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2장. 곤륜혈투(崑崙血鬪). -01 >
하남성 개봉에 도착한 제갈현이 깊은 눈빛으로 황하강을 내려다봤다.
복잡한 그의 심사와는 달리 황하강은 늘 그렇듯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결국 놓쳤군.”
지그시 황하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제갈현에게로 개왕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의 몸 상태가 이상했다.
왼쪽 발이 있어야 할 자리가 휑했던 것이다.
“포위망이 뚫린 순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제대로 추격을 하기에는 저희들도 여력이 없던 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던 것인데.”
“가주가 생각하기에는 어디로 갔을 것 같나?”
“북해는 아닐 겁니다.”
“돌아가지 않았을 거라고?”
개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력의 반 이상이 날아간 만큼 북해빙궁이 본래의 영토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서였다.
“대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전멸할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전력으로도 두어 개의 성 정도는 차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회군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진짜 북해로 돌아가려 했다면 개봉으로 오지는 않았겠죠.”
“으음!”
개왕이 침음을 흘렸다.
확실히 일리가 있어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의문이 들었다.
왜 굳이 이곳으로 왔을까 하는.
“추측이기는 한데 어쩌면 곤륜파를 노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설마 복수를 위해서?”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또한 청해성의 위치를 생각하면 북해빙궁 입장에서 나쁘지 않습니다. 서쪽으로는 서장이, 동쪽으로는 감숙성이 있으니까요. 중간 거점으로 사용하기에도 나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를 유인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우리를 청해성으로 보내놓고 다시 남궁세가를 노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밝혀진 게 없는 이상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추측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그렇게 움직인다면 남궁세가가 위험합니다. 어쩌면 양패구상을 당할 수도 있고요.”
“으음! 중원에서 이렇게 용의주도하게 움직일 줄이야.”
“북해빙궁을 따르는 곳이 의외로 많아서 그럴 겁니다.”
“그만큼 백도가 신망을 잃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무문들 역시 힘을 축적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씁쓸한 표정을 짓는 개왕에게 제갈현이 웃으며 말했다.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서였다.
무인이 야망을 가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막말로 오대세가만 하더라도 늘 수좌의 자리를 노리지 않던가.
“일단은 최대한 주변을 탐색해 봐야겠어.”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곤륜파에도 연락을 보내야 하지 않겠나? 아닐 수도 있지만 대비는 해 놓아야지. 게다가 어느 정도는 관계 개선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제가 직접 전서응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인편보다는 전서응이 낫겠지.”
곤륜파에게는 지은 죄가 있기에 개왕은 특히나 더 신경 썼다.
같은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만약 진짜 곤륜파로 갔다면···.”
“솔직히 말씀드리면,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곤륜파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하나 지금 북해빙궁의 전력을 생각하면 홀로 상대하기에는 버겁습니다.”
“우리도 수로를 이용하면 어떻겠나?”
1할의 가능성이라도 대비하는 게 맞았다.
그렇기에 개왕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얼마나 빨리 북해빙궁의 위치를 파악하느냐가 관건일 것 같습니다. 만약 반나절 이상 거리가 벌어져 있다면, 힘듭니다. 도착이 문제가 아니라 도착해서 싸울 것도 생각해야 하니까요.”
“으음!”
개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시 한 번 속도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황급히 주변에 있던 방도들을 끌어 모았다.
방도들을 최대한 풀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북해빙궁의 위치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푸드득.
그러는 사이 제갈현에게로 한 마리의 매가 내려왔다.
정확히 그를 알아보고 팔뚝에 내려앉았던 것이다.
“본가에서 왔구나.”
삐이익!
말귀를 알아듣는 모습에 제갈현이 옅게 웃으며 전서응의 다리에 앙증맞게 매달려 있던 작은 통을 열었다.
그러자 돌돌 말린 서신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남 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다행히 큰 문제는 없는 듯합니다. 사천당가의 합류로 오독문을 큰 피해 없이 상대하고 있다네요.”
“그렇습니까.”
슬그머니 다가왔던 사마륭이 정말 다행이라는 듯이 얼굴을 주억거렸다.
북해빙궁에 이어 오독문까지 밀어낸다면 중원의 평화를 되찾았다고 말할 수 있어서였다.
물론 북해빙궁의 경우 잔당이 남아 있지만 그는 현재 자신들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북해로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하게 무너뜨리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일반 독강시에 이어 백독강시, 천독강시라는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군요.”
“허어.”
사마륭이 장탄식을 흘렸다.
일반 독강시만 하더라도 상대하기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닌데 그보다 더한 독강시들이 등장했다고 하자 기가 질린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독문이 얼마나 지독한 곳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도 사천당가가 있으니 큰 피해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독제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 더구나 사천당가는 의술 역시 중원에서 손꼽히니까요. 우리는 북해빙궁만 신경 쓰면 됩니다.”
“가정이기는 합니다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남진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갈현이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확실히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른 이동경로를 보여준 점을 생각하면 사마륭의 추측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힘이 빠진 두 곳이 반등을 노리기 위해 한 곳에 뭉치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네요.”
“그 부분도 한 번쯤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도 곤륜파로 향했을 가능성이 높지만요.”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마륭은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같은 지자로서 아무래도 통하는 게 많아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내심 북해빙궁의 잔당이 곤륜파로 향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곤륜파의 위상이 너무 높아지는 걸 그는 경계했던 것이다.
‘다들 설설 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말이지.’
사마륭은 곤륜파가 못마땅했다.
문파나 세가의 흥망성세는 세상의 이치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마치 죄진 것 마냥 행동하는 게 사마륭은 너무나 거슬렸다.
어차피 서로가 이해관계로 묶여 있는 사이였는데 말이다.
‘양패구상 하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곤륜파를 떠올리며 사마륭이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그런 그의 표정을 본 사람은 없었다.
제갈현은 여전히 황하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고 사마륭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기에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스스스슥!
초승달이 겨우겨우 얼굴을 드러낸 야심한 시각에 곤륜산을 오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인영은 시간이 갈수록 많아졌다.
어느 순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너무 허술한데.’
선두에서 비탈길을 오르던 파천도존이 눈매를 좁혔다.
아무리 인원이 적다고 하나 그래도 자신들과 두 번이나 부딪쳤는데 경계를 서는 이가 하나 없다는 게 이상해서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존들도 마찬가지인 듯 주변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조용한 것 같지 않아?
-내 말이. 이렇게 경계조도 없는데 무음살존이 죽었다고?
곤륜파 경내로 들어온 사존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주변이 확 밝아졌다.
화르륵!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던 경내가 한순간에 밝아졌던 것이다.
그 모습에 사존들은 물론이고 북해빙궁의 무인들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는 단체로 쥐새끼가 될 생각인가 보군.”
“···당신이 패선인가?”
“쥐새끼가 말도 하는군.”
파천도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짜고짜 쥐새끼라 하니 제아무리 그라도 격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야밤에 몰래 쳐들어온 적들에게 예의를 차리는 게 더 이상한 거 같은데.”
백수장존의 말에 벽우진이 코웃음을 쳤다.
암습을 하려는 이들이 예의 운운하니 기가 찼던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올 줄 알았지?”
“두 번이나 온 놈들이 세 번이라고 못 올 리가 없으니까.”
벽우진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북해빙궁의 병력을 훑었다.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시기를 정확히 알기 힘들었을 텐데.”
“내 귀가 좀 예민해서 말이지. 쥐새끼들의 움직임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거든.”
“보자보자 하니까!”
자꾸 쥐새끼라 하는 말에 천라혈존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내 들려진 파천도존의 손에 의해 천라혈존은 분노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도망가지 않았지?”
“쥐가 무서워 이사 가는 사람이 있나?”
“자신의 실력을 너무 맹신하는 모양이군. 아직 어린 제자들도 있는데.”
“어리다고 살려줄 것도 아니잖아?”
파천도존의 시선이 벽우진의 뒤쪽으로 향했다.
곤륜파의 제자들을 응시하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동요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나같이 단단한 안광을 뿌리며 그를 마주보기만 했다.
“맹신이라고? 그럴 리가. 난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건데.”
파아아앗!
벽우진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런데 그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묵직한 기도가 벽우진을 중심으로 사방을 짓누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헙!”
“크흡!”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벽우진에게서 흘러나온 무지막지한 기도가 동심원을 그리듯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히 앞으로 일 보 내딛은 것뿐인데도 보이지 않는 중압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아서였다.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곳이 곤륜산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으음!”
벽우진의 싸늘한 일갈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파천도존이 침음을 흘렸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기도도 기도지만 정황을 읽는 눈 역시 기민한 것 같아서였다.
저벅저벅.
거기다 그를 비롯한 사존을 압박하려는 듯이 호법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치 제자들을 지키듯이 전면에 나섰던 것이다.
-쉽지 않겠군.
벽우진의 존재감에 가려져 있던 호법들이 본격적으로 나서자 백수장존이 무거운 목소리로 전음을 보내왔다.
백귀존에게 들었던 대로 단 한 명도 만만한 이가 없어서였다.
동시에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촌구석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저만한 고수들이 모여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파산존과 무음살존이 죽은 게 이해가 가는군.
파천도존이 무거운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갈무리해두었던 기도를 드러낸 순간 그는 벽우진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또한 백귀존이 그토록 곤륜파를 경계한 것도.
‘여기서 끝장을 내야 해.’
무시무시한 기도를 뿌리는 벽우진이었지만 파천도존은 기죽지 않았다.
강하다고 해서 꼭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쿠웅. 쿵.
북해빙궁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무인들이 그의 뒤에 있었다.
또한 궁주 역시 건재했기에 파천도존은 계획대로 곤륜파를 지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저렇게 기도를 드러낸 것 자체가 우리들의 시선을 자신들에게 집중시키기 위함이니까.’
벽우진은 분명 강했다.
호법들 역시 소문 이상의 강자들이었다.
하지만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 제 32장. 곤륜혈투(崑崙血鬪).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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