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07화 (107/325)

< 제 33장. 할 건 해야지? -03 >

“그런 것보다는 거시안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과거에 저희가 잘못한 것을 알고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사과할 생각이 있으니까요. 따로 지원할 생각도 있고요.”

“그러니까 그냥 잊어라? 쪼잔하게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벽우진의 표정이 달라졌다.

웃고 있는데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제갈현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장문인!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화 사태께서는 절대 그런 의미로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저 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장문인이야말로 너무 당한 것만 생각하는 것 같네요.”

중재하던 제갈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아니 그가 적절히 중재했을 텐데 이번 말로 모든 게 틀어졌다.

그것을 제갈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반대로 생각해보자고. 만약 아미파와 본파의 상황이 반대라면, 내가 당신이 했던 말을 똑같이 하면 하하호호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나?”

“······.”

“간단하게 생각해보자고. 역지사지라는 좋은 말도 있잖아? 아미파가 지금 요 모양 요 꼴이야. 근데 강호가 어지러우니 우리 함께 힘을 합쳐 고난을 극복해보자고 말을 하면 당신은 어떤 심정일 거 같아? 옳다구나하고 나설 수 있겠어?”

영화 사태의 얼굴이 굳어졌다.

벽우진의 말마따나 반대의 입장이라고 생각하자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래서 제자들을 희생 시키겠다? 강호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정작 힘들었을 때는 외면한 이들을 위해? 설마 단순히 말뿐이라고 해서 지껄이는 건 아니겠지?”

“······.”

“주둥이가 다 있다고 입이 있는 건 아냐. 말을 하려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해라.”

영화 사태가 두 눈을 감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녀가 벽우진의 입장이어도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서기가 힘들 터였다.

아무리 불심이 깊다고 한들 그녀는 사람이었지 부처는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제갈가주 때문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벽우진이 비스듬히 앉아있는 자세로 흉흉한 안광을 뿌렸다.

도인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패도적인 모습이었지만 누구 하나 그 모습을 가지고 딴죽을 걸지 못했다.

패선의 성향에 대해서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였다.

게다가 충분히 벽우진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고.

“영화 사태께서 피곤해 조금 예민해지신 것 같습니다.”

“내가 그걸 신경 쓸 이유는 없지.”

“흠흠!”

슬그머니 변호하러 입을 열었던 개왕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오랜만에 괄시를 받는 것 같아서였다.

지금의 나이가 된 후 어디 가서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성격이 더럽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개왕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위치는 을이었다.

그렇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내 기분에 신경 써야 하지 않나?”

“죄송합니다.”

동년배라 할 수 있는 영화 사태가 깨갱하며 물러나자 감히 벽우진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 자리에는 소림무제도 있었고, 제왕검도 있었지만 누구도 벽우진의 시퍼런 눈빛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래서, 왜 찾아온 거야? 그냥 쉬고 있지.”

“휴식은 충분히 취했습니다. 오후에 가기 전에 인사를 제대로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복귀?”

벽우진이 제갈현을 시작으로 앉아 있는 이들을 찬찬히 훑었다.

그러다가 한 명을 발견하고는 묘한 눈빛을 흘렸다.

“복귀하는 곳도 있고, 남쪽으로 가는 곳도 있습니다.”

“오독문?”

“예. 아무래도 북해빙궁을 정리했으니 이제는 오독문 차례이니까요. 물론 북해빙궁을 멸절시켜 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가 감사하고 있습니다.”

꾸벅.

제갈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화 사태는 물론이고 앉아 있는 이들이 벽우진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한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에도 벽우진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어쩌다 보니 엮여서 그렇게 된 거지 너희들 도와주려고 한 건 아니다. 난 그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

“결과적으로 그게 도와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그 말 하려고 온 거야?”

“진짜 본론은 따로 있습니다. 저번에 장문인께 약속드렸지 않습니까. 전쟁이 끝나면 제대로 사과하겠다고요.”

“그랬었지.”

제갈현이 가져왔던 연판장은 아직도 여기 집무실에 있었다.

그 날 이후 다시 꺼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말뿐인 연판장만 믿기에는 세상이 녹록치 않았기에 벽우진은 받기만 해두었을 뿐 따로 관리하지는 않았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신 분들만이라도 하겠다고 찾아오셨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최대한 이행하겠습니다.”

명망 높은 소림무제와 제왕검은 물론이고 하나하나가 일문의 수장들인 이들이 재차 벽우진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위령비에 향 하나씩 피우고 가.”

“알겠습니다.”

조금은 먹먹한 벽우진의 목소리에 제갈현이 내심 안도했다.

첫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무리는 괜찮게 지은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기는 일렀다.

스윽.

한순간에 눈빛이 달라진 벽우진이 끝자리에 앉은 이를 뚫어져라 쳐다봤기 때문이다.

그 강렬한 눈빛에 제갈현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시선도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너는 사과를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저 말입니까?”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벽우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드는 서늘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를 마주하고도 사마륭은 발뺌을 선택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를 떼겠다?”

“무엇을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마륭이 되레 당당하게 반문했다.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벽우진을 똑바로 마주했던 것이다.

그러자 벽우진이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드르륵.

잠시 서랍을 당기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온 벽우진이 검붉은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던졌다.

정확히 사마륭을 향해 두루마리를 던진 것이다.

“···이게 무엇입니까?”

“직접 봐, 궁금하면.”

“으음!”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느껴지는 두루마리를 사마륭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하지만 열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도 궁금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사마륭은 입술을 깨물며 두루마리를 천천히 풀었다.

‘혈향이군.’

검붉은 얼룩을 본 순간 사마륭은 짐작했었다.

두루마리에 묻어 있는 게 핏자국임을 말이다.

그런데 직접 만지니 미약하지만 혈향이 올라왔다.

“무슨 내용입니까?”

천천히 두루마리를 펼치던 사마륭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직감대로 불길한 내용이 여지없이 맞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벽우진을 바라봤다.

“설마 다른 이의 필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어, 어디서 이것을···.”

“출처를 묻기 전에 왜 그딴 식으로 뒷공작을 펼쳤는지에 대해서 설명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뒷공작이라요?”

사마륭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이 자리에서 이것이 밝혀진다면 그는 물론이고 사문 자체가 매장을 당할 수도 있어서였다.

가뜩이나 현재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상태인데 말이다.

“저기, 그러니까···. 어?!”

두 손으로 서신을 구기던 사마륭이 두 눈을 부릅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아귀에 있던 서신이 저절로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서였다.

그래서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일단 유일한 증거인 저 서신만큼은 자신이 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어허.”

“큭!”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딱 몸을 일으키는 것뿐이었다.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나 절정에 겨우 턱걸이한 실력으로는 벽우진이 뿌리는 기세에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증거까지 훼손시키려고.”

“아, 아닙니다!”

“난 너 같은 놈들을 믿지 않아. 입만 산 놈들의 특징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알거든.”

벽우진이 냉엄한 눈빛으로 사마륭을 직시했다.

그러자 사마륭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제가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보라고 꺼낸 거니까.”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사마륭을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주시하며 벽우진이 말했다.

그러자 모두의 궁금증을 대신해서 제갈현이 조심스럽게 허공에 떠 있는 서신을 잡았다.

사라락.

허공섭물로 떠 있던 서신이 반항하지 않고 손에 들어오자 제갈현은 내심 안도하며 천천히 적혀 있는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제갈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벽우진의 적의와 퉁명스러움도 이해가 갔다.

사마륭을 머물게 해준 것만으로도 벽우진은 상당한 아량을 베푼 것이었으니까.

“이게, 정녕 사실입니까?”

“······.”

벽우진의 의해 강제로 자리에 착석하게 된 사마륭이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알은 쉴 새 없이 구르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데 그래?”

“방주님께서도 직접 보시죠.”

“왜 그래, 사람 무섭게. 나 이제 발 하나 없는 거 알잖아. 좋게 좋게 가자고, 제갈가주.”

개왕이 너스레를 떨며 제갈현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애써 좋게 만든 분위기를 다시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서신을 읽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신 무거운 표정만이 남았다.

“변명할 시간을 주지. 다 읽을 동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주마.”

암담하게 변한 개왕의 표정을 보며 벽우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신을 납득시키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동조하면 동조하는 대로 대응하면 되는 일이니까.’

애초에 벽우진은 여기 앉아 있는 이들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과를 하러 왔다니 받아주면 그뿐이었다.

이후의 관계는 상황에 맞추면 되었고.

“허어.”

개왕에 이어 소림무제, 제왕검, 금강신니가 차례대로 서신을 읽었다.

그리고는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사마륭을 노려보았던 것이다.

“그, 그게. 그러니까···.”

“설명해 봐. 왜 이랬는지.”

“전체적인 상황이 좋지 않아서 북해빙궁의 전력을 분산시킬 생각으로···.”

“그래서 본파로 유인했다? 일단 나부터 살자라는 심보로?”

“아, 아닙니다!”

이죽거리는 벽우진을 향해 사마륭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아니라고 무조건 잡아떼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좌중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아니긴. 곤륜파가 다시 멸문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쓴 거 아냐? 일단 북해빙궁의 전력부터 분산시킬 생각으로. 일단은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

“결단코 아닙니다!”

“근데 왜 이런 서신을 공동파 제자에게 보냈을까. 그것도 간절하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서신을 받고 말이지. 그때의 사마세가는 분명 건재했을 텐데.”

“상황이···.”

사마륭이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의 편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벽우진의 말마따나 변명에 불과해서였다.

또한 뒷공작을 부린 것이기도 했고.

“할 말은 그게 다냐?”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아마도 다시 망하거나 멸문지화를 입었을 거라 생각하고 일을 벌였겠지. 어차피 재건하다가 사라지는 문파가 한둘도 아니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명분도 얼마나 좋아? 북해빙궁이 싹을 자르기 위해 곤륜파를 지워버렸다는 식으로 소문을 낼 수도 있고.”

< 제 33장. 할 건 해야지? -03 > 끝

ⓒ 윤신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