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05화 (105/325)

< 제 33장. 할 건 해야지? -01 >

다른 호법들과 같이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온 진구가 요상한 조합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비정상으로 보이는 이들의 무위가 보통이 아니어서였다.

“괜찮으십니까, 장문인!”

“보이는 대로. 근데 여긴 무슨 일이지?”

유일하게 곤륜산을 오른 적이 있어서인지 길잡이 역할을 맡은 듯한 제갈현을 향해 벽우진이 다짜고짜 용건부터 물었다.

아무리 안면이 있고, 오대세가의 한 곳인 제갈세가의 수장이라고 하나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자연스레 벽우진의 어조에는 날이 서 있었다.

게다가 제갈현은 혼자 온 게 아니라 뒤에 수백 명이나 되는 인원을 데리고 왔기에 벽우진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냈다.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저희는 곤륜파가 걱정되어 온 것입니다. 북해빙궁이 곤륜산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북해빙궁을 추격해온 것이다?”

“예.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되니까요. 그런데, 이미 상황은 종결된 거 같습니다.”

침착한 어조로 제갈현이 말하며 주변을 훑었다.

아직은 깜깜한 밤하늘 아래 곤륜파의 경내를 횃불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북해빙궁도로 보이는 수백 개의 시체들이 보였다.

군데군데 벽력탄이라도 터진 듯한 흔적과 함께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왔군. 지난번에는 아예 모른척 하더니.”

“···죄송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왔는지 얼굴이 땀범벅인 제갈현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뇌부들은 여유가 조금 있어보였지만 일반 무사들은 하나같이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그 말은 충분히 들었고.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지?”

“낙오자가 없다면 삼백육십칠 명일 것입니다.”

“일단 숙소부터 안내해주지.”

“아닙니다. 정리하는 걸 돕겠습니다. 또 장문인께 소개해드릴 분들도 계시고요.”

제갈현이 슬쩍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막 격전을 치렀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원래 성격이 좀 까탈스럽기도 했고.

“상황이 이래서. 내일 받도록 하지.”

“그럼 정리를 돕겠습니다. 그래야 저희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마음대로 해.”

굳이 일손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기에 벽우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 많은 시체를 언제 정리하나 걱정하고 있었기에 벽우진은 자연스럽게 제갈현의 선의를 받아들이며 장내를 정리했다.

장문인답지 않게 앞장서서 시체들을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몇 명이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허어.’

그러다가 호법들에게까지 시선이 옮겨간 이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벽우진만 하더라도 보통이 아닌 것을 알아챌 수 있었는데 호법들 역시 하나같이 만만한 이가 없어서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열 명 중 네 명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만으로도 곤륜파 호법들의 위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놀랍게도 호법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어서였다.

‘믿을 수가 없군.’

그것을 꿰뚫어본 이 중 한 명인 남궁진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숫자는 적을지 모르나 고수의 질은 그 어떤 곳과도 비교를 불허해서였다.

‘만약 멀쩡했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남궁진의 시선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왼쪽 소매로 향했다.

북해빙궁의 절대고수 중 한 명인 옥면검존을 쓰러뜨리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그 대가는 그의 왼팔이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마음으로 옥면검존을 쓰러뜨렸지만 대신 팔을 잃었던 것이다.

물론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불가능해.”

“예?”

“멀쩡해도, 승산이 없어. 그건 가주도 그렇고, 나도 마찬가지고.”

“방주님.”

“주변을 봐. 감당할 수 있겠어?”

왼쪽 발이 없는 개왕이 눈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그러자 북해빙궁과의 전투로 초토화가 된 전경이 남궁진의 두 눈에 들어왔다.

“으음!”

“난 감당이 안 되는데.”

“······.”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리고 강하니까 살아남은 거야. 무림의 전쟁은 국가 간의 전쟁과 다르다는 걸 가주도 알고 있지 않나. 절대자 한 명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남궁진이 두 눈을 감았다.

그 역시 강호를 대표하는 고수이기에 절대자라고 불리는 무인들의 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절대자는 전쟁의 향방을 혼자의 힘으로 바꿀 수 있기에 절대자로 불리는 것이었다.

그도 한때 그게 가능했었고.

‘그래도 인정하기가 쉽지 않군.’

오랜 세월 강호를 호령했던 이가 바로 남궁진이었다.

제왕검이라는 별호와 함께, 삼제오왕칠성 중 당당히 일좌를 차지하고 있던 게 그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을 터였다.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음이야. 새 시대가 오고 있고, 그 흐름을 우리는 바꿀 수 없어. 치고 올라간 때가 있는 것처럼 이제는 내려올 때가 된 게지.”

“허허허허.”

남궁진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러므로 받아들여야 했다.

“수긍하고 받아들이며 체념하는 게 쉽지만은 않겠지만 말이지.”

“방주님께서도?”

“나는 뭐 사람 아닌가. 자네야 두 발은 멀쩡해서 맘껏 돌아다닐 수 있지만, 난 이제 한 발 밖에는 남지 않았지.”

개왕이 히죽 웃었다.

발 한쪽을 잃었지만 의외로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개방의 특징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경신술을 이제는 더 이상 펼칠 수 없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리 보지 말게. 싸움은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나. 후학이나 양성하면서 뒷방 늙은이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사실 이 나이까지 피를 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제자의 복수도 했으니 난 이제 여한이 없어. 내가 할 일은 이제 다시 후개를 키우는 것만 남은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후련한 표정의 개왕을 보며 남궁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북의 전쟁은 오늘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강남 무림은 아니었다.

아직 강남 무림은 오독문과 전쟁 중이었다.

“그쪽도 슬슬 정리되지 않겠나. 일단 사천당가의 합류로 반등을 이루어냈고, 우리도 이제는 여유가 생겼으니.”

“뭐해? 정리 안 할 거면 돌아가!”

그때 벽우진의 퉁명스러운 일갈이 경내를 갈랐다.

자신은 열심히 시체를 나르는데 천하태평하게 수다나 떨고 있자 심기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러자 두 사람이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겉모습은 이제 약관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벽우진의 배분은 그들보다 위였기에 둘 다 감히 따지지를 못했다.

‘허참.’

나이로도, 배분으로도, 거기다 무공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 벽우진의 모습에 남궁진이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웃긴 건 수뇌부들이 그러니 죽자 사자 따라온 각 방파와 세가의 무인들도 서둘러 시신들을 날랐다.

한편 육안에 공력을 집중해야 겨우 보일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곤륜파와 북해빙궁의 일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하오문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승산이 아예 없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다들 패배 쪽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곤륜파가 아무리 저력이 있고, 고수가 제법 있다고 하나 그래도 상대가 북해빙궁이었다.

강북 무림을 거의 집어삼킬 뻔했던.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정반대가 나왔다.

이기더라도 가까스로 이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과는 곤륜파의 압승이었다.

“허허.”

특히 벽우진과 북해빙궁주의 대결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설향이 보기에도 천외천의 싸움이었다.

경천동지, 천번지복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초인들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전투에서 살아남은 쪽은 곤륜파였다.

심지어 부상자는 제법 많지만 죽은 자는 없었다.

“진짜 이길 줄이야···.”

“확실히 곤륜파 장문인이 걸물은 걸물인가보다. 이 판세를 이렇게 쉽게 뒤집을 줄이야.”

“저런 무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설향과 같이 곤륜산의 전투를 지켜보던 양선이 아직도 창백한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두 존재의 대결을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오금이 저려왔다.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심장이 턱하니 멈춘 듯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피륙으로 이루어진, 아니 같은 인간이 저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대단하다는 무인들이 많다지만, 저런 신위를 보일 수 있는 자들은 과거까지 포함해도 손에 꼽을 게다.”

괜히 북해빙궁이 강북 무림의 8할을 점령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고수가 있으니 단기간에 그 많은 성들을 정복할 수 있었을 터였다.

다만 의문인 것은 그런 신위를 지녔던 북해빙궁주가 안휘성 합비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이었다.

‘협공을 당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쉽게 밀릴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아무리 소림무제와 제왕검, 기성이 협공했다고 하나 아까 전의 전투를 보면 북해빙궁주가 밀렸다는 게 쉬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북해빙궁주가 보여준 무위는 압도적이었다.

소림무제와 제왕검, 기성의 이름값이 아무리 높더라도 말이다.

“이제(二帝)도 패선에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둘은 이제 지는 해들이지. 물론 연배가 높은 패선이 신성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만.”

“외관만 보면 한참 어려 보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장문인은 다 가졌네요. 젊은 육체, 막강한 무공, 거기에 명분과 신분까지.”

“어떻게 보면 강북 무림을 평정한 거지.”

설향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워낙에 거리가 멀어 까만 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벽우진만을 주시했다.

벽우진의 가치가 오늘 이후로 수직 상승 할 것임을 알 수 있어서였다.

“평정이라니.”

양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벽우진이 자신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우리는 일단 내려가자꾸나. 저들에게 굳이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개방의 방주인 개왕이 와 있는 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하오문주의 정체가 드러나 있지 않다고 하지만 개왕이라면 혹 몰랐다.

어쩌면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할 수도 있었고.

그 정도 역량이 개방에게는 있기에 설향은 몸을 돌렸다.

“앞으로는 곤륜파와의 관계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이야.”

“그리하겠습니다.”

양선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굳이 설향이 그리 말하지 않아도 더욱더 조심할 생각이었다.

이제는 청해성에서의 패선이 아니라 중원의 패선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은 곧 중원의 수많은 이들이 벽우진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걸 뜻했다.

‘경쟁자가 많아지겠는데.’

패선이라 불리는데도 은근히 벽우진을 까내는 이들이 존재했다.

십존의 둘을 쓰러뜨렸음에도 그의 무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들은 이번 일로 쏙 들어갈 터였다.

강북 무림을 단독으로 휩쓸었던 북해빙궁을 막아낸 게 곤륜파였으며, 북해빙궁주를 홀로 쓰러뜨린 게 벽우진이었으니까.

‘더 열심히 궁리하고 움직여야겠어.’

양선이 눈을 빛냈다.

다른 곳들보다 먼저, 그리고 오랫동안 벽우진을 봐온 만큼 출발선 자체가 달랐다.

그걸 그녀는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 제 33장. 할 건 해야지?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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