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06화 (106/325)

< 제 33장. 할 건 해야지? -02 >

시체를 깔끔하게 불태우고 청소를 끝마치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그러나 하룻밤을 샌다고 피곤함을 느낄 정도로 벽우진의 경지는 낮지 않았기에 정리를 끝마치기 무섭게 벽우진은 평소와 같이 업무를 봤다.

“넌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비 호법님의 실력을 아시지 않습니까? 외상은 금창약을 발랐고, 내상도 요상약을 먹어서 괜찮습니다.”

“안색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집무실 자신의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채로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내상 역시 가볍지만은 않아서였다.

“환골을 이루어서 육신은 튼튼하지 않습니까. 견딜 만 합니다.”

“그렇게 믿다가 훅 가는 거야. 자고로 건강은 멀쩡할 때 챙겨야 해. 아, 이제부터 챙겨야지 하면 늦는 거야.”

“나이는 사형이 더 많으십니다만.”

“육체나이를 따져야지. 내 육체나이가 너랑 같냐?”

“허허허.”

청민이 멋쩍게 웃었다.

육체적인 나이로 따지면 할 말이 없어서였다.

동시에 정신적인 나이도 거론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꺼내는 건 자유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오롯이 그가 감당해야 했으므로.

“뭐야? 눈빛이 좀 야리꾸리한데? 너 지금 이상한 생각했지?”

“아닙니다.”

“정색하는 거 보니까 맞는 거 같은데. 무슨 생각했어? 지금 말하면 내가 그냥 넘어가줄게.”

“저도 더 이상 어린 애가 아닙니다, 사형.”

“에잉.”

단호하게 선을 긋는 청민의 모습에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초반에는 어째 순둥이 같았던 청민이 이제는 닳고 닳은 노도인이 된 것 같아서였다.

“부상자들에 대해서 보고하겠습니다.”

“서면보고 해도 되는데.”

“그럴 수는 없지요. 지금은 손님들도 많은데요.”

“걔네들은 신경도 안 쓸 걸. 막상 볼 것도 없고.”

벽우진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처음에야 놀랐겠지만 볼거리는 딱 그게 전부였다.

때문에 벽우진은 보지 않아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그래도 격식은 차려야지요. 전통과 역사가 있는 문파가 본파이지 않습니까.”

“눈치를 봐야 하는 쪽은 저들이다. 우리가 아니라.”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신경 쓰지 마.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마치 자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에이. 우리 대벽검께서 왜 그래?”

“어제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십존 애들은 원래 강해. 내가 붙어 봐서 잘 알아. 호법 분들 아니면 감당하기 힘들어. 오히려 버텨낸 게 대단한 거라고. 자신감을 가져라, 청민아.”

의기소침해 있는 청민을 달래듯이 벽우진이 말했다.

청민과 서진후가 말도 안 되는 발전을 이룩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십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가 겪어본 십존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수장들과 비견될 만한 고수들이었다.

그런 만큼 일격이라도 견뎌낸 청민과 서진후가 대단한 것이었다.

“나이도 저희들이 훨씬 많은데···.”

“그렇게 따지면 끝도 없다. 남하고 비교하는 건 상향심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해. 자기비하와 자격지심은 버려야 해. 거기에 빠지는 게 심마의 시작이야. 마음속의 마귀가 먹는 게 바로 그 두 가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보고해봐.”

“사망자는 없고 부상자가 열두 명입니다. 저와 청범이를 포함해서 호법들이 여섯 명, 그리고 당가 쪽에서 네 명이 다쳤습니다. 이 중 중상자는 저와 청범이 뿐입니다. 당가 쪽에서는 경미한 부상만 입었습니다.”

“다행이네. 민호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되겠어.”

벽우진이 진심을 담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약 당필교를 비롯해서 당가의 기술자들이 죽었다면 정말 면목이 없었을 텐데 다행히 죽은 이는 없었다.

“현재 비 호법께서 부상자들을 살피는 중입니다.”

“의원이 필요하기는 할 것 같은데 말이지. 언제까지 비 호법에게 의존할 수는 없으니까.”

“전문적인 의술을 익힌 의원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기반도 없고요.”

“영입 밖에는 답이 없겠지?”

“예.”

고만고만한 의원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실력 있는 뛰어난 의원은 달랐다.

돈만으로는 회유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청민 역시 고개를 저었다.

“슬슬 대비를 하긴 해야 해.”

“사천당가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결국 자립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늘 시간이 문제야. 돈이 해결되니 인재와 시간이 발목을 붙잡네.”

“엄밀히 말해 돈도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만.”

청민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갔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거지 해결된 것은 아니어서였다.

“차차 해결될 문제잖아? 급하지도 않고.”

“하오문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근시일 내에 다시 찾아오겠다고요.”

“지금은 좀 힘들겠지. 저쪽이랑 마주쳐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리고 따질 것도 있지 않습니까. 도울 수도 있었는데 그냥 물러났으니까요. 아무리 사형께서 물러나라고 했지만.”

청민이 살짝 괘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물러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예의상 한 번 정도는 함께 싸우겠다고 말해도 되는데 말이다.

“있어 봤자 도움도 안 됐다. 오히려 신경만 분산되었을 걸. 너랑 청범이도 위험했는데 고작 백여 명이 함께 한다고 달라졌을까. 되레 피해만 더 컸을 거다. 하오문주도 그걸 알기에 순순히 물러난 것이고.”

“그래도 말이라도 한 번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난 오히려 자만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는데. 적어도 다리는 붙잡지 않을 것 같아서.”

“끄응!”

“어차피 남이다. 서로 이용하는 관계에 불과해. 좋은 말로 상부상조하는 거지, 사실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챙겨가는 것뿐이다.”

벽우진이 냉정하게 말했다.

하오문과의 관계는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아이들 상태는 어때?”

“지난 번 습격 때 면역이 생겨서 그런지 크게 놀란 이는 없습니다.”

“혁문이는?”

“괜찮습니다.”

가장 어린 배혁문도 괜찮다는 말에 벽우진은 그제야 안도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가장 어리기도 하지만 곤륜파에 입문한지 얼마 안 되었기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럼 보고할 거는 끝난 거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또 뭐?”

벽우진이 이제는 살짝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도 못 잤기에 좀 늘어져 있으려 하는데 청민이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아서였다.

“괜찮을까요? 저희의 전력이 너무 노출된 거 같은데.”

“그럼 어때. 오히려 과시하고 좋지. 너무 숨기고 있는 것도 좋지 않아. 게다가 그 대단하다는 소림무제와 제왕검, 기성과 권성 등등이 우르르 달려왔는데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최대한 숨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은 확실하게 같은 편이라고 보기 힘드니까요.”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현이 직접 찾아와 과거의 실수를 사과했고, 벽우진이 일정 부분 용서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청민은 명문정파들을 믿지 않았다.

적이 아닐 뿐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건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뒤통수 맞는 건 내 적성이랑 안 맞거든. 오히려 내가 뒤통수를 치면 모를까.”

“이제는 체면과 위신을 챙기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나름 조심하고 있다고. 예전처럼 막 날뛰지는 않잖아?”

“그 점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 알아. 그러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청민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벽우진도 알았다.

그렇기에 벽우진도 단호하게 말했다.

벽우진 역시 청민과 같은 생각이어서였다.

“아마 오늘 오후 쯤에나 찾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는 알아서 잘 차단해. 뭐, 호법 분들께서 만나는 걸 귀찮아 할 가능성이 크지만. 혹시나 다른 애들이 사고 칠 수도 있으니 그것도 신경 쓰고.”

“저 쪽이 문제죠. 우리 애들은 사고 안 칩니다.”

“너무 맹신하지는 말고. 괜히 혈기왕성하다는 말이 있는 게 아냐.”

다시 한 번 하고 싶은 말이 식도까지 올라왔지만 청민은 참았다.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예.”

“그럼 일 봐. 난 좀 쉬어야겠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이미 의자에 널브러져 있지만 더욱더 늘어져 있고 싶다는 표정의 벽우진을 보며 청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저러면서도 벽우진의 육체나 감각은 무뎌지는 기색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한없이 게을러 보이는데 말이다.

“쉬십시오.”

“응.”

손을 들 힘조차 없다는 듯이 입술만 달싹이는 벽우진을 향해 청민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자 방 안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벽우진의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늘어져 있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의 집무실로 손님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것도 강호에서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인물들이었기에 벽우진으로서도 마냥 튕길 수만은 없었다.

아주 조금, 눈곱만큼 궁금한 점도 있었고.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죄송한 걸 알면서 왜 찾아왔어?”

“하하하.”

대놓고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오는 벽우진의 모습에 제갈현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나마 벽우진과 안면이 있기에 전면에 나섰지만 그라고 해서 벽우진이 편하지는 않았다.

사람을 다루는데 이골이 난 그이지만 벽우진은 만만치 않은 인물이어서였다.

게다가 지은 죄가 있기도 했고.

“흠흠!”

“가래가 올라오면 나가서 침 뱉고 와. 더럽게 킁킁거리지 말고.”

“끄응!”

헛기침을 하던 개왕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다짜고짜 내뱉는 하대에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따질 수가 없는 게 겉모습은 저래도 벽우진은 나이는 물론이고 배분도 그보다 높았다.

심지어 소림무제보다도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게 벽우진이었다.

“왜? 꼬와? 꼬우면 나가. 나도 불편하게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거 말이 좀 심하신 거 같소이다.”

“같소이다?”

삐딱하게 앉아있던 벽우진이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로 올렸다.

가부좌를 틀 듯이 오른쪽 다리만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세가 묘하게 거만한 느낌을 풍겼다.

“아무리 그래도 개방주인데···.”

“그 대단한 개방주께서 본파를 괄시하고 무시하며 외면했었지.”

“끄응! 죄, 죄송합니다.”

말발로 밀어붙이는 벽우진의 모습에 개왕이 결국 무릎을 꿇었다.

압도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의 사과에도 벽우진의 표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자기 주제를 확실하게 깨달았으면 해. 곤륜과 개방은 더 이상 과거의 관계가 아니니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따라 더욱더 까칠한 벽우진의 모습에 제갈현이 조심스럽게 중재했다.

분위기가 그가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듯해서였다.

“글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고 생각해서 말이지. 더구나 흐른 세월이 얼마인데.”

“······.”

뼈가 한 가득 담겨 있는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눈치를 살피는 것은 아니었다.

“귀파가 느꼈을 배신감에 대해서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누구도 없을 것이에요. 하지만 모두 사과를 하고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어떻겠어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벽우진과 같은 배분이라 할 수 있는 아미파의 금강신니가 차분하지만 똑 부러지는 어조로 말했다.

벽우진이 느꼈을 고통과 아픔이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과거에 연연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오독문이 남아있는 현 시점에서는 더욱더.

그렇기에 그녀는 이쯤에서 정리했으면 했다.

“한 마디로 내가 속이 좁다?”

< 제 33장. 할 건 해야지?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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