉지 않은 느낌에 법무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속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금 이 자리는 그 감정을 드러내도 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량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적정선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꼬라지를 보니까 굳이 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될 것 같더만. 10년 안에 가문을 회복시키기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능력은 있습니다.”
“부친보다 못해서 문제지. 호랑이는 힘들더라도 늑대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개왕이 대화에 끼어들며 혀를 찼다.
어째 보면 볼수록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혹시 나중에 찾아가는 건 아니시겠죠?”
“그것도 나쁘지 않지.”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남궁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벽우진이 한 말이었기에 농담으로 들리지 않아서였다.
벽우진이라면 정말 몰래 찾아가고도 남을 위인이었으니까.
“죗값은 앞으로 충분히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복수할 때를 기다리겠지. 군자의 복수는 십년도 길지 않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이야.”
“하하하.”
제갈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것 역시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벽우진은 털털하게 손을 저었다.
“뭐, 그것도 재미있겠네. 본파가 먼저 회복할지 아니면 사마세가가 먼저 일어날지 지켜보는 것도.”
“굳이 장문인께서 사마세가와 경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왜? 난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래야 밟아주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 오늘은 경고, 다음에는 직접적인 타격.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지 않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벽우진의 말에 모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하나같이 영화 사태를 힐끔거렸다.
이 자리에서 그나마 벽우진과 대등하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이 그녀뿐이어서였다.
“그건 좀 아닌 것 같네요.”
“농담이야. 근데 사과는 다 한 것 같은데, 다들 안 나가?”
“아직 드릴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해.”
대놓고 축객령을 내리던 벽우진이 의자에 깊게 기댔다.
그러나 그 심드렁한 태도에도 제갈현의 표정은 일관적이었다.
“지난번에 약속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이참에 상세하게 논의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약속? 사과 말고?”
“어, 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하는 모습에 제갈현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벽우진의 모습을 보아하니 진짜 까먹은 듯해서였다.
“딴 게 있었나?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뭔 작은 문파에 이렇게 결정할 일이 많은지.”
“허허허.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저만 해도 업무만 보는데 하루가 거의 다 가니까요.”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앉기 싫었는데···.”
진심이 담긴 벽우진의 투덜거림에 모두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싫어하는 것 치고는 너무나 잘 어울려서였다.
패선이라는 별호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고.
“제가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해.”
벽우진이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 벽우진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갔다.
곤륜파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는 말들이어서였다.
그렇다고 빚지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점심 식사를 마친 법무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과거 있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하나 곤륜산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법무는 과거와 현재가 얼마나 비슷한지 체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개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중원 전역을 뻔질나게 돌아다니는 개왕도 과거의 곤륜파에 방문한 적은 없었을 테니까.
“하앗!”
“오늘은 안 진다!”
“흐흐. 과연 말처럼 될까?”
소림무제라 불리는 그답게 청각 역시 예민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금속음과 마찰음을 그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법무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는 되겠지?”
딱히 금역에 대해서 들은 게 없기에 법무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공용으로 사용할 법한 넓은 연무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깡! 까앙!
삼백여 명은 족히 동시에 수련할 수 있을 것 같은 널찍한 연무장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십대 후반부터 갓 열 살이 될까 말까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대련을 하거나 각자 수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본 법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제자를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어째 하나같이 상당한 공력을 쌓은 것 같아서였다.
“허어.”
게다가 수준 역시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무공에 입문한 시기가 있기에 실력이 그저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직접 본 곤륜파 제자들의 수준은 그의 예상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특히 두 명은 소림사의 본산제자들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론 일대제자들하고는 비교할 수 없지만 입문한 시기를 따지면 오히려 곤륜파 제자들이 위였다.
“도대체 어떤 비술을 쓴 거지?”
입문한 시기를 생각하면 절대 가질 수 없는 공력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 법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각각의 자질 역시 나쁘지 않았다.
천고의 기재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들 수재 이상은 되어보였다.
< 제 34장.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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