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1장. 뒤끝 있는 자들. -02(4권 끝) >
“사형께 개인적으로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 배 동생도 사형께 드릴 말이 있다고 하고.”
“배 동생?”
“저보다 다섯 살 동생이더라고요.”
“언제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제야 말하네요. 말 편히 하시지요, 장문인.”
자연스럽게 어깨에 척하니 손을 올리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없던 사이에 상당히 친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벽우진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쁜 기억이 남아 있는 고향에 돌아가는 것보다 아예 이곳에 자리를 잡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곤륜파에 대장장이가 있어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언제까지 하오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말이지.’
지금이야 소수정예라는 말이 전역에 퍼져 있지만 나중에 본격적으로 속가제자들을 받아들이면 그들에게 나눠줘야 할 검이나 도만 해도 수십 자루일 터였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배율석이 곤륜산에 터를 잡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결정이야 배율석이 하는 것이지만.
“그러길 원한다면야.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예. 지난번에 말씀드린 약속을 지키려고요. 남은 생을 곤륜파에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내가 되게 나쁜 놈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럼 종신계약이란 말은 어떻습니까?”
“더 나빠 보여.”
벽우진이 미간을 좁혔다.
둘 다 어감이 다 이상했던 것이다.
왠지 모르게 악당이 된 듯한 느낌이랄까.
주고받는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어감이 좀 이상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다시 고향에 돌아갈 마음도 없고요.”
“이해는 가.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근데 굳이 약속을 이행할 필요는 없다. 그걸 원하고 내가 추면색귀를 잡아온 게 아니니까.”
“알고 있습니다. 장문인께서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요. 물론 그렇다고 약속을 지키지 않을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요. 다만 여러 가지를 다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형.”
“해 봐.”
묘하게 이어져 있는 듯한 세 사람의 분위기에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순히 친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였다.
“혁문이를 제자로 들이고 싶습니다.”
“호오.”
비스듬히 앉아있던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것이었다.
그런데 배율석이랑 배혁문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라 그런지 둘 다 표정이 담담했다.
“일단 둘 다 결정을 내린 상태입니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제자로 들이지 않을 거야?”
“어···.”
당당하게 말을 이었던 청민이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옆에 서 있던 배혁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농담이야, 농담. 나야 네가 제자를 들이면 좋지. 다만 예상 밖이라 조금 놀란 것이고. 어쨌든 셋이 왜 같이 찾아왔는지 알겠네.”
“그럼 허락하시는 겁니까?”
“응. 잘 키워 봐. 청민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감사합니다.”
“아마 지금껏 내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를 거야. 후후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청민을 향해 벽우진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청민도 만만치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왕 시작한 거 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 승부욕. 아주 좋아. 남자로 태어나 그 정도 승부욕은 있어야지. 우리 애들에게도 좋은 경쟁자가 될 것이고.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 혁문이는 아직 열 살 밖에 안 되었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잔뜩 긴장해 있던 배혁문도 청민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사백이라 부르거라. 공적으로는 장문인이지만 사적으로는 너의 사백이니.”
“예!”
“그래. 우렁차니 더 보기 좋구나. 남자라면 당당해야지. 어깨도 피고. 그래야 몸이 예쁘게 자란단다.”
“네!”
이제는 정식적으로 곤륜파의 식구가 되었기에 벽우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새삼 청민과 배혁문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석이도 편하게 머물고.”
“곤륜파의 병장기나 필요한 도구들을 만들 생각입니다. 가장 먼저 만들 것도 생각해 두었고요. 추면색귀에게 사용한 것들은 살기가 너무 짙어서 다시 녹여서 버렸습니다.”
“잘했어. 망치도 그렇고 못도 살기와 원한이 너무 짙었어. 그런 건 몸 근처에 두면 좋지 않아.”
“맞습니다.”
오로지 손녀의 복수만을 위해 만들었던 것들이었다.
그런 만큼 쓰임을 다했기에 버리는 게 맞았다.
대장장이로서는 만들지 말아야 했던 물건이기도 했고.
“가장 먼저 만들게 있다고?”
“예. 청민 형님께서 넌지시 압박 아닌 압박을 주셔서요.”
“흠흠!”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인지 청민이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요구했는지 감이 잡히질 않아서였다.
“뭔데?”
“장문령부를 부탁하셨습니다. 정확하게는 곤륜파 장문인의 검이요. 원래 있던 검이 부러졌다고 들었습니다.”
“확실히 필요하기는 하지. 나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다음 대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하는 게 맞지.”
벽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장문령부가 필요하기는 했다.
언제까지 없이 지내는 것도 말이 안 되어서였다.
다만 지금까지는 꼭 필요하지 않았기에 벽우진도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그걸 제가 한 번 도전해볼까 합니다. 은혜를 보답할 겸 해서요. 떨어졌던 감도 확실하게 찾았으니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검이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게?”
벽우진의 시선이 청민에게로 향했다.
그도 기억은 하고 있지만 워낙에 오래 전에 봤었던 거라 정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반면에 청민은 가장 최근에 봤었기에 벽우진보다는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처럼 아예 새로운 검을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검은 검일 뿐이지. 단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할 뿐.”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 역시 굳이 똑같은 형태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이미 그에게는 애병이 있기도 했고.
“평생의 역작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도전하겠습니다. 그래서 시일은 확실하게 말씀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급한 건 아니니까 여유롭게 해도 돼. 하지만 어중간하면 안 된다. 적어도 500년은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해.”
“알겠습니다.”
배율석의 두 눈이 번뜩였다.
장인으로서의 도전정신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그냥 검도 아니고 곤륜파의 검이며 앞으로 대를 이어 사용할 검이었다.
그런 만큼 50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
“너무 부담을 가지지는 말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 정도의 검은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운도 따라줘야 해. 괜히 구파일방의 장문령부가 신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게 아니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보고는 다 한 거지?”
“예, 사형.”
“좋아. 그럼 다들 각자 일 봐. 나도 업무를 마저 봐야 하니.”
벽우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오전 내내 일을 했음에도 서류더미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였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당분간 애들은 진 호법에게 맡기고 넌 혁문이에게 집중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래그래.”
벽우진이 손짓했다.
그러자 세 사람이 공손히 인사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스르륵. 스륵.
다시 고요해진 집무실에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파천도존이 달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있을 기습조를 파악하기 위해 기감을 최대한 높이고서 주위를 끊임없이 살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살아남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십존이었던 북해빙궁 최고의 무사들은 이제 그를 포함해서 넷 밖에 남지 않았다.
북해를 떨쳐 울렸던 그들이, 강북 무림을 거의 집어삼키다시피 했던 그들이 이제는 여섯이 죽고 넷만 남은 것이었다.
그 사실이 파천도존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으득!
“제갈현!”
파천도존이 제갈세가의 가주를 거론하며 이를 갈았다.
다 잡았던 남궁세가를 놓치고 이렇게 패잔병 신세가 된 게 전부 다 제갈현 때문이었다.
그가 기기묘묘한 수법으로 소림사와 아미파의 병력을 이끌고 후방에서 기습을 했기에 북해빙궁이 지금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만약 그들이 아니었다면 북해빙궁은 지금쯤 남궁세가를 점령해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렇게 이를 간다고 해서 작금의 상황이 달라지진 않는다.”
“···알고 있다. 그저 기성(奇星)이 떠올라서 그런 것뿐이다.”
“이제는 좀 안심해도 될 것 같은데. 따라오는 낌새가 없어. 저쪽도 우리가 그곳으로 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겠지.”
“그래도 아직은 이르다. 기성을 만만하게 보면 안 돼.”
파천도존이 고개를 저었다.
다 잡았다고 여유를 부리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난 것이기에 파천도존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더구나 중앙에는 궁주가 타고 있는 가마가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더 이상의 습격이 없는 걸 보면 포위망을 벗어난 거 같은데.”
“그걸 노린 걸 수도 있지. 우리를 방심하게 만든 다음에 일망타진하려는. 잊은 모양인데 저 쪽에는 제갈현과 사마세가가 같이 있다. 머리 쓰는 건 저 쪽이 위야.”
“그렇긴 하지만.”
천라혈존이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된통 당했다지만 그래도 너무 경계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포위망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동안의 안일한 마음가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잊으면 안 돼.”
“알고 있지. 알고 있다고.”
“더구나 저들에게는 개방이 있어. 황하에서 배를 타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파천도존이 그리 말하며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넷만 남은 십존도 십존이지만 북해빙궁의 병력 역시 반 토막이 난 상태였다.
이 정도로는 전투에서 이겨도 제대로 지배하기가 힘들었다.
‘일단은 숨을 골라야 해. 다시 전력을 꾸리고 쓰러뜨려도 되니까. 이미 한 번 쓰러뜨린 적이니 두 번은 더 쉬울 터.’
단 한 번의 대패로 피해가 막심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북해빙궁의 전력은 반 이상 깎여 나갔지만 휘하로 들어온 이들을 모조리 끌어 모으면 숫자는 금세 채울 수 있었다.
강시가 거의 없다는 게 뼈아팠지만 그래도 파천도존은 아직은 재기할 여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알아차릴까? 제갈세가주나 사마세가주가 알아차려도 그때는 이미 우리가 도착했을 텐데?”
“알아차렸을 때 모든 게 끝나 있어야 해. 그래야 다시 병력을 꾸릴 시간을 벌 수 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죽은 녀석들의 복수도 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투가 아주 중요하다. 확실하게 복수도 하고, 기세도 올려야 하니까.”
“패배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모양이네?”
천라혈존이 피식 웃었다.
어째 말하는 모양새가 패배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아서였다.
“너는 질 거라고 생각하나?”
“힘들지. 하지만 네 말마따나 너무 방심해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지금껏 계속 방심해서 당했잖아. 죽은 빙마존의 말도 곱씹어볼 필요도 있고. 아니면 백귀존에게 물어보거나.”
“파악은 끝났다. 우리가 곤륜산에 도착한 순간, 곤륜파는 더 이상 강호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제 31장. 뒤끝 있는 자들. -02(4권 끝)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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